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9 <-- 아바레스트에 이끌린 자들 -->
이실레아와 도렌이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채 원탁회의장에 들어섰다. 게제라스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변덕이 심한 것이 드낙 님이신데.’
작심삼일처럼 때때로 유비가 되려고 하는 드낙은 자신의 가치관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뀔 때가 많았다. 윗사람으로써 가장 골치 아픈 타입이었고, 적 또한 곤란할 정도였다.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들은 힘들게 결정하는 것이 전투고, 전쟁이라면 드낙은 오히려 전쟁 특수를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무조건 승리한다〉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상상이었지만, 실제로 지금까지 드낙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벌써 와있었군.”
드낙이 성큼 걸음으로 회의장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었다. 이실레아와 도렌이 같이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녀석들.’
도렌은 제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병권을 위임받은 이실레아는 자연히 드낙의 바로 오른 편에 있는 이인자 자리에 앉아야 했다.
“일단은 어떻게 맺어졌는지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지? 사적인 것이라도 나는 그대들의 주군 아닌가?”
“예? 자, 자작님···”
도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모습에 드낙이 낄낄거렸다. 저런 숙맥이 짝을 찾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이실레아는 계산적으로 접근했겠지만, 함께 앉은 모습만으로도 그런 걱정은 말끔하게 녹았다.
‘저렇게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니, 더더욱 걱정을 덜었다.’
속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당장은 도렌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실레아 브릴리언트는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풀었다. 도렌은 고개를 숙인 채 때때로 대답만 했다.
평범한 러브 스토리를 기대한 드낙은 이야기를 도중에 중단했다.
“그래서 제가 자세히 보니, 매주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성에게 남몰래 양식을 창문에 넣어주는 것 아닙니까?”
“그만. 그 정도면 되었다.”
‘완전 스토커잖아?’
공포 그 자체였다. 도렌은 그런 것에 대한 면역이 없어서 그것을 사랑으로 보고 있는지 몰랐지만 썸을 타고 있는 이실레아는 바닥부터 하늘까지 도렌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는 절차를 가졌다.
평민이고, 이용을 해야 하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 드낙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서는 아직 그러한 종류의 범죄가 범죄로 여겨지지 않고 있고, 결국 결과로 보면 사귀게 되었기에 상관없지만 드낙은 찜찜한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도렌을 빼앗긴 것 아닌가.’
사람 좋은 도렌을 이실레아에게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애송이 용병시절부터 키운 놈인데. 이걸 가로채가네.’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남에게 배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도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정도의 부(富) 이상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게 그였다. 워낙 가족이 많은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랐기에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이실레아가 대박을 터트렸어.’
드낙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비교하면 도렌이 아까웠다. 드낙은 신분제의 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신분제가 없는 곳에서 살았기에 사람의 신분에 따른 평가보다는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배신하지 않는 부하인 도렌은 일등 가신감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방계가 되지 않으려고 발악하고 재능도 있어서 군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실레아는 사실 도렌만큼 드낙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한다면 괜찮지만, 도렌.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힘들면 찾아와. 내 두 손 두 발 다 이용해서라도 널 도와주겠다.”
“감사합니다!”
도렌이 화색이 돌았다. 반응이 제법 좋자 드낙이 말했다.
“최근에 힘든 점은 없든?”
상냥한 말에 도렌은 조금 고민하다가 일단 가벼운 문제를 내어놓았다. 드낙이 정말로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은 장래에 대해서 자주 다툽니다. 게제라스 총관께서는 아예 행정 쪽으로 오라고 하시고, 레아는 아니, 이실레아 경은 아예 검을 쥐라고 해서···”
드낙이 호쾌하게 말했다.
“하하! 바로 답이 나오는 문제인데 무슨 걱정인가?”
“예? 자작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드낙이 히죽 웃었다. 웹툰에서 본 것이기도 했다.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림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본 것이 박호훈이었다. 현대 사회의 가장 위대한 점이기도 했다.
“둘 다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하하!! 우리 영지의 복이 될 것이 분명해!”
‘황희처럼 굴려라! 그럼 나라가 평화로워질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지나가던 사람조차도 황희는 알았다. 비리를 저지르고 친인척을 낙하산 태우고 온갖 더러운 짓을 했음에도 죽기 전까지 퇴직을 하지 못한 것이 황희였다.
