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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잠도 안 자고 난리를 피우던 드낙은 이스핀이 오고 나서 사태가 진정되자 그 날에 잠이 들었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중립신이 검은 꿈에 없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인지.’
부활하고 나서 자주 보기 힘들었다. 드낙 또한 익숙해지고 있었다.
“병신아. 그걸 그냥 그렇게 휘둘리냐? 그것도 겁을 먹은 상대한테, 네가 그러니까 문제인거다.”
세파리아스가 거침없이 말했다. 드낙은 너무나도 애매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변덕이 심하다고 할 수 있었는데, 단편적인 상황에 대해서만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장기적이고 주도적인 성향을 지니지 못했다.
“뭐가 문제야? 결국 옳은 일이잖아.”
“맞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지.”
세파리아스가 주먹을 쥐었다. 그것은 힘을 상징했다.
“힘을 가지고도 그 힘을 휘두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은 성군이라 칭송하며 좋아한다. 왜냐? 그 힘이 결코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자신보다 위대한 자가 자신을 위해서 바닥을 개처럼 걸어 다니며 헌신하고 봉사하기 때문이다.”
드낙은 그것이 자신을 뜻함을 알 수 있었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드낙의 위치였다. 최고 결정자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영주가 자신의 왼팔이 낸 책략을 그대로 쓴다? 어리석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시대>의 서막을 연 세파리아스 불파겐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럼 더 좋은 방법이 있어?”
“크하하하!!!”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육체가 있었다면, 배가 아파서 쓰러졌을 것이다.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더 좋은 방법, 더 완벽한 수단. 좋지. 근데 <영주>보다는 못하다.”
드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역린을 건드린 것처럼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드낙과는 다르게 세파리아스의 생각은 드낙의 대척점이나 다름없었다.
때때로 자신보다 우선시 되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 드낙과 그딴 것은 없다고 믿는 세파리아스의 차이는 명확하게 차이가 났다.
“전부터 봐왔지만 넌 그게 문제다. 전에도 도움도 안 되는 피난민에게 식량을 내어줬지. 선행을 베풀고, 옳은 일을 하면 좋지. 근데, 그것보다 너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폭군이 되라고?”
“폭군?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면 폭군이 되어야지.”
“미친 새끼.”
드낙이 직접 적의를 드러냈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그 어떤 위협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굴었다. 평온했고, 오히려 눈동자에는 가소로움이 깃들어있었다.
종족 불문하고, 그 누구도 홀로 세파리아스의 앞에서 대적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시대를 풍미한 대영웅을 겁주기에는 드낙은 아직도 작은 나무에 불과했다.
“이렇게 말해도 넌 폭군은 안 될 거 아니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는 너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것이 왕이 된 자들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가치다. 넌 그걸 굽혔고, 그로 인해서 게제라스는 언제든지 자기 생각을 우선시하게 될 것이다.”
세파리아스가 드낙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보다 정책이나 다른 것들이 더 우선시 된다는 소리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
드낙이 입꼬리가 살살 떨렸다. 일신의 몸보신은 기가 막힐 정도로 잘하는 것이 그였다.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반란. 역모···혁명.’
시스템, 제도를 위해서 드낙이 엎어질 것이다. 강하고 약하고 자시고도 없다.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세파리아스의 죽음이었다.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냐? 넌 그것도 문제야.”
드낙이 얼굴을 손으로 비볐다.
“탐욕 좀 제발 줄여라. 재물을 아무리 모아봤자 100년 갈 뿐이다. 명예를 쌓으면 몇백 년이 지나도 살아 숨 쉴 수 있다.”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드낙을 세파리아스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게제라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에는 <보상>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건 아니다. 재물이 받쳐줘야 후손도 잘 크는 법이지.”
“명예가 없는 이가 돈만 많으면 빼앗길 뿐이다.”
“무력이 있으니까 괜찮아.”
“응. 300명도 안 돼.”
