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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꾸익!”
멧돼지가 거칠게 내달렸다. 짐을 단단히 실었음에도 힘이 대단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말보다 지구력도 높은 것이 멧돼지였다. 말과는 달리 거칠고 굵은 털 때문에 화살이 제대로 안 박히는 장점도 있었다.
12마리에 불과한 펄 발드 가족 한 무리가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숫자가 적은 이유는 펄 발드는 유목 민족이라서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로 뭉치기가 힘들었고, 뭉칠 때는 항상 보상이 필요했다. 보상도 안 주면서 불러모아 싸움이나 큰 사냥을 하면 지휘관의 목이 따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서로 떨어지고 살아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유목민족이었다. 펄 발드 또한 그 묶음에서 벗어 나오지는 못했다.
확실한 약탈이 약속되었을 때나 벌떼처럼 모일 수 있었다. 약탈 민족이 가진 단점이기도 했다. 유목민 상대로는 청야 전술이 가장 으뜸 전술인 이유이기도 했다.
한 가족 무리는 다른 가족 무리를 만났다. 서로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아주 어려서 털이 백색인 펄 발드도 양손으로 손도끼를 쥐고 있었다.
콧물이 인중이 가득했다.
“어디로 가는가!”
“뗀코리 님에게 가고 있다!”
<백발의 뗀코리(Tenkoli)>는 파충류의 초원에서 태어난 영웅이었다. 인간에게 거래를 통해서 가죽을 식량으로 바꾸면서 일약 스타몰이를 하며 순식간에 크게 추대되었다. 자연스럽게 이 사태를 해결할 자는 뗀코리라고 믿었다.
“서로 300걸음을 두고 갑시다!”
“좋소!”
펄 발드의 가장들은 그렇게 합의를 봤다. 다른 가족 무리가 나타나도 똑같이 그렇게 하였다. 점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뗀코리가 있는 초원의 중심으로 향했다.
동부 지리로 보면 중부의 시작이었고, 중앙의 동북쪽이었다.
이미 그곳에는 많은 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고, 뗀코리가 있는 곳에서는 수컷 펄 발드들이 모닥불을 하나 피워두고, 털가죽을 몇 겹이나 깔고 앉아있었다.
벽이 없고, 천장만 있는 천막 아래에서 백발이 성성한 뗀코리가 보였다. 서둘러 펄 발드 가장이 그곳으로 먼저 향했다. 이야기는 벌써 많이 진행된 듯했다.
“인간들에게 우리의 싸움 방식을 확실히 보여줘야 할 때요!”
“옳소!”
전쟁을 하자는 것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만큼 현재 펄 발드들은 먹고 살기 편했다. 상식적으로 밀과 두꺼운 털가죽을 교환할 수 있어서 거래는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많은 잉여 식량이 남겨져 있었다. 생존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런 판단이 가능했다.
<백발의 뗀코리>는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자신감 하나로 똘똘 뭉쳐있었고, 실제로도 풍기는 기세는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무서운 기세를 띠고 있었던 강철을 두른 인간 전사.
늙었기에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혼자서 전쟁을 어찌할 수 있을까? 안 그렇소? 걱정하는 것도 큰 것이 아니오.”
대부분의 펄 발드들은 뗀코리의 걱정을 이상하게 여겼다.
‘확인하기는 해야 한다.’
“상대는 기병이 있고, 보병도 있다. 언덕을 점유하고 있다고 하고, 기병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에 유념하여 적당히 싸워보고, 격파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때 큰 병력을 쓰자.”
뗀코리의 겁쟁이 같은 모습에 펄 발드들은 혀를 찼다. 그 의견에 반감을 지닌 펄 발드들도 제법 보였다.
결국 한 번 뭉친 펄 발드들은 다시 초원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북쪽에 똬리를 틀었던 펄 발드들만이 남아서 전쟁 이야기를 했다.
“왜 자꾸 보시나? 함께 하려고 하시는가?”
북쪽에 있지도 않았지만, 관심을 보이는 가장들도 보였다. 모두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전쟁에 인력이라도 내어주어서 먹고 살려고 하는 듯했다.
“오시오.”
초원 북부의 가장들은 이들을 반겼다. 은근히 초장에 인간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싶었고, 뗀코리가 시간을 들여보자고 말하며 한 걸음 물러났기에 그 반감이 자연히 녹아 있었다.
