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5 <-- 귀환 -->
폐허가 되어있는 〈사냥꾼 마을〉을 지나 숲을 건너 〈둥근 언덕 마을〉을 경유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드낙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행렬이었기에 멀리서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케샤스! 실로 오랜만이다!”
드낙은 거침없이 케샤스와 해후를 나누었다. 이 넓은 숲을 관리하는 그는 사실 방계로 삼아도 부족하지 않았는데, 도망자지만 순찰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에도 한마을을 지배할 정도로 능력이 있었다.
반장조차 못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끝도 없는 행렬을 보고 심장이 떨릴 지경이었습니다.”
“숲은 어떠냐?"
“예. 고블린 몇몇이 숨어서 살아가고 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드낙이 군침을 삼켰다.
‘성장하셨군.’
케샤스는 자신을 보자마자 거침없이 하대를 하는 드낙의 모습에서 엄청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분을 막론하고 경계하는 모습이 조금조금 보였는데 이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마을과 숲에 대한 권리를 잘 부탁한다. 여유가 된다면 너 또한 불파겐의 방계로 삼아주겠다.”
드낙의 말에 케샤스가 감격하며 드낙을 칭송했다. 그가 그를 믿는 이유는 전신갑주를 입고 있는 이스핀 때문이었다.
‘따라가더니 완전히 출세를 했구나!’
가슴이 크게 떨려올 지경이었다. 신분의 상승!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백금 왕가〉로부터 작위를 인정받은 귀족의 방계가 됨으로써 귀족이 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아른거렸다.
드낙은 케샤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서 단연 핫한 것은 〈군사력의 증진〉과 〈농업용수를 위한 사업〉의 충돌이었다.
“어째서 여기까지 호수 마을의 이야기가?”
“가만히 숲에만 있으면 바보 멍청이가 아닙니까?”
드낙이 케샤스의 말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드낙에게 정보 취득의 다양성을 주는 것이기도 했기에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실레아와 게제라스가 아니라 케샤스의 정보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르면 정보를 말하는 것도 다르다. 서로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일이라도 말을 하면서 달라지기 마련이다. 경중(輕重)이 서로 뒤바뀌기 쉽기 때문이다.
“겨울에 이실레아 경은 마을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요구했습니다. 아직 버려진 영지···불파겐 자작령의 대비는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땅이 넓고, 성벽은 낮고.”
“예. 맞습니다.”
드낙이 맞장구를 쳐주자 케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반면 많은 인구 때문에라도 많은 수의 저수지를 원하는 것이 게제라스 총관이었습니다.”
그 또한 옳았다. 요는 누가 양보를 했느냐는 것이다.
‘날 염두에 뒀다면, 이실레아가 양보하는 것이 맞다.’
드낙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집 나가서 고생하고 돌아오면 장성해있는 자식과 비슷했다. 홀로 머리를 굴리고, 검은 회의의 다툼 결과를 정리하고 자신이 그것을 직접 선택해야 하는 과정을 거친 드낙이었다.
자연스럽게 용병 시절의 드낙처럼 머리 굴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군사력을 보유했기에 오히려 게제라스의 결정이 뒤로 밀려나면 내가 마음 놓고 다른 곳에 다닐 수 없게 되어버리지.’
강력한 고위 기사인 것이 드낙이었다. 어느 영지에서든지 큰 토벌이 터지면 그를 부를 것이다. 하지만, 이실레아가 힘을 지녔고, 그것을 게제라스에게 행사해서 얻는 〈정황〉이 보인다면?
드낙이 무슨 판단을 할지 그녀와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실레아가 양보했겠지?”
“일주일 내내 날을 세우다가 저수지 건설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병력도 제법 내어주고, 직접 치안을 확보하기도 했답니다.”
드낙이 웃었다. 자신의 예측이 맞았기 때문이다.
둥근 언덕 마을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드낙은 케샤스를 새벽까지 두고 술을 마시며 그간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들었다. 이곳 또한 드낙에게 중요한 업무 중에 하나였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자유기사의 유입이 많다고?”
“예. 그것 때문에 마을을 하나 더 만들었다고 합니다. 겨울에도 마을을 찾아오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벌써부터 드낙의 명성이 곳곳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특히나 전신갑주를 일개 뜨내기 용병이 손에 쥐었다는 것이 가장 크게 자유기사들의 탐욕과 공명심을 찔렀다.
‘좋군.’
드낙이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반란을 일으키면 죽이면 될 뿐이었다.
오히려 크게 대우를 해줘야 할 판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행렬이 워낙 길었고, 도로의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늦은 이동속도를 보였고, 10일 뒤에서나 호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호수를 중앙에 두고 엄청나게 발전해있는 마을의 모습이 들어왔다. 집의 숫자만 해도 2천 개는 넘어 보였다. 모든 집에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겠지만, 게제라스의 철두철미한 준비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나 드낙의 눈길을 끈 것은 마을 밖에서 아직도 작업 중인 〈하수구 공사〉였다. 위에서는 돌로 메꾸고 있었고, 큰 기둥을 들고 가는 이들도 보였다.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토사를 수레를 통해서 빼내고 있었다.
큰 지하수로는 큰 도시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산지기 산골 마을의 대산에서 지하수를 끌어오고 있구나. 무식한 짓을 잘도 겨울에 했군.’
