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9 <-- 대산 너머 -->
드낙이 짐을 짊어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비대할 정도의 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적당한 짐으로 느껴졌다.
“도렌! 준비는 다 되었겠지?”
“예! 자작님!”
도렌 또한 최대한 많은 짐을 욱여넣은 배낭을 짊어졌다. 드낙이 다시 싸매주기도 했기 때문에 최소화된 부담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조심해.”
“걱정 마세요.”
이실레아는 장원이 결정되었음에도 아직도 호수마을에 잔류하고 있었다. 가문의 사람들이 이주해야지만 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의 중심에 씨족으로 구성을 하고, 다른 이들을 유입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두 명이서 대산을 넘을 생각을 한다면 죽으러 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전신갑주를 입은 기사가 두 명이었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
도렌에게 불파겐의 칠주(七主) 중 두 개를 하사한지 딱 1달이 되자마자 출발하게 되었다. 그건 많이 양보한 것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이실레아 브릴리언트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장원이 서로 반대에 있는 게 뭐가 문제라고. 이실레아 경, 그만하고 들어가시오. 배웅으로 하루 더 지연시킬 생각인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병사를 동원한다고 해도 말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겨울에 하지 않은 목책과 망루 건설을 통한 방위선 운운한 것이 누구인데.”
“이런 일이 겹쳐서 내려올지 제가 어떻게 알았습니까.”
드낙과 이실레아가 티격태격했다.
호수 마을 인근의 방위선은 매우 열악했다. 경험이 많은 마적이 나타난다면 제법 피해를 입을 정도였다. 드낙은 한 몸이었기에 〈방위〉라는 분야에 큰 힘을 보탤 수가 없었다.
항상 불파겐 영지를 떠돌기에는 드낙은 실력을 쌓기에 바빴다.
이강(肄講)이라 불리는 칠주 다음의 불파겐 비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고, 점성술부터 연금술까지 여러 가지를 숙달하는데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특히 〈흰여우 세린〉의 연금술의 경우 〈마력 액체〉를 만들 연금술은 되었는데 사람을 치유하는 연금술은 그저 지식에 불과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드낙이 연금술에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는 당연히 〈레이시아 플래티넘(Reycia Platinum)〉때문이었다.
‘에휴.’
보면 볼수록 딱했기 때문이다. 그가 광맥을 찾기 위해 나서기 3일 전에는 독살 시도까지 이루어졌다. 가담자는 모조리 죽임을 당했지만 누구도 주동자의 모습을 말하지 못했다.
가족이 협박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레이시아는 점점 더 초췌해져갔다. 드낙은 더욱 그녀를 멀리하게 되었고, 약만 따로 이스핀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독을 검사한 결과 단순한 설사약이라는 점이었다.
레이시아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덕에 5명이 넘는 고용인들이 줄줄이 참수 당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드낙의 손에.
호수 마을의 분위기가 봄이 되었음에도 조금 딱딱한 이유이기도 했다.
카이야가 드낙의 배낭 위에 앉아서 주위를 훑었다. 그리고는 부리로 날개를 한 번 쪼며 깃털을 고르더니 다시 날아올랐다.
‘카이야는 이제 거의 잠을 안 자게 되었다. 그렇게 진화된 것일까.’
아직도 동물들의 영물화 혹은 일각수화의 매커니즘을 드낙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뿔이 나지 않는 경우〉와 〈뿔이 나는 경우〉도 모호했다.
짐마차를 타고 2일 만에 대산 인근에서 내렸다.
대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툭 튀어나온 절벽에서 새하얀 털을 한 늑대가 드낙을 내려다보았다. 도노였다. 이내 다시 산으로 숨어들어가더니 아래로 자신의 무리를 끌고 마중을 나왔다.
“녀석.”
드낙이 미소를 지었다. 도노는 늠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갈색 늑대들은 드낙과 도렌을 경계하면서도 도노 때문에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랜만이다.”
“크르.”
드낙이 거칠게 도노를 쓰다듬으며 앞가슴을 긁어주었다.
“허, 이렇게 보면 도노는 사람 말을 알아듣기는 듣는 것 같습니다.”
“그럼. 도노가 보통 늑대인가. 하하하.”
드낙이 오랜만에 주력을 도노에게 내어주었다. 그간 카이야만 얻어먹던 주력이었다. 도노는 눈을 가볍게 감으며 힘을 느꼈다.