두 명이 유치하게 싸우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다른 이들이 이번 안건에 대해서 목소리를 냈다. 육체가 없어도 대영웅(大英雄)은 대영웅인 법이었다. 은근히 순서가 있었다.
“제국 전신갑주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전부 다 부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변종 키메라 포낙서스>가 전신갑주에 대한 주제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연금술사인 <흰여우 새린>도 함께 목소리를 냈다.
“게제라스는 마법에 대해서 적당히 알고 있어서 말한 것이겠지만, 깊게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대마법사가 만든 강화마법인 한묶음 폭증은 복제가 가능하겠지만, <육법 태엽식>이 가미된 공격마법은 절대 재현해내지 못해.”
드낙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지식을 안다고 해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할 수 있다고 해서 통달했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차이는 깊이 공부한 자만 알 수 있었고, 서로 수준이 크게 다르면 극명하게 벌어지는 법이었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어.”
드낙은 그런 우려도 쉽게 넘겼다.
“많이 박살을 내야, 많이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아주 끝장을 봐서 단숨에 끝장을 내야지.”
드낙의 말에 세 사람 사이에 <기어오르는 발바룽>이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지. 이곳에서 인간 세상에 대한 많은 것을 들었다. 북부는 결코 그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 할 수 없어.”
“없다고?”
드낙이 어리둥절했다. 대기업 총수에게 돈이 없다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파리아스가 추가로 말해주었다.
“원정을 뛰어서 다른 영지를 도와주고 재물만 탐한 너 같은 놈이나 돈이 그렇게 쌓인 거지. 대부분 귀족들은 돈이 아니라 다른 자산이 대부분이다.”
‘아. 저게 자꾸 속을 긁네.’
드낙이 세파리아스를 노려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파리아스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이 눈에 밟혔다.
“게제라스에게 말해보겠다.”
긍정적인 대답을 내어주었다. 실제로 전신갑주를 10벌 이상 부수고 그것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 하라는 소리에 몽펠리에와 파이룬은 그냥 배째라는 식으로 나올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세파리아스가 처음 말했던 것이 이것의 해결법이 되었다.
“피는 뿌리지 않아도 된다. 행동해라, 네가 한다고 말한 일을 해라. 생쇼든 국지전이든 식량을 축내고 오든 맘대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넌 분명 싸우고 싶다고 말했고, 그렇게 해야지 적이 널 두려워할 것이다.”
“거기에 불파겐이고 나발이고 없다.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것들은 전쟁이 무조건 죽이고 보는 것이라고 여기지.”
세파리아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언해주었다. 드낙은 묘하게 그것에 설득되는 것을 느끼고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만큼 한 개인의 영달(榮達)을 꿈꾸게 하고, 자극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독하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드낙은 검은 회의에서 결정된 일들을 그대로 행하기로 했다.
*
<체력뺏기 전략>이 시작되었다.
전면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드낙은 나서지 않았다. 나설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대산 너머로 향했다. 대산 꼭대기에 봉화를 두어, 카이야를 통해서 언제든지 호수마을에 일이 생기면 돌아올 수 있는 통신 수단을 마련했기에 거침없이 움직였다.
“훈련대로만 진행해라. 익숙해지면 더욱 쉬워질 것이다.”
이실레아 브릴리언트 그리고 도렌 홀그린이 유일한 기사였다.
새하얗고 짧은 털을 지닌 수사슴 발룬을 타고 있는 이실레아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반면 도렌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가까이서 보면 망토의 표면이 독특했다.
흑마법사에게서 얻은 트롤 망토였다. 드낙은 새까맣게 까먹고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전신갑주와 검은 꿈이라는 마약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트롤 망토가 눈에 안 들어올 만 했다.
“초지라고 해서 언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곳이 용병단들이 활동하게 될 곳이다.”
시작은 언덕을 점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물론 모두 점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전술이 벌어질 것이다.