도렌이 사색이 되었다.
“내 그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해주겠다.”
‘망, 망했다.’
살면서 〈평균〉이 얼마나 도달하기 힘든지 깨닫고 있는 게 드낙이었다. 이곳에서는 반푼이 혹은 0.8인분으로 여겨지는 것이 도렌이었지만 그만한 재능도 감사해야 했다. 왜냐하면 성품이 좋기 때문이다.
‘살인을 저질러도 넌 불파겐 영지에서 일만 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범죄를 저지를 도렌이 아니었다.
“아무튼 두 사람의 연애를 축하한다. 결혼식에는 내가 주례를 서도 되겠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드낙이 손사래를 쳤다.
“날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 도렌은 내가 자유기사 시절 때부터 함께했는데, 당연히 내가 서야지. 결혼식 대금도 내가 치러주마.”
“감사합니다.”
도렌을 크게 대우해줘야지만 도렌이 어깨를 펴고 이곳에서 다른 귀족들과 동등한 입장이 될 수 있었다. 따돌림 한다는 것이 드낙의 귀에 들어가면 어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어야 했다.
‘결혼식만큼 좋은 구실이 없지.’
억지로 만드는 구실보다 더 효과가 좋을 것이다. 검은 회의에서 내어준 해결안 중에 하나였다.
“브릴리언트 가문의 일족은 불파겐 영지로 오기로 했나, 어떻게 되었나? 이제 봄이지 않나.”
“그것이··· 저는 아직 장원이 없습니다.”
그 말에 드낙이 깜짝 놀라며 손으로 이마를 쳤다.
“그런! 아뿔싸! 내가 부인을 먼저 챙겨버린 격이 되었구나. 미안하네. 이실레아 경. 게제라스 총관이 아무 말도 안 해서 이미 가지고 있는 줄 알았네.”
새빨간 연기였지만 실로 생동감이 넘쳤다. 이미 몇 번이나 연습했기 때문이었다. 드낙의 시뮬레이션은 현대문물을 통해서 리얼함이 대단했다.
“어디를 가지고 싶은가? 미안하게도 남쪽에는 파이룬 가문, 서쪽에는 몽펠리에, 북쪽에는 킹슬레이 가문의 장원이 들어설 것이네.”
고작 마을 하나뿐이었지만 관계에 있어서 중요했다. 이실레아가 드낙을 보며 말했다.
“파이룬 가문과 몽펠리에 가문의 장원 위치가 바뀐 것 아닙니까?”
“게제라스와 나의 의견이네. 그들을 믿어도 실제로 이권이 쥐어졌을 때, 어찌할지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말로만 금을 돌처럼 본다고 떠들어대어도 금이 보이면 흥분제 먹은 개처럼 달려드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누구나 로또 1등에 당첨되기 전에는 소박한 삶을 꿈꾼다. 실제로는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려고 한다. 그들이 소박하게 사는 이유는 현실이라는 놈이 막고 있어서임을 돈을 쥐고 나서 알게 된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는 엘라한 가문의 장원 밑에 있는 숲과 평야의 경계에 장원을 갖고 싶습니다.”
버려진 영지의 자원은 석재, 농사, 나무와 숲이 전부일 정도였다. 이실레아의 선택은 현재 배경을 생각하면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드낙이 입술에 침을 묻히며 다른 안을 내어주었다.
“내 며칠 전 꿈에서 대산에서 주욱 부채꼴로 펴지는 크고 작은 산들 사이에 있는 곳들을 하루 걸어 백색의 털로 된 곰이 사는 동굴에 은맥(銀脈)이 있는 것을 봤네. 그곳에 장원을 하는 것이 어떻겠나?”
“가축이 많아서 산은 힘듭니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말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이나 다름없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대신 드낙은 고개를 돌려 도렌에게 말했다.
“불파겐의 방계가 되어 성씨를 곧 물려받게 될 것이다. 나는 내 방계에게 장원 하나 안 주는 귀족이 되기는 싫다. 산에 장원을 가지겠느냐?”
“저야 주는 대로 받을 뿐입니다.”