“쩝쩝.”
굶주린 펄발드 하나가 냉큼 앉아서 뭐라도 하나 집어 들어서 입에 넣고, 몇 개는 뒤에 던졌다. 가족들이 허둥지둥 받아서 흙을 털고 몸을 낮춘 채 먹었다.
“뗀코리 말이요. 가진 것이 많으니, 확실히 겁이 많아지는군. 그는 우리를 이끌 재목이 더는 아니다. 안 그런가?”
“가축에 눈이 멀어서···. 쯧쯧.”
수십의 무리를 이끌던 뗀코리는 이제 수백을 이끌고 있으며 광활한 초지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 그걸 잃기 싫어서 뭉그적거리는 것이라 여기기도 했다.
북부로 되돌아갈 펄 발드의 숫자는 160마리가 넘었고, 모두 하나로 뭉쳤다.
멧돼지에 장력이 낮아 보이는 단궁 그리고 슬링과 나무 방패. 돌이나 납 따위를 섞어서 만든 잡광물로 만든 창 등이 펄 발드들의 무기였다.
매우 두꺼운 그물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올가미도 서너 개를 멧돼지 목 옆에 달았다. 탈 것을 타고 짐승을 잡는데, 올가미와 그물이 발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몇 인간을 습격하면서 인간에게도 올가미와 그물이 아주 잘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두둑하게 준비했다.
“꾸이익!”
멧돼지들은 성을 내며 열심히 내달리지는 않았다. 천천히 가야 했는데, 펄 발드들이 관리하는 가축들도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다. 가축이 몇 없는 펄 발드들도 마찬가지로 절로 걸음 속도가 느려졌다.
*
“150마리는 넘어 보이는데.”
이실레아가 발룬에 올라탄 채 멀리서 오고 있는 펄 발드들을 볼 수 있었다. 날씨가 워낙 좋아서 아주 멀리까지 잘 보였다. 특히나 발룬의 덩치는 코뿔소보다 조금 더 체고가 높았기에 더더욱 멀리 볼 수 있었다.
가축들을 제외하고, 150마리의 전투 가능 인원이 있는 펄발드였다. 병사들에게는 이것보다 적다고 말을 해야 했다. 적의 규모는 교육을 받지 않은 병사들은 결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사기적인 측면에서도 병사들에게 적은 것이 좋았다.
“150마리? 싸울 수 있는 펄 발드는 반절이겠네.”
도렌의 말에 이실레아가 매력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아닌가?”
“아니지. 수컷이든 암컷이든 저들은 모두가 기마 전력이야. 유목 민족의 강함이기도 하지.”
기본적으로 궁수를 훈련하는 데는 최소 3년이 걸리고 숙련병은 10년을 둬야 했다.
보병을 훈련하는 데는 1년도 아쉽고, 3년도 아쉽고, 10년도 아쉬운 법이다. 근접전의 베테랑 병사가 간부처럼 다른 병사들을 독려하는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기병은 최소 10년이었다. 궁기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소총수는 1달 만에 훈련을 끝내는 것에 비해서 어마어마한 재원이 들어가는 것이 병사였다. 불파겐 영지는 과잉 전력이 있다고 여겨지니, 유목민족이 가진 강함이 무엇인지 도렌은 이실레아의 설명을 듣고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안 말해줬던가?”
“그래. 훈련 기사부터 먼저 되라고 했잖아.”
한우물만 파게 한 것이 이실레아였다. 도렌은 <계승>이 없는 기사였기 때문에 최소한 병사들에게만큼은 존경을 받게 하려고 훈련에 대한 군사적 지식을 높게 쌓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엄청난 대군이야.”
“<파충류 초원 토벌>에 용병들이 동원된 이유를 알겠지? 체력 뺏기에 정규병이 죽으면 불파겐 자작님은 배가 아파서 잠도 못 잘걸.”
도렌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러했다. 또한 이실레아의 훈련을 받았지만 겉으로만 정규병인 것이 현재 불파겐의 정규병임을 알 수 있었다.
속은 텅 빈 그럴싸한 껍데기만 지닌 병사라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독기만 많지, 용병보다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에 기수들만 동원된 것을 알았다.