“내일을 기점으로 기병들이 움직일 것이다. 기병은 가장 좌측에서 우측으로 순회하듯이 움직일 것이다. 만약 멀리 있는 용병단이 펄 발드의 표적이 될 것 같으면 도망쳐라.”
후퇴를 거침없이 명령했다. 애초에 점령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유동적인 판단을 용병단이 하게 함으로써 사기도 높았다. 물론 악용할 소지가 있었지만,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보수는 1개의 용병단마다 매일 동화 100닢을 줄 것이다. 펄 발드의 머리는 두당 동화 10닢이다.”
“와우.”
용병 중 몇몇 놈들이 감탄했다. 그만큼 급여가 높았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일한다고 급여가 높은 건 개소리였다. 당장 현대만 해도 소방관의 임금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중세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똑같이 목숨을 내걸어도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버는 양이 달랐다.
어둠을 틈타서 초지로 나온 용병단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실레아와 도렌은 기병 20기를 이끌고 순식간에 초지를 훑으며 지나갔다.
멀리 있는 언덕에서 그 모습을 확인한 펄 발드 초병이 멧돼지에 그대로 올라탔다. 자다가 깬 멧돼지가 불평했다.
“꾸익! 꾸익.”
“그래, 그래! 안다, 알어!”
칭얼거려도 턱을 만져주자 멧돼지가 몸을 일으켰다. 펄 발드 다섯 마리가 그렇게 언덕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곳곳의 언덕을 십여 명의 용병들이 자리 잡았다. 그들은 흙을 파서 토벽을 쌓고, 땅을 파다가 나온 돌로 전방에 장애물을 놓았다.
“하!”
이실레아의 짧은 외침이 들려왔다. 언덕의 능선을 잘 이용해서 <우회 기동>을 하여 성공적으로 기습하여 펄 발드 한 무리를 개박살을 내고 그 머리와 멧돼지 시체를 질질 말로 끌고 오고 있었다.
“허미. 저게 황소야, 사슴이야.”
멧돼지를 몇 마리나 엮은 것을 무식하게 끌고 오는 발룬의 모습에 용병들이 혀를 내둘렀다. 보기 정말 힘든 광경이었다.
“상황을 보니 전투는 없었나 보군.”
이실레아의 말에 용병대장 게르민이 대답했다.
“예! 조용~했습니다.”
“펄 발드 정찰병은 없었고?”
“보지 못했습니다.”
의외로 소극적인 펄 발드의 태도에 이실레아의 관자놀이가 구겨졌다.
‘침착하다. 힘들지도 모르겠는걸.’
초지 깊이 들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패배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정이 힘들 것이다.
두두두!
인간 기병이 초지 곳곳을 누볐다. 펄 발드가 어디까지 후퇴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불을 피운 흔적을 찾았다!”
5기의 기수만 이끌고 따로 떨어진 도렌이 돌아와서 손을 흔들며 외치자 이실레아의 기병 본대가 그곳을 들이닥쳤다.
“언덕 아래쪽에 불을 피우다니, 이러면 주변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 텐데?”
“대신 숨기 좋지.”
강철 글러브를 탈착하고, 모닥불에 손을 깊숙이 넣은 이실레아가 빠르게 뺐다. 살짝 뜨거운 정도였다. 발로 재가 쌓인 곳을 걷어차자 불씨가 몇 개 보였다.
“추적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도렌의 말에 이실레아는 말에 올라타고 나서도 장고(長考)했다. 배가 부른 상대는 매우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굳이 거기에 어울려줄 필요가 없었다.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나서는 것은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아니. 펄 발드를 내려보낸 것만으로도 놈들은 이미 피해를 보고 있어. 오늘은 여기까지.”
이실레아가 말 머리를 돌렸다. 파충류 초원의 북쪽에 용병들이 제대로 알을 박았다. 자연스럽게 펄 발드들의 영토가 축소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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