도렌의 욕심 없는 말에 드낙이 웃었다. 반면 이실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욕심을 부릴 때인데. 에휴···’
답답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 면 때문에 자신의 남편이 될 자격이 있었다. 욕심이 많았다면 이실레아와 부딪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편도 산에 억지로라도 마을을 가지게 되어 작은 세수라도 받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도렌. 넌 광산을 관리하며 뒷돈 안 쥘만하다. 그렇기에 너는 성공할 수 있는 거다.’
드낙 또한 목적을 달성했다. 이실레아는 자신의 복을 스스로 걷어찼다. 도렌은 드낙이 찾아낸 광맥들을 관리하게 될 것이다.
“그럼 이걸로 이야기는 다 되었군.”
드낙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실레아가 말렸다.
“자유 마을에 대한 보고를 아직 안 들으셨습니다.”
“아! 그렇지. 어떻던가? 자유기사들을 모아놓은 곳이라던데.”
“괘씸한 놈들입니다.”
이실레아가 욕을 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듯했다. 드낙은 그 말에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불파겐의 이름 앞에서 고분고분 해하지 않았나?”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직 드낙 자작님이 돌아오신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실레아는 자유 마을에 대한 전력을 먼저 말했다.
“자유기사의 숫자는 열다섯 명이 넘습니다.”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파리들이었다. 본래라면 써먹어야 했지만 드낙의 부재로 딴마음을 품게 된 잡것들이었다.
‘죽여서 얻은 비전은 도렌이나 이스핀에게 줘야겠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 남자고, 거칠게 지내던 놈들이라 난폭한 기세가 불처럼 요란했습니다.”
“그래봤자 잡병 아닌가?”
“남부 왕국에서도 60kg(132파운드)의 힘을 내는 석궁을 생산하는 것도 힘든데, 놈들은 대부분이 제국에서 만들어진 아바레스트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바레스트? 그게 뭔가?”
드낙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석궁은 알아도 아바레스트 같은 석궁은 몰랐다.
“220kg(440파운드) 이상의 파괴력을 내는 무지막지한 석궁입니다. 장전이 느리고, 생산하는데 엄청난 기술과 시간이 걸려서 제국에서도 몇 없는 것들입니다.”
이에 드낙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런 무기를 왜 자유기사들의 무리가?”
“누군가가 수작질을 한 것입니다. 기사의 전신갑주는 마법 처리가 되어서 뚫지는 못하겠지만 저지는 가능합니다. 그러니 놈들이 대놓고 반항하는 것입니다.”
‘제국···’
드낙이 아바레스트의 제조국인 제국을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있었다.
‘불파겐의 후예? 아니야. 불파겐은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 단순히 불파겐의 이름에 관심을 가진 제국의 끄나풀이로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더러운 수작질을 하려 온 놈들입니다. 모조리 죽여 다시는 그런 시도를 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이실레아의 말에 드낙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기사들은 공개처형시키고, 반항한 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일 것이며, 항복한 자들은 죽을 때까지 석지를 개간하는데 쓰겠다.”
결론부터 낸 다음으로는 놈들을 죽일 명분을 만들었다.
“제국제 아바레스트 10정만 전시해도 모두 알아들을 것입니다.”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몇 번 사용하도록 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영지를 주인 없는 땅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명시하여 불파겐을 모욕했다고 말하면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날 겁니다. 사실상 자작님의 은혜를 받지 않은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드낙의 편이 아닌 자가 없었다. 겨울에는 드낙이 잡은 야수들의 삭힌 고기나 염지한 고기를 먹으며 지냈기 때문이다.
“병사 하나 주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 부분은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희에게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도렌은 시민의 시야에서 불리한 것도 가려냈다.
“특히 놈들은 마을에 머무는 것, 근처를 지나가는 것에 대해 통행세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걸 아주 크게 이야기한다면 시민들은 대단히 분노할 것입니다.”
이실레아는 놈들을 산적으로 만들도록 이야기를 조금 부풀리기도 했다.
게제라스가 없이도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그의 밑에서 실무를 맡은 도렌이 있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5879자
평추코! 다양한 의견추!
〈성실 작가〉 시스템이 생겼네요. 30일 중 22편만 쓰면 조아라가 인정한 성실 글쟁이가 되는 듯합니다.
후후. 저의 연참력을 왼손에 봉인해야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조아라가 원하는 성실 글쟁이가 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네요. 크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