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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도시
<검은 회의>.
그것은 중립신에 의해서 안배된 드낙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찌꺼기>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실상은 더 음흉하고, 간악하며, 잔인한 것이기도 했다.
단적으로 드낙이 고블린 초병의 목을 움켜쥔 채 그 목을 분지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었지만, 당사자는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블린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있을까?”
드낙의 말에 모두 고민했다. 물론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태평했다. 다른 이들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기까지 했다.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이야기하는 이점을 스스로 포기했다.
‘새끼.’
드낙은 세파리아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생리적으로 그와 맞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육신 하나 없는 놈이 항상 자신의 위에 있기 때문이다.
<검은 꿈>에서의 대련에 있어서 드낙의 신체능력은 항상 세파리아스를 압도했다. 팔씨름을 하면 드낙이 이겼고, 다리씨름을 하면 드낙이 이겼다. 하지만 레슬링에서는 뒤집어지기 일쑤였고, 검이 부딪치면 밀려나는 것은 드낙이었다.
그 불합리함은 드낙에게 열등감이라는 것을 통해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것도 없었다. 특히나 다른 사람과의 직접적인 부딪침에 있어서 패배를 꾸준히 반복하는 것은 시련이 아니라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기어오르는 발바룽>은 고블린 사회의 손발을 자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고블린 전사들이 외부로 나가는 거의 유일한 놈들이다. 사회의 높은 곳에 위치한 고블린 주술사들은 보호된 곳에서만 움직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법 용감한 전사들을 추려내어 먼저 죽인다면, 놈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웅크린 채 죽어갈 것이다.”
그럴듯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흰여우 새린>의 점성술 때문이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별의 움직임을 상세히 본 드낙 덕분에 새린은 못해도 1달 내의 별의 움직임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었다.
물론 큰 격변이 일어나면 또 달라지겠지만. 이곳의 별은 <중립신>의 핏줄을 받아서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봄은 흙이 강세인 계절이야. 자연스럽게 두개골을 쌓아놓은 저주의 효력이 증폭될 수밖에 없어. 또 진흙집으로 가렸기에 운도 따라주겠지. 그러니까 굳이 손발을 자를 필요는 없어. 물론 중요하지만, 먼저 해야 하거나 꼭 해야 한다는 건 아니라는 거야.”
새하얀 피부를 지닌 그녀는 자신의 부드러운 팔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수성은 멀어졌는데, 지금은 처녀자리가 가장 잘 보이지. 서로 좋아하던 것이 멀어지기 때문에 상대는 뭘 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을 거야.”
발바룽은 인상을 찌푸렸다.
“별자리를 보고 내 계획이 별로라고? 미치겠군.”
“그저 운을 말한 것뿐이야.”
드낙이 손사래를 쳤다. 싸움은 둘이서 하라는 소리였다. 이내 검은 연기가 두 사람을 농밀하게 뒤덮었다. 진짜로 말싸움 한 번 할 생각인 듯했다.
“그래서 너는?”
“나?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정말로 남김없이 다 죽이고 싶은 거냐?”
드낙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 고블린들은 조잡하지만,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또 우리하고도 멀리 있지. 대산을 기준으로 보름을 넘게 걸어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차라리 <치료 도기>같은 것을 거래하는 것이 좋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네가 평화를 원한다고?”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대차게 웃었다. 자신의 의도를 멍청하게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평화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그것을 모르는 자들이 할 법한 소리였다.
그것은 무(武)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수비만 하는 겁쟁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수비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역공과 반격을 위한 초석이다. 수비는 결코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수비는 나무 문처럼 쉽게 부서질 뿐이다.
문은 결코 공격하지 않기에 상대는 온 힘을 다해서 문을 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국(大國)이 화친을 하고 평화를 건네주는 것은 다음에 올 때는 지금 온 것보다 배는 더 많이 올 것이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지금 불파겐 영지는 성장해야 했다.
<고블린 지하 도시>는 일시적으로 거래를 할 만한 곳이었다.
“병신 같은 놈. 그 두툼한 군사학책을 완독 3번이나 한 놈이 할 대답이냐?”
세파리아스가 웃다 말고 으르렁거리자 드낙이 찔끔했다. 하지만 그 덕에 드낙은 바로 답을 뱉을 수 있었다.
“잠시 이용해먹자는 건가? 선한 업을 쌓아야 하니까?”
고블린도 인간도 부흥하게 된다면, 드낙은 지배자로서 선한 업을 얻을 것이 틀림없었다.
비슷한 맥락에 도달했다. 물론 세파리아스처럼 피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게 드낙과 세파리아스의 차이점이었다. 드낙이 한 수를 내다보며 선한 업을 쌓는 목적에 도달한다면, 세파리아스는 그다음에 있을 전쟁까지도 생각했다.
고블린이 부흥하면 무엇을 선택할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전쟁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남에게 의지하는 왕은 독주를 마실 뿐이다. 항상 답을 생각하고 있어야 하고, 그 답을 말한 신하를 크게 중용하는 것이 왕이 해야 할 일이다.”
드낙은 입맛을 다셨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놀고먹는 게 최종 목표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원했던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코 설득할 수 없을 터였다. 분란만 커질 뿐이었다.
“타협인가. 과정은?”
“화친을 원할 때까지 두들겨 팬다.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놈들은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에는 힘이냐.”
“가장 효과적이지.”
드낙은 그렇게 질색하면서도 수긍했다. 자신의 힘은 정말로 전과 다르게 커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고르곤의 심장>이 컸다. 심장만으로도 40번의 마법을 난사할 수 있고, 400분 만에 완전 회복이 가능했다.