솟아오르는 폭포와도 같았지만 동시에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안정감을 주는 주력은 자연의 힘이었다. 그 어디에도 순응할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늑대들의 보호를 받으며 대산을 넘었다. 능선이 호수 마을 쪽으로 길었고, 그 반대편은 굉장히 깎아져내리는 급한 곳이 대산이었기에 정상에서 넘어가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오래 걸리더라도 안전하게 빙 둘러서 대산을 넘었다.
“꿈에 나온 자리를 찾으려면 그대로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가까이서 본 것이라, 발품을 팔아야 해. 일이 그리 쉽겠어?”
모닥불에 장작을 쑤셔 넣으며 드낙이 말했다. 도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드낙이 활로 쏘아 맞춘 토끼의 가죽을 벗기며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 그 사이에 드낙은 양념장을 만들었다.
‘제법 사치를 부릴 때가 되었지.’
늑대 무리를 공격하는 간 큰 놈은 적었다. 대산의 너머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먹을 것이 산지에 널려있었다. 열매부터 초식동물까지 다양했다. 숲의 생명이 훼손되지 않고 가득했다.
그 만개한 생명의 산을 오르고 내리며 드낙의 무리는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크흐아아앙!!!”
영토를 침범당한 야수가 덤벼들기도 했다. 일각수는 아니었지만 털의 색이 변이된 야수였다. 짙은 녹색으로 탈색을 수십 번은 해야지 얻을 수 있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짙은 녹색의 털가죽을 지닌 호랑이가 드낙에게 덤벼들었다.
“후아악!”
드낙은 고함을 지르며 정면으로 부딪쳤다. 나가떨어진 것은 체중이 두 배는 더 무거울 것 같은 변이야수인 호랑이였다. 도렌과 늑대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뻑! 뻑! 뻑!
도렌이 방패로 호랑이의 머리통을 찍어대었고, 늑대들은 곳곳을 물어뜯었다. 도노는 그중에서도 호랑이의 생식기를 그대로 잘근 어금니로 깊게 씹었다.
“크허어어으어엉!!!!”
고통을 지르는 변이야수의 아가리에 드낙의 롱소드가 깊게 틀어박혔다.
가죽을 벗기고 그대로 나무의 정상에 널어놓았다. 습기를 피하기 위함이고, 땡볕에 잘 노출되기 위함이었다. 이러면 부패가 빠른 털가죽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돌아갈 때도 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약간의 약품을 치는 것으로 처리를 마무리한 드낙이 능숙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전신갑주를 입었다.
“야수들이 산마다 하나씩은 있습니다. 이러다가 야수만 잡고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럼 더 좋지.”
드낙은 늑대 무리가 먹다 남긴 것을 땅에 파묻으며 말했다. 능숙한 삽질이었기에 남은 고기의 처리는 순식간이었다.
‘곧 찾겠지.’
드낙의 눈이 주위를 살폈다.
‘꽝이네.’
〈크놀의 광물업(鑛物業)〉을 통해서 이 산에 있는 광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오감 중에서도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 종족이었고 시선이 향하면서 그 느낌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3일을 그렇게 허탕을 친 드낙은 조급함이 일어났다.
‘실화냐? 불파겐 영지에는 뭐 하나라도 주는 게 없어. 철이라도 나와라.’
철은 보이지도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석탄을 발견했지만 채광량이 부족했다. 1년이면 동날 정도였다. 노예를 통해서나 캘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산에서는 유색 보석이 쥐꼬리만하게 뜨문뜨문 있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10일의 수색 끝에 도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자작님. 벌써 직선경로로만 6일이나 됩니다. 이 정도면 그냥 철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벌써 그 정도냐? 그래도 어제 산에서 보니 이 앞 산이 규모가 제법 크다. 고원도 있고 그곳까지는 가보자.”
딱 7일 거리였다. 물론 산을 오고 가야 하는 거리였기에 실제 거리는 짧았다. 통로를 뚫는다면 3일 거리도 될 수 있었다.
〈고원이 있는 산〉에 진입하자마자 도노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킁킁!
코를 킁킁거리며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다른 늑대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나무도 조금 이상합니다. 다른 산이랑 아예 나무가 다릅니다.”
