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1 <-- 봄이 시작되고 -->
드낙은 케이슨의 도움을 받아서 신전 부지를 모두 구경하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다녔는데, 그도 그럴 수밖에 불파겐 영지의 앞날을 생각하면 신전은 매우 중요한 기둥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어도 관심을 가지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과수원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드낙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케이슨이 대답했다.
“게제라스 총관님에게 향후의 영지 상황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며, 그들을 위해서 은으로 식량을 사도 모자랄 판이라고 하시더군요.”
‘게제라스가 약을 쳤구나.’
아주 단단히 약을 친 것이 분명했다. 부지의 7할이 과수원이 되어있었다. 과수원인 이유는 〈신성력〉 때문이었다. 덩치가 큰 나무일수록 신성력을 많이 받아들일 수 있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크기도 매우 커지기 때문이었다.
밀의 경우에는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신성력으로 거대화가 이루어진 과일나무가 좋기 때문이다. 밀은 거대화가 어려웠다. 내구력이 좋은 나무가 아니라 크면 고개가 굽어져서 땅에 늘어졌고, 햇빛을 못 받아 죽게 되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신전의 수익은 술이나 과일이 많았다.
신전부지를 구경할 것도 없었기에 다시 오두막을 건설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곳을 지나면 기도실과 사제들이 거주하는 오두막이 늘어서 있었다.
“아하하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오자 드낙이 관심을 가졌다. 고아들이었다. 신전은 과잉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고아를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 때문에 드낙에게 많은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런 지원 하나하나가 빚이었다.
“아, 그게···자작님.”
케이슨이 드낙의 앞을 가로막았다.
“뭡니까?”
드낙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앞길을 막다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레이시아 공주께서 이곳에 자주 오십니다.”
그 말에 드낙이 발을 멈추었다. 괜히 뒷걸음질을 치기도 했다. 마주치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좋은 여성이었지만, 상황상 드낙과 자주 얽혀서는 안 되었다.
오두막 건설 현장의 외곽을 돌아서 기도실로 향했다.
“괜한 오해는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상황이 상황이라.”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드낙이 변명했다.
“예. 괜찮습니다.”
“레이시아 공주 전하께서는 여기 와서 뭘 합니까?”
“아이들과 놀아주고, 동화도 들려주고 이것저것 가르쳐줍니다.”
“잘 따릅니까?”
“그럼요! 아주 좋아서 못 삽니다. 아이들은 사실 눈이 안 보인다고 해도 그냥 그러려니 넘기기 마련입니다.”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들려왔지만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들었기에 믿을 만했다. 드낙이 그 뒤로 공주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하자 케이슨이 헛기침하면서 말했다.
“장난 같은 독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만약 상황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힘들다면, 신전에 의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 말에 드낙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십니까?"
“예? 하지만 드낙 자작님이···”
드낙이 손사래를 쳤다.
“제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제 입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더 힘들어질 겁니다.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귀족들은 생각 이상으로 더 음흉하기 때문이었다.
“레이시아 공주의 남편 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또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주는 자작님의 결정이 있어야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시녀도 드낙에게서 봉급을 받고 있었다. 그녀를 자유롭게 하려면 드낙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다.
“휴우···”
드낙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옆구리에 낀 투구를 양손으로 쥐고 매만졌다.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설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공주도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겁니다. 누가 먼저 선택한다고 해도 상황은 이리저리 퉁퉁 튈 겁니다. 그러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는 말하지 마십시오.”
“예. 주제를 넘은 짓이 아닌가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케이슨이 고개를 숙였다. 이에 드낙이 웃었다.
“레이시아 공주를 보면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 끔찍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겁니다.”
드낙은 그녀가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아이들 가르치기를 오랫동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핏빛쥐들을 몇 마리 데려올 걸 그랬어.’
지켜야 할 것이 생긴 것은 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켜주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공주를 지키는 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백금왕가는 결함품을 내어주었고, 그녀가 죽어도 공론화를 시키지 못할 것이다.
불리한 것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호위 기사 하나 딸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북부를 위한 〈희생양〉이라는 표현이 더 걸맞았다.
드낙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최소한의 관심을 줬기 때문에 운 좋게 살아있을 뿐이었다.
설사약에 불과했지만 중독 시도에 당하고, 게제라스를 위해서라도 은밀하게 그들을 지킬 존재가 필요했다.
그저 앞만 달려온 드낙이 영지에 이것저것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필요하다.’
게제라스부터 도렌까지. 그들에 대한 소중함을 더 깨닫기도 했다.
〈기도실〉은 무릎을 꿇을 정도로 좁은 곳이었다. 진흙을 쌓아서 만들거나, 돌을 깎아서 만든 곳이 대부분이었다. 누가 기도하는지 알 수 있도록 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도실 주변은 매우 조용했고, 발걸음을 옮기는데도 조심해야 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이들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그곳을 지나면 사제들이 거주하는 곳이 있었다. 부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집이 떨어져 있지 않고, 그냥 붙어져서 지어져 있었다. 기숙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중에 툭 떨어지고 대단히 넓게 지어진 나무 집들이 몇 채나 있었다.
“이곳은 새로운 교리를 쓰고 있는 사제들이 일을 하는 곳입니다.”