치고 빠지며 지랄을 떤다면 <주술사>가 지배계층인 이상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사항전은 주술사라는 족속들이 선택하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대답도 듣고 싶은데.’
드낙이 눈을 반짝였다. 실로 좋은 계획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던 고블린의 업을 쌓는 것에 대한 과정도 듣고 싶었다.
“흐흐. 다 죽일 방법은 뭐냐고?”
드낙이 풍기는 피냄새와 살기에 세파리아스가 웃음을 흘렸다. 때때로 보면 자신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는 드낙이었지만, 이렇듯 싸움에 있어서는 세파리아스와 비슷하게 저돌적인 것이 드낙이었고,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죽이는 것이 드낙이었다.
그의 각오는 세파리아스가 특히나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고블린 지하 도시>로 향하는 모든 식량을 차단하면 된다. 그리고 주술사들이 하려는 저주 해제는 적정 수준에서 방해만 한다. 희망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는 사이에 성가신 고블린 전사 지휘관을 죽인다.”
콥 고블린이 지금도 일하고 있을 통로의 어딘가에 위치한 식량 제조소를 습격하고, 식량을 마법이든 무엇으로든 파괴.
굶주려도 주술사들이 저주를 해제하는 것 때문이라도 버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 도망치는 자들의 규합을 막기 위해서 전사 지휘관을 미리 죽이는 것까지.
“하지만 다 죽이지는 못할 것 같은데?”
“왜?”
“도망자들은 어떻게 하려고?”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려서 도망치기 때문에 다수 마법에 몰살하기 좋지. 물론 도망치기 전날에 주술사들이 도망칠 준비를 할 거다. 그때 주술사부터 타격해서 대부분 죽여놓는 게 좋다.”
완벽한 섬멸 작전이었다. 거진 8할의 고블린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굶어죽어도 드낙의 업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드낙 때문에 죽었기 때문이다.
“다수 마법 52번이라면 몰려있는 놈들을 죽이기 딱 좋다.”
방어마법인 빙판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쓴다면 입구도 막을 수 있었다. 지휘자가 없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했다.
‘고민되네.’
드낙이 두 갈래에서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고민에 빠진 이유는 세파리아스 때문이었다. 그가 평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고블린 지하 도시는 이용할 만했다.
시작부터 웅크린 자들이었고, <재의 통로>를 봤을 때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 즉, 자신들의 세력이 불어났을 때 공세를 취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또한 <주술사>가 지배계층인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콥 고블린 거주지가 박살이 났다.’
남은 콥 고블린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피해였다. 노역에 동원되는 것이 콥 고블린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은 검은 꿈이 끝나도 이어졌다. 두 가지 방법 모두 장기전을 통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드낙은 남은 콥고블린들이 일하고 있는 지점을 찾기 위해서 <고블린 지하 도시>를 떠났다.
<재의 통로>는 어디에나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곳이었고, 고블린이 숨을 곳은 있었지만, 드낙이 숨을 곳은 없었다. 하지만 어둠을 잘 이용하는 드낙은 고블린 초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초병을 여럿 죽이고, 그 머리를 모아서 구석진 곳에 원시 저주를 위한 포석을 깔고, 드낙은 곳곳을 돌아다녔다. 자연동굴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막혀있는 곳도 있었고, 통로가 갑자기 가파르게 좁아져서 갈 수 없는 곳도 있었다.
“흡!”
쾅!
드낙의 검이 휘둘러져서 종유석을 지나 좁은 천장을 그대로 두드렸다. 바위에 총알이 박히듯이 흙먼지가 강하게 쏟아져 나오며 굉음이 동굴 먼 곳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억지로라도 무너뜨려놓는 것이 좋겠지.’
소리를 듣고 달려온 고블린들은 그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었다. 또한 머리 없는 초병들의 시체 때문에 도착하는 시간이 느리기도 했다. 겁을 먹었기에 이동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그 덕에 드낙은 손쉽게 다른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불빛이 없는 통로는 드낙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화륵.
일렁거리는 횃불이 지나가자 진흙으로 범벅이 된 드낙의 모습이 살짝 작은 불빛에 노출되었지만 고블린 중 누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옆을 보면서 걷는 고블린은 없기 때문이다.
“콥 고블린이 다 죽었다던데. 오늘만 10마리가 죽었는데, 큰일이네.”
“모르지. 기준이 더 엄격해질지도.”
드낙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척 봐도 화덕으로 입구를 환하게 밝히고, 고블린 전사 10마리가 따로 거주할 수 있는 임시 야영지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종유석이 마치 장애물처럼 앞에 놓아져 있었고, 들락날락할 수 있는 평탄한 길은 한 곳뿐이었다. 그 안쪽에는 둥글게 공간이 있었고, 오래 썼는지 바닥이 조금 내려앉아있었다.
그 내부에는 털가죽으로 된 잠자리가 있었고, 빨랫줄과 종유석에서 흘러 떨어지는 물을 받는 큰 단지 등 생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스윽.
드낙은 그림자처럼 그곳을 통과했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고, 일렁거리는 불빛은 형광등처럼 밝지 못했다. 또한 입구를 지키는 것도 아니었다.
“돌려, 돌려!”
도박을 구경하는 고블린 전사가 태반이었기 때문이고, 잠자는 놈들도 있었다. 근무라기보다는 그냥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무리에 불과했다.
울퉁불퉁한 동굴 통로는 그림자가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드낙은 풀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지하 식물의 천국과도 같은 곳이 모습을 드러냈고, 벽에 들러붙으며 상체를 낮춘 채 드낙은 그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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