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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끝
드낙은 <호수 마을>의 입구에 북적거리는 이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벤 패거리> 같이 농부들의 등골을 처먹고 재물을 모은 자들은 없어 보일 정도로 후줄근했다. 이들은 대산이나 곳곳에서 나오는 버섯죽에 밀 가루를 섞은 것을 배급으로 받고 있었다.
때때로 멧돼지 따위의 뼈 잔해가 한곳에 모여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육류를 배급한다는 것만으로도 이주민들의 불만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고,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훌륭한 방법이었다. 뼈만 보여줘도 다음에 온 이들 또한 기대심을 불러일으켰다.
‘저렇게 아까운 뼈를 그냥 놔두네.’
드낙이 석지 마을에서 빌린 말을 멈추며 손짓을 하며 고함을 한 번 쳤다. 병사들이 너도나도 일단 달려왔다.
<드낙 불파겐 자작>이 뭘 하려고 하자 이목이 자연스럽게 집중되었다.
그만큼 영향력을 확보한 것이 드낙이었다.
“뼈를 푹 삶아서 이주민들에게 마시도록 해라. 기운이 날 것이다.”
“예!”
드낙의 말에 병사들은 일단 대답했지만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뼈를 삶는다고 뭔가 달라진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리사들은 좀 다르게 생각하겠지.’
흥미를 가진 요리사가 나중에 소문을 듣고 한 번은 실험해볼지도 몰랐다. 드낙이 호수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자작님을 뵙습니다!”
병사들은 너도나도 경례를 했다. 드낙은 곧장 게제라스를 보러 갔다. <미스터리한 물도둑>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셨던 일은 잘 되셨습니까?”
“그래. 조금 더 대산 너머에 시간을 써야 하지만, 소기의 목적은 이루어냈다.”
게제라스의 사무실로 쓰고 있는 집에 들어선 드낙은 거침없이 들어가서 앉았다. 게제라스는 냉큼 의자를 당겨주었다. 그만큼 드낙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고 있었다.
<은고원 마을>의 존재와 돈을 펑펑 쓰며 시민을 위한다는 행동, 작은 경범죄자도 일단 광산이나 석지 개간으로 노역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컸다. 그건 부랑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사유 없이 구걸행위를 벌이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어떻게든 노동에 투입되었고, 지식이 있다면 쓰였다. 그 때문에 무전취식 이런 게 전혀 없었고, 길이 깨끗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조차도 오물은 청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이주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이실레아 경과 부인들에게 배분하고 있습니다. 킹슬레이를 제외하고는 사병도 제법 끌고 왔기 때문에 이주민들을 최대한 빨리 배분하고 있습니다.”
“그래? 밖에 엄청 많던데··· 그게 줄어든 것이라니.”
드낙이 혀를 내둘렀다. 게제라스가 싱글벙글했다. 인구는 매우 중요했고,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이주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드낙이 놀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사제와 성기사들도 계속 유입되고 있습니다. 충분히 감당이 가능합니다. 이제 자원 생산량을 늘리고, 연금술사나 마법사를 고용하면 됩니다.”
게제라스는 지금 영지의 현 상황에 대해서 빠짐없이 말했다.
<남부 이주자>가 특히나 많다는 것.
<몰락 귀족>이 불파겐 영지에 대한 정보를 모으려고 한다는 것.
<케이샤 킹슬레이>가 장원 성장에 다른 외척보다 열정이 적다는 것.
<엘라한 가문>이 크게 사제들을 도우려 한다는 것.
“그래서 뭐가 문제지? 총관의 말을 먼저 듣고 싶은데.”
“거기에 대해서는 차차 말하겠습니다. 호수마을에서 며칠 지내실 생각이지 않습니까.”
드낙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외척을 견제할 수단을 말했다. 견제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지만, 지금 하기에 딱 적당했다.
“내 아내들이 관리하고 있을 장원을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던데.”
게제라스가 좋아했다.
“오히려 제가 부탁하려고 했습니다. 이주민들에게 누가 진짜 토지의 주인인지 알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땅이 녹으면서 본격적으로 외척이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 가장 큰 부분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 또한 조금씩 강도를 올리거나 낮춰서 접근해야 했다.
“문인 교육은 잘 되어가고 있나?”