<바세안 토성>의 시민 중에서 말을 제법 타고 다닌 자들로 구성된 것이 현재 기수들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기병도 없었을 것이다.
“놈들은 싸울 생각이 있어 보일까?”
“당연하지.”
도렌의 말에 이실레아가 눈을 좁혔다. 멀리 있어서 무장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망쳤던 전과 다르게 하나가 되어서 오고 있다는 것으로 적에게 싸울 의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흩어진 용병들을 모으고 <토벽 언덕>에 집결하라고 해줘. 나는 놈들을 다른 쪽으로 유도할 테니.”
“알았어.”
도렌은 그대로 수긍하며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다. 이실레아가 도렌의 손을 잡자 도렌도 조금 힘을 주어서 잡아주었다. 손은 금방 떨어졌다.
“이랴!”
도렌이 홀로 뻗어 나갔다.
“우회한다! 적이 도착할 시간을 줄인다.”
“예!”
20기에 불과한 기병은 이실레아를 따라 천천히 우회하기 시작했다. 20마리의 말들은 전투마라고 부르기에는 덩치가 부족했지만, 체인메일과 두꺼운 천옷을 입고 있었다.
어지간한 화살과 투창은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이상으로 입기에는 말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높아져서 입을 수 없었다.
펄럭! 푸르르!
온갖 색을 지닌 천을 입은 기병들은 눈에 확 띄었고, 창대에는 폭이 좁고 길이는 긴 삼각깃이 펄럭였다.
“놈들이 움직인다!”
인간 기병이 우회하자 펄 발드들은 그들을 정면을 두고 유도됐다. 자연스럽게 어그로가 끌릴 수밖에 없었다. 백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덩치를 지닌 뿔 달린 사슴에다가 형형색색의 복장과 깃발을 흔드는 기병들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두 군대의 거리는 시시각각 좁혀졌다.
펄 발드들은 정직하게 이실레아의 군대를 겨냥했고, 이실레아는 그들의 진행방향과는 다르게 우회를 하며 빙 둘렀다.
자연스럽게 되돌아가야 할 길이 크게 벌어졌다.
“이제 후퇴한다! 적이 쫓아와도 걱정하지 말고, 아군과 멀어져도 무리해서 달리지 마라!”
“예!”
하루가 흐르고 난 뒤에 이실레아는 다시 말머리를 돌려서 도망쳤다.
“쫓아라!”
펄 발드들은 그 모습에 기세 좋게 달려왔지만 반나절 정도의 거리가 있었기에 제풀에 지쳐서 더는 쫓아오지 못했다. 너무 깊게 들어가면 기습을 당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다리가 짧은 멧돼지는 말을 결코 따라올 수 없었다.
마라톤처럼 끈질기게 붙는다면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그 정도로 달리면 기습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우둔한 짓이었다.
‘이곳에서 그런 짓은 위험하지.’
평지도 많았지만, 언덕도 많은 초원이 <파충류의 초원>이었다. 언덕 뒤는 무조건 사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펄 발드들의 안마당이었다.
사냥할 때, 언덕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달려들어서 손쉽게 야생마 따위를 포획한 것이 펄 발드들이다. 인간보다도 더 잘 알았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결코 부딪침이 없었다. 도망칠 수 없는 인간 보병들이 모여있는 <토벽 언덕>으로 인간 군대와 펄 발드의 군대가 마주할 때까지는 3일이 더 넘게 걸렸다.
성공적으로 펄 발드의 군대를 기병으로 유도했기 때문이다.
‘일이 쉽게 풀리는군.’
이실레아는 펄 발드들이 너무 쉽게 덤벼든다고 생각했다. 물론 저것이 전부가 아니겠지만, 이런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었다. 단박에 북부 초원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곧 내 가문의 사람들이 도착할 것이다. 여기에 바로 터를 잡을 수 있다.’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초원을 이미 점유했기 때문에 이실레아로서는 이 싸움은 덩실덩실, 경박하게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짜릿함을 내어주었다.
“꾸엉!”
발룬이 감정이 고양된 이실레아를 보며 울음소리를 냈다.
“놈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이실레아가 자기 상체만 한 머리를 지닌 발룬을 끌어안으며 가죽 때문에 딱딱하다고 느껴지는 턱을 손으로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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