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6 <-- 봄이 기웃기웃 -->
검은 연기는 더 이상 드낙을 스치며 지나가지 않았다. 그저 검은 공간에 드낙이 들어섰다. 새하얗지만 생기 없는 상체를 지닌 중립신이 눈을 감은 채 중앙에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드낙이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문은 없습니까?”
“그렇다. 얻을 업이 없기 때문이다. 있긴 있지만, 소량이지.”
드낙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더 자세하게 들을 생각을 가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중립신이 고개를 드낙에게 정확하게 고정했다.
“영혼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아는가? 나의 챔피언이여.”
“뭐, 가장 사용하게 힘든 초월의 힘, 내지는 가장 강력한 초월적 자원 같은 거 아닙니까?”
“틀렸다. 그렇다면 신들이 신성력이 아니라 영혼을 힘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지.”
다루기 힘들어도 신이었다. 사용하자고 한다면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 뭡니까?”
“개체마다 용량이 차이가 나지만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영혼이다. 많으면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여럿이 되어버리지. 그러니 큰 힘의 기둥으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초월자는 혼자 큰 힘을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까?”
“그렇다. 초월자의 가장 큰 척도는 규모를 초월하는 힘을 보유하는 것이다. 신성력을 도모하는 것은 신은 신앙을 통해서 효율 좋게 힘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드낙 또한 강력한 일신의 힘으로 다수를 압도하였기에 직접적인 배신을 꿈꾸는 자들이 없었다. 뒤로 비리를 저지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것이 드낙이었다.
CCTV 대국!
대한민국에서 살아간 박호훈은 그 강력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엘프는 무엇입니까?”
“개체로서 지닐 수 있는 영혼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겠지. 가장 나의 힘을 많이 받은 종족이니까.”
장남 혹은 장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릇으로 완성된 자들이며 그들이 수련으로 통해서 얻는 것은 지식, 경험, 실력에 불과했다. 마력의 성장은 이룰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성장해도 그것이 힘의 증대로는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제국 기사는 업을 남기지 못한 겁니까?”
“아니. 아까도 말했다시피 소량을 남겼지만 그대에게 줄 검은 문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너무 적기 때문이다.”
‘중립신이 나에게 하사하는 것이 검은 꿈이군. 혹은 눈을 뜨면서 그렇게 제어가 가능하게 된 것인가.’
“그러면, 제국 기사의 몸에 있던 길쭉한 유리관은 어떤 역할입니까?”
중립신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무감정, 그 자체였다.
“마력 혹은 마법과 영혼의 결합이다. 융합이라고 할 수 있겠지.”
“엄청 위험한 것 아닙니까?”
중립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기다려봐야 한다.”
“판단이 서지 않으시는 겁니까?”
미미하게 중립신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이용할지, 언제 개입할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드낙은 거기에 대해서는 중립신을 믿기로 했다. 사실 믿지 않아도 자신이 할 것은 없었다. 동부에서 힘을 최대한 기르는 것이 최근에 드낙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럼 마법과 영혼의 융합의 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영혼력이 커지면 개체로서 자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 끝에는 그저 모인 영혼이 흩어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마력으로 끌어모으는데도, 흩어지게 됩니까?”
“〈범용성의 마력〉은 영혼을 모으는 접착제 역할을 능히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제어하는 것 또한 정신. 그 정신이 무너지는데 어찌 마법이 가동할 수 있겠는가?”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허물어질 탑이라는 소리였다.
‘제국이 무너진다는 소리인가?’
“그것을 중립신님의 힘을 회복하는데 이용할 수는 없습니까?”
“그리한다면 드워프와 엘프가 나의 존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신이지만 육신이 없고, 힘이 있지만 그것을 집중할 수 없다. 체(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엘프는 그전에 나를 다시 봉인하려 들 수도 있다.”
가장 정상에 서있는데 그런 엘프를 지나 상석에 앉으려는 중립신을 엘프들이 가만히 놔둘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런데 저는 어떻게 서포트할 수 있었습니까?”
“경우가 다르다. 방법도 다르지. 업을 통해서다. 별이 너의 힘이 되고, 검은 꿈을 통해서 다른 자들의 업으로 만든 힘을 너에게 주는 것이다. 그 힘은 나의 것이 아니고, 오롯이 너에게 주어지는 하사품이다. 다시 빼앗을 수도 없지.”
“아하···”
중립신은 드낙을 보며 말했다.