“단순 문서 처리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다음이 문제라서···”
하급 관리를 찍어내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중간 관리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좋은 중간 관리는 재능보다는 복무 시간이 중요했다.
“그것보다 <파충류 초원>에 대한 토벌은 언제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주민들 사이에 펄 발드에게 식량을 강제로 빼앗겼다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억지로 가죽을 줬다고 합니다.”
“그래? 강제로 그렇게 가죽을 주면 괜찮다고 생각했나 보지?”
“몬스터 아닙니까. 휴머노이드라고 해도, 그들은 야만적입니다.”
드낙은 원탁을 두드렸다.
“원정이 가능한가?”
"올해는 어렵습니다.”
“외척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하기는 합니다만, 무엇을 대가로 주실 생각이십니까?”
드낙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게제라스에게 돌렸다.
“은광에서 나오는 은이 가장 적합할 겁니다.”
“그래? 난 내년 세금을 생각했는데.”
게제라스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내년 세금을 면제하고 초원을 토벌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희들이 성장하기 힘들어집니다. 1년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은광이 있잖아.”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노력한다면?”
게제라스가 머리를 굴렸다.
“<석지 마을>의 개간 속도를 면밀하게 조사해 봐야 확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몽펠리에 가문이 제공한 농사 마법 물품이 얼마나 활성화되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드낙이 손을 주억거렸다.
<파충류 초원>은 동부로 향하는 초반 진입로라고 할 수 있었다.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았다.
“자작님. 어차피 파이룬 가문의 도로 사업 때문에라도 내년 가을에 토벌을 해야 합니다. 지금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자연히 외척들 또한 전투에 참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주민들의 식량을 강탈했다. 이다음에는 죽일지도 모르지. 그리된다면 많은 인구가 허무하게 핏물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드낙이 남을 위하는 말을 하자 게제라스가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다. 그걸 본 드낙이 혀를 찼다.
“응쯧쯧. 총관! 그래도 내가 영주인데, 어떻게 전과 같겠는가? 그리고 자네가 내세우고 있는 <육중론(六重論)>에 인구가 가장 중요하다며?”
“예··· 예··· 그렇긴 합니다만··· 외척을 은으로 움직이는 건 어렵습니다. 그들도 상황을 알기 때문에 내년을 원할 겁니다. 특히 자작님이 올해에 초원 원정을 원한다고 크게 외치면 더 큰 것을 받기 위해서 발을 뺄 것입니다.”
“이주민 받고, 장원의 기초를 다지고 있으니··· 오히려 내년을 원할 테지.”
한 번에 하나를 해야지, 두 개는 하기 힘든 법이고, 삐걱댈 수 있었다. 또한 드낙이 원할수록 외척들은 발을 뺄 것이다. 그게 협상이 가지는 모순이었다. 원하면 원할수록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장원에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면 원정을 돕겠지만, 내년 저희들의 발전 속도가 느려질 것입니다.”
진퇴양난과도 같았다. 하나를 택하면 하나를 버려야 했다. 그리고 드낙의 말대로 밀어붙이면 버려야 하는 것이 더 컸다. 인구보다는 세금이 사실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리고··· 저수지에 물도둑이 든다며?”
“이스핀 경에게서 들으셨군요. 아마 정령의 장난질로 보입니다.”
“정령?”
“네. 물의 정령 아니면 흙의 정령인데,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수준 높은 마법사를 초빙해야 합니다.”
드낙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궁금했다. 이에 게제라스가 상세하게 대답해주었다. 드낙의 엄청난 행동력 때문이었다. 싸움판이면 일단 뛰고 보는 것이 드낙임을 잘 알고 있었다.
“가벼운 장난질입니다. 물을 귀중하게 여기니 물을 빼버리는 것이죠. 근데, 그 정령이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정령은 매우 조심하게 다루어야 했다. 하는 짓에 비해서 큰 힘을 가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의 아니게 힘을 숨겨서 인간들이 잘못 행동을 할 때도 많았다.
“정령의 장난이라고 벽보도 붙이고, 이야기꾼에게 말하고 다니라고 말했으니, 곧 있으면 시민들도 진정할 겁니다.”
뜬소문처럼 퍼진 저수지 물도둑에 대한 소문에 대해서도 게제라스는 이미 대처를 놓았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흠···”
드낙이 입맛을 다셨다.