도렌은 눈썰미 좋게 나무의 종류를 짚어냈다. 잎이 대단히 굵고, 두툼하며 넓었다.
“신기하네.”
드낙이 한 걸음을 내디뎠는데 땅이 물렁했다. 강철 글러브를 벗어 맨손으로 눌러보자 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습지?’
물을 가득 머금은 산이었다. 정글처럼 우거진 산이었다. 특이한 지형이었다.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데.”
드낙이 눈을 좁히며 세심하게 산의 초입을 훑고 다녔다.
신기한 지형 때문인지, 도노의 경계심 때문인지 몰랐지만 드낙의 집중력 또한 높아졌고, 그 결과를 냈다.
“도렌. 이걸 봐봐.”
드낙이 수풀을 검으로 잘라내며 뜯어내며 걷어차서 땅바닥을 보였다. 도렌이 무릎을 꿇고 바닥을 보았다.
“바짝 마른 흙입니다. 발자국처럼 보입니다.”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뭔지 몰랐지만, 〈기괴한 것〉이 도사리고 있을 듯했다.
발자국의 형태는 발굽 같았다. 깊이도 제법 있었는데, 덩치가 자연스레 그려졌다. 못해도 코뿔소만 할 것이다.
맨손으로 바짝 마른 흙을 집어서 손가락을 비볐다. 먼지가 일어나며 습도가 가득한 이곳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흙임을 알려주었다.
마치 죽은 흙이었다. 그리고 그 흙은 발자국처럼 뜨문뜨문 고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단은 후퇴해서 〈검은 회의〉에서 물어보자.’
몬스터가 분명했다.
“오늘은 물러난다. 이 산은 광산보다 더 좋은 것을 줄지도 모르겠는데.”
“예. 알겠습니다.”
도렌은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다시 되돌아가서 수색하며 찾은 자연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카이야는 어둠 속에서 달구어진 돌을 넣은 땅 위에 앉아서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
“이 개자식들아!”
철퍽!
농부가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병사들의 강철 군화에 진흙이 묻었다.
“꾸우우!! 우어어어엉!”
농가에 있는 황소가 구슬프게 울었다. 이 농가의 유일한 재산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보급 기사가 종이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는 농민의 눈에서 분노가 가득했다.
“어명이다. 백금왕가의 뜻이다. 서부에 똬리를 튼 오우거는 호시탐탐 남부 왕국의 시민들을 노리고 있다.”
“퉤! 오늘 죽게 생겼는데, 무슨!”
농민이 뱉은 침이 기사의 허벅지에 투둑하고 묻어서 주륵 흘러내렸다.
“이 새끼가! 뒤지고 싶어? 엉!”
병사들이 거칠게 농민을 무릎 꿇렸다. 주먹으로 머리도 후려쳤다. 이빨이 하나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뒤에서 농부의 아내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항해봤자 소용없었다.
“······”
기사는 손수건으로 침을 닦아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놔주어라. 그럼 이 황소를 되돌리고 군역을 짊어질 자가 있느냐?”
“······”
농민이 진흙 묻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이곳에 남자는 자신뿐이었다. 아들은 이제 10살이었다.
“왜 없어요? 여기 있습니다.”
나무 작대기를 든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빌어먹을, 지미! 안으로 들어가!”
“흠, 나이가 몇이지? 덩치가 제법 큰데.”
“10살입니다. 전 토끼를 도축해본 적도 있어요.”
“들어가!”
농민이 거칠게 자신의 아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매일같이 효도를 하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아들이었다.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가져가시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보라.”
농락당하는 기분에 농부가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법대로 하십시오. 법대로!”
“오우거 토벌을 위해서 추가 세금을 징수하겠다. 그리고 귀족을 앞에 두고 성격을 좀 죽여라.”
“농민의 하나뿐인 재산을 가져가면서 대체 무엇을 원하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 귀족다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울먹이는 농민의 모습에 기사는 마치 외면하듯이 몸을 돌렸다.
“징수하라! 오우거는 반드시 토벌되어야한다!”
마치 변명하듯이 오우거를 들먹거렸다.
“예!”
황소가 그렇게 병사들의 거친 손에 이끌려갔다.
백금 왕가는 제2차 오우거 토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땅이 녹자마자 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항상 고통받는 것은 힘없는 자들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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