“명심해라, 드낙 불파겐. 끝없이 커지는 행성에서 수많은 생명체가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신의 땅〉이다. 나 스스로 흙이 되어 〈테라(Terra, 흙)〉가 되는 것이다.”
“너는 그곳을 지키는 챔피언으로서 영생을 살아갈 것이다.”
드낙이 고개를 숙였다.
“모든 힘을 다하여 돕겠습니다.”
중립신의 몸이 아래로 사라지고, 〈검은 회의〉가 열렸다.
“유리관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까?”
“아샤 파이룬은 마법사 아닌가? 그녀에게 맡겨라.”
“그럼 균형이 무너진다. 몽펠리에에 주는 것이 낫다.”
도로 건설은 매우 중대한 것이고, 큰 공이었기 때문에 〈아샤 파이룬〉에게 제국 기사의 몸에 있던 유리관에 대한 조사를 맡기는 것은 외척의 균형이 무너지기 쉬웠다. 다른 가문이 태클을 걸고 싶어도 한 일이 있었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리관에 대한 조사는 현재로서는 파이룬이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결국 아샤 파이룬과 입을 맞춰야 한다.”
“쉬운 일 아닌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찌 될 줄 알고? 몽펠리에가 오히려 좋다. 그들은 파이룬과 다르게 큰 사업이 없다.”
드낙은 다른 가문에 대해서의 판단도 물어봤다.
“킹슬레이의 경우 너무 멀기 때문에 맡길 수 없다.”
“플래티넘은 논외고.”
“에오윈 가문은 여력이 없다.”
의견 교환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검은 회의는 부인들이 걸어올 사업에 대해서도 말했다. 제국 전신갑주를 통해서 시기가 빠르게 온 것이다.
“아내들의 사업은?”
“에드윈 가문이 하루빨리 이주하는 것이 좋겠지만, 다른 외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안젤리카에게 내년 혹은 내후년으로 하도록 하고, 이실레아나 도렌 같은 자와 토벌이나 다니도록 해라.”
“케이샤 킹슬레이는 가문과 상관없이 제국과 화장품으로 교류가 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한몫을 다하고 있다.”
“몽펠리에가 문제군. 그들이 스스로 손을 내밀텐데, 어중간한 것은 허락해서는 안 되고, 넘치는 것 또한 피해야 한다. 그들에게 유리관에 대한 조사를 맡기는 게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좋을 수 있다.”
“파이룬은 도로 사업이 있으니 상관없다. 그들이 가장 큰돈을 이곳에 쏟아부을 것이다.”
이 때문에 드낙의 세력이 더 빠르게 커야 한다는 것은 이견이 없었다.
“도렌에게 은광을 주면 너무 이실레아한테 휘둘리지 않을까?”
드낙은 걱정 어린 표정을 했다. 도렌의 성품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법 많은 종류의 사람을 경험하고 중용한 적이 있는 세파리아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넌 도렌을 뭘로 보는 거냐? 은을 브릴리언트 가문에 줄 수 있을 것 같은 성품이냐?”
“뭐? 착하고···요령이 나쁘고, 그래서 맡길 수 있다는 거 아니었어?"
“맞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도렌은 생각보다 자신의 주관이 뚜렷해. 단지 그 주관을 말하거나 지킬 선이 남들보다 뒤에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휘둘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모든 이들이 세파리아스를 보고 있었다. 포악스러운 자였지만, 그 또한 귀족이었으며 많은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그저 힘만 강한 무인이 아닌 것이다.
“도렌은 돈을 쓰기 바쁜 놈이 될 것이다. 하지만 흥청망청은 아니지. 못 사는 놈들을 보면 동정심이 쉽게 생기겠지만, 공짜로 주지는 않을 거다. 웬만해서는! 또 게제라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쉬운 위치인데다, 이실레아도 적정선을 유지할 것이다.”
이실레아가 돈을 쥐려고 한다면, 드낙의 눈치를 안 본다는 뜻이고, 반란이 코앞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드낙이 내놓은 함정 내지는 과제라고 여길 것이다.
다양한 사업을 거침없이 일으킬 것이다. 또한 은광을 소유했다고 해도 세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광산은 그 영지의 영주의 것이지 장원 인근에 있다고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드낙은 도렌에게 은광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사용에 있어서 세금 또한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은광은 그 혼자서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상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파겐 영지의 현 상태로는 은광 한 곳의 채광량도 소화시키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다양하게 뻗어갈 것이다. 은광을 소유한다고 해서 그냥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정된 지역에 풀리기만 한다면 은의 값은 돌보다도 못하기 때문이다.