“자작님···”
“아니, 내가 뭐 자네 말을 안 듣는다고 했나? 내가 한 번 보는 건 괜찮지 않겠나?”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저수지가 파괴되면 여름이 걱정입니다.”
물이 부족한 것이 동부였다. 강이 적었기에 지하수를 퍼내야 하는데 그것도 일이었다. 대산에서 끌어오는 지하수가 상수도로 쓰이고 있지만 그 흐름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대산의 지하수는 많았지만 그걸 가져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도 잘 알고 있어.”
드낙은 주력을 통해서 한 번 길들여볼 생각을 가졌다. <엘라한 가문> 때문에 더더욱 정령을 길들일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날 바로 밤에 드낙은 저수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손에서 주력을 뿌려보았다.
오도독.
“오.”
주력을 뿌리자마자 흙이 꿈틀거리면서 얼굴이 하나 튀어나왔다. 각진 얼굴이라서 인간의 얼굴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또한 짐승처럼 주둥이가 툭 튀어나와있었다.
야수의 머리에서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정신 파동이 흘러나와 드낙의 머리에 스며들어왔다.
[주력을 더 내놔라. 인간.]
흙으로 빚어진 야수 머리에서 지렁이가 꿈틀거리면서 튀어나오더니 툭하고 떨어졌다.
“주력이 너에게 큰 도움이 되는 거야?”
[당연하지.]
흙의 정령이 팔까지 꺼내자 저수지가 흔들거렸다. 드낙이 냉큼 말했다.
“야, 야야. 잠깐만 저수지가 부서지지 않게 여기로 나오지 않을래?”
주력을 뿌리며 말하자 흙의 정령이 냉큼 납작해졌다. 물론 불만을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한테 명령하지마. 난 나보다 작은 녀석의 말은 듣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서 흙의 정령이 저수지를 부수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다. 3m에 달하는 거대한 체격을 지닌 거인의 형상이었다.
[나는 <석지의 거인>이라고 한다. 너의 이름은?]
“드낙 불파겐이다.”
[오, 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호구라며? 농지를 농민한테 진짜 주는 놈은 처음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드낙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기도 했지만, 직접 들으니 뭔가 욱하고 튀어나왔다.
*
<록시 몽펠리에>
<아샤 파이룬>
<케이샤 킹슬레이>
3명의 아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시녀들도 둘러싸듯이 있었고,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차가 식으며 차를 다시 내어오는 사이에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됐다.
당연히 앞으로에 대한 <담합>과 <협의>에 대해서였다.
“레이디 케이샤께서는 장원에 이주민을 모으는 게 썩 내키지 않으시던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저 가문이 멀어서 천천히 하고 있을 뿐이에요.”
“총관이 다스리는 <호수 마을>은 서로 놔두자고 협의한 것을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어물쩍거리며 장원 개발이 늦는 케이샤에게 <록시 몽펠리에>가 경고를 했다. 호수 마을을 그냥 자신의 장원처럼 영향력을 확보하기 전에 미리 언질을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화장품 작업장>을 호수 마을 옆에 떡하니 세웠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이었다.
“걱정 마세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싸움밖에 안 될 텐데 제가 왜 그러겠어요? 장원을 유지할 군사력을 이실레아 경에게 빌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아시는 분들이···”
“어머, 그랬나요?”
록시가 모르는 척을 하자 시녀 하나가 다가와서 속삭이는 척을 했다. 짧게 사과했고 케이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오늘 회의는 세금 때문에 모인 거 아닌가요? 올해부터 걷을 생각을 가지고 있던데, 그것 때문에 모인 거 아닌가요?”
<아샤 파이룬>이 주제를 돌렸다. 모두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탄탄대로면 나중에 삐끗하면 더 성을 내는 법이지요.”
100번을 잘해도 1번 못하면 욕을 오질나게 처먹는다. 100번을 못하다가 1번 잘해주면 껌뻑 죽어 나가는 게 인간의 심리였다. 100번이나 태클을 걸지는 않겠지만 첫 단추 정도는 잘못 끼워줘야 앞으로가 편할 수밖에 없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세금이 걷어지겠지만 봄의 끝자락에 먼저 의논을 해놓는 것이 좋았다. 향후 행동에 있어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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