케이슨이 말하며 똑똑 노크를 했다. 곧 안에서 문을 열었다. 드낙도 아는 사람이었다.
〈성기사 에이담〉이었다. 누구보다도 동부에 버려진 인간들을 위해서 향했고, 〈피의 신 아토라신〉의 사교도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혀 죽어가던 사제들 중에 하나였다.
“오랜만입니다.”
“드낙 자작님을 뵙습니다. 굉장히 바쁘실 텐데, 신전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담이 드낙을 크게 대우해주었다. 문을 잡은 채로 안으로 들어오기를 권하였다. 안에는 15명의 사제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다섯 명이 에이담과 함께하던 사제들이었다.
“이게 다 뭐하시는 중이신 겁니까?”
드낙은 제법 쌓여있는 종이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종이의 질은 까칠까칠하고, 굵었다. 접으면 부서질 것만 같았지만, 접지만 않으면 제법 오래 유지될 수 있어 보였다.
“새로운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낙이 잠깐 확인을 했는데, 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일대기 같습니다만.”
“맞습니다. 일종의 조언서. 참고할 수 있는 사제들의 일대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견습 사제들은 이것을 읽으면서 자신이 걸어갈 길을 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된다면 사제로 서품(敍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제들의 희생. 헌납의 삶을 본다면 깨닫는 바가 클 수밖에 없었다.
신전은 그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애송이〉가 될 나이를 지닌 고아를 곳곳의 일을 경험하게 알선해주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려고 했다.
신성력의 덕택을 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의 복지를 대신해주는 느낌이네.’
취업알선, 교육, 고아원, 구휼 등등.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위해서 준비하고 작게라도 먼저 시작을 하는 모습을 본 드낙은 신전의 활력에 자신도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였더라? 공부를 끝내기보다는 시작부터 하라고 누가 말했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보람 있게 보낸 것 같습니다. 저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신전이 앞으로도 이렇게 만인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계속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성기사 케이슨〉이 크게 감사했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케이슨은 무려 50명이 넘는 사제와 성기사를 이곳에 데려왔다. 그 때문에 케이슨이 신전의 대표자나 다름없었다.
그가 드낙을 안내하는 이유도 그만큼 그가 신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앙신전의 선택을 받고 순식간에 엘리트 코스를 밟던 자가 신념을 지키고 좌천된 것도 경력상 큰 이점이었다.
“그런데 케이슨 성기사. 말할게 하나 있습니다.”
드낙이 그렇게 말하며 손에서 신성력을 내뿜었다.
“헉!”
케이슨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낙은 선한 일보다 죽이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사제는 계속 신성력을 휘두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타락하면 신성력을 잃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선함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르곤을 토벌하고,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드낙의 조심스러운 말에 케이슨 또한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저 또한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중립신(中立神)〉의 꿈을 꾼 적이 있는데···”
케이슨은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익히 들었다시피 불파겐 영지에서 뿌리를 박으라는 소리를 하는 꿈이었다. 케이슨은 중립신을 믿었지만 그것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드낙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분명 정치적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낙이 신성력을 내뿜자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고 알게 될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려주는 것은 자신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가 〈인도자〉라니.”
드낙이 당황해했다. 중립신이 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날 밀어주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남부 왕국에 있는 선한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모조리 동부로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큰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한 업을 쌓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냥 세금만 적게 책정해도 드낙은 선군이 되고도 남았다.
“당황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자작님께서도 분명 알고 계셔야 할 꿈이었습니다.”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낙은 그 길로 게제라스에게 향했다. 사제와 성기사의 대규모 유입이 예정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었다. 내정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예?”
게제라스는 양피지를 떨어뜨렸다. 드낙의 말은 클라이언트의 재수정 요청 중에서도 그냥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유입 말씀이십니까?”
“그래. 성기사와 사제들이 몰려오고 있다더군. 내가 인도자라고 케이슨 성기사가 꿈을 꾸고,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커.”
드낙이 신성력을 보여주고, 게제라스에게 신성력을 부여했다. 피로가 싹 사라진 게제라스가 수전증 환자처럼 손을 덜덜 떨었다.
‘아. 아아···’
계획을 다시 짜야 했다. 신성력으로 3일 철야를 해서 만든 모든 것이 전면 재수정 되어야 할 정도였다. 선한 사제들의 유입 때문이었다.
‘그들의 신성력을 감안한다면···’
게제라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괜찮나? 어디 아프면 사제라도 불러줄까?”
“아닙니다. 그저. 계획을 새로 짜야해서··· 갑자기 피곤합니다.”
드낙이 게제라스를 부축했다. 자신을 대신해서 내정을 총지휘하고 있는 것이 게제라스였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어서 들어가서 쉬어야겠어. 하루는 푹 쉬게.”
“아닙니다. 오늘의 하루가 내년, 내후년의 한 계절을 크게 바꾸게 할 겁니다.”
게제라스의 말에 드낙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지.”
드낙은 신성력을 사용해서 게제라스의 소모된 생명력을 채워주고, 활력도 높여주었다.
‘신전에 부탁해서 하루에 한 번은 신성력을 받도록 해야겠어.’
큰 다짐을 하기도 했다. 잠도 못 자고 철야에 철야를 거듭하며 행정을 보는 게제라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분명 신전에서도 도와줄 터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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