*
“오늘은 쉴 줄 알았는데.”
드낙은 〈아샤 파이룬〉의 집을 방문했다가 헛걸음을 하고, 옆에 있는 별채로 향했다. 그곳의 굴뚝에서는 보라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크를 하고 나서 한참 뒤에야 문을 열어주었다.
“죄송해요! 몇몇 시료를 만들고 있어서요. 다 써버려서요!”
내부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 이곳은 그녀의 마법 연구실이었다. 간단한 것들에 불과했지만 해를 달리할수록 규모는 커질 것이다.
“벽에 걸린 마법은 뭡니까?”
“방어 마법이요!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거든요.”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달콤한 향기가 가득한데.”
“단맛이 나는 마력 회복제요! 제 기호품이에요!”
별로 쓸모없는 것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항상 공부할 때마다 기분전환하면서 마력을 제어하거든요. 그래서 꼭 필요하죠!”
“아하.”
드낙이 그제서야 이해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제국 전신갑주〉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북부 가문 중에서는 마법사 전력이 가장 많은 곳 아닙니까?”
“그, 그럼요! 여, 여기 앉으세요!”
아샤가 서둘러 찻잔을 내왔다.
‘달다.’
인스턴트에 노출된 삶을 살았기에 고풍스러운 단맛에 드낙이 연거푸 찻잔에 입을 대었다. 아샤가 눈웃음 지었다.
“차가 입에 잘 맞으시나 봐요?”
“달아서 좋습니다. 단맛을 굉장히 좋아하시는군요.”
“머리를 많이 쓰다 보니, 그 덕에 운동도 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단맛을 포기할 수는 없더라고요."
“운동도 하십니까?”
“워낙 먹기 바빠서 억지로 하는 편이죠.”
그때 노크 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아샤 파이룬이 열자 시녀들이 드낙의 눈에 보였다. 늙은 시녀가 아샤 파이룬에게 고개를 황급히 숙였다.
“죄송합니다. 잠깐 이야기가 다르게 돌아서 늦었습니다.”
“그렇게 죄송할 필요는 없어요. 자작님. 식사는 하셨어요?”
“필요 없습니다. 방이 좁은데, 시녀를 너무 많이 대동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에 시녀 한 명만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가장 나이가 많은 시녀였다. 안경까지 쓰고 있었는데 굉장히 전문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파이룬 가문은 불파겐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 도로 사업을 해주는데, 이런 것도 안 보내주면 섭하지 않겠습니까?”
“과분해요! ···하지만 주신다면 받겠어요.”
드낙이 씨익 웃었다.
“하루를 차이로 두고 다른 가문에게도 줄 생각입니다. 물론 얻을 것은 얻어야 하기에 부인께서 연기를 좀 잘해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공짜로 받는데,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이죠.”
드낙은 고개를 저었다. 가져온 길쭉한 목함을 테이블에 놓았다. 아까부터 시선이 간 것이기에 아샤가 물었다.
“이 길쭉한 목함은 뭐죠?”
“조사를 좀 해주었으면 합니다.”
드낙이 목함을 열었다. 굉장히 투명한 유리관 속에 블루 슬라임의 찌꺼기가 곳곳에 묻어있었고, 사람의 절규하는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제국 기사의 몸속에 있던 겁니다. 유리관의 밖에 나오면 사라져버립니다. 취급에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보다 제국이 어느 수준까지 올라왔는지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중립신은 〈인간을 기준으로 판단〉을 해주지 않았기에 드낙은 따로 움직여야 했다. 100만 명이 죽어도 결과가 괜찮으면 중립신은 괜찮다고 할 것이다. 엄청나게 먼 미래를 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개체로서 여기는 게 아니라 종족 전체로서 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죽어도 그건 필요했기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할 신이었다.
“그 어떤 대가도 없이 해드릴게요. 제국 전신갑주에 대해서도요.”
드낙은 아샤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일어났다. 아샤 파이룬의 이마에 작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가 나가자 늙은 시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디 아샤. 그래도 받아내셨어야죠.”
“킹슬레이가 베푸는 것을 보세요. 삐끗하는 것보다는 땅을 다지는 것이 더 좋아 보여요.”
“맞는 말씀이지만, 추월 당할 수 있습니다.”
“뭘 추월 당하는데요?”
“그것은······파이룬 가문을 위해서 움직여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전 그래요.”
늙은 시녀는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불파겐 자작에게서 뜯어먹는 것이 추월당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더 드낙을 뜯어먹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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