석지(石地)로 된 평야 곳곳에 큰 나무가 옮겨심어졌고, 그 그늘 밑에는 큰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나무, 돌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저수지에서 물을 기어가는 자들도 보였다.
게제라스는 허둥지둥 마을 밖으로 향했다.
“어찌 살이 더 찌셨소? 게제라스 총관.”
“겨울 때문에 밖을 나다니지 못해서···”
“그런 것치고는 벌여놓은 일이 많은 것 같소만?”
드낙이 일에 대해 말하면서 반갑게 게제라스를 껴안았다. 그리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풀어주었다.
“고생했소. 내가 가져온 것을 보면 까무러칠 것이오. 하하하!”
드낙이 크게 웃음 지었다. 게제라스는 같이 웃었다. 트롤의 부산물은 멀리서도 잘 보였기 때문이었고, 크놀들이 만들었지만 〈정예 몬스터〉가 마감한 무구들이 쌓여있었으며, 철도 엄청나게 많이 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좋아만 하던 게제라스가 눈을 좁혔다.
“저 영애 분들은···?”
“아! 소개를 해줘야겠군. 따라오게.”
“예? 예.”
게제라스가 드낙의 뒤를 따라갔다.
“그대가 게제라스 총관? 잘 부탁해요. 〈케이샤 킹슬레이(Keisha Kingslay)〉라고 해요.”
드레스 자락을 살짝 올리며 인사하는 케이샤에게 게제라스 또한 인사를 정중하게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케이샤가 풍기는 사업가의 기질을 느껴서인지 바짝 긴장했다.
“서부의 군왕이라 불릴 정도로 칭송이 자자한 킹슬레이 가문 아닙니까? 영광입니다.”
“고마워요.”
“내 정실부인이니, 앞으로 잘 하게.”
“예? 결혼하셨습니까?”
게제라스가 깜짝 놀랐다.
“다섯 가문과 결혼을 했네. 첩이 넷이고···”
“예?”
‘첩이 넷?’
게제라스가 순간 휘청거렸다. 드낙이 휘청거리는 게제라스를 받아주었다.
“왜 이러나? 산책이라도 자주 해야겠어.”
“어, 어, 어느 가문과··· 하셨습니까?”
“몽펠리에, 파이룬, 에드윈 그리고 플래티넘 가문과 했지.”
“프, 플래티넘···”
게제라스가 뒷목을 잡았다. 몸에 열이 팍 나면서 머리가 띵했다.
“냉수! 냉수!”
드낙이 고함을 질렀다. 게제라스가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심호흡을 했다. 부축을 받아 상체만 겨우 올린 채 냉수를 천천히 마셨다.
드낙이 뭐라고 말했지만 게제라스는 귀가 먹먹해져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끝났다. 내 내정관의 꿈이···’
대가문 3곳에 백금왕가까지 뒤섞인 영지에서 내정관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외척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이런 미친 경우가 다 있나!’
게제라스는 팔다리가 크게 저려오며 전신에 식은땀이 쭉 나며 배가 아파졌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정신이 버티지 못하며 화병이 나듯이 몸에 오한이 덜덜 났다.
“어서 총관을 데려가라! 충격이 너무 컸나 보다!”
병사들이 들것을 통해 게제라스를 들고 서둘러 간호를 위해 집으로 향했다.
*
투둑··· 쿵!
〈드래곤 로드 전투 요새〉의 굳건한 내성문의 드래곤의 머리가 떨어졌다. 쩌적 갈라지며 안에 있는 거대한 에메랄드 보석이 가루가 되어서 바닥에 쏟아졌다.
흑색의 돌로 이루어진 흑룡의 몸체와도 같은 도로는 〈마신장(魔神將) 오우거(Ogre) 발라쿠(ballakeu)〉의 공격과 발을 굴러서 만들어낸 구멍으로 가득했다.
무너진 내성의 폐허에 앉아있는 발라쿠가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휘오오···!
검은색의 기운이 회오리치며 주변을 훑었다.
“〈마신(魔神) 성현(Sung Hyun)〉이시여! 당신을 위해서 희생물을 공양합니다! 이곳에서 죽은 모든 생명체를 당신을 위하여 바칩니다!”
그 기도는 하루종일 이루어졌다. 마신과의 거리가 멀수록 시간이 오래걸렸다.
쩡!
하늘에서 검은 구체가 나타나며 그대로 일직선으로 검은 빛을 쏘아 발라쿠에 닿았다.
[실로 오랜만이군. 나의 권속아. 용케도 살아있구나.]
“크크크. 감사합니다. 이 대지를 드리기 위해서 아직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복수는 이루었느냐?]
“아직입니다. 드워프를 치기 전에 인간을 통해서 제 그릇의 결함을 수복할 생각입니다!”
[좋다. 허나 방심하지 마라. 인간은 큰 위기에 가장 잘 뭉치는 놈들이지 않느냐?]
“걱정마십시오. 저 또한 무리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네가 준 희생물의 양이 상당하다. 무엇을 원하느냐?]
“이곳을 거대한 던전으로 만들어주십시오. 또한 제 그릇의 균열을 조금이라도 고쳐주십시오.”
[고치는 것은 어렵다. 나는 그런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의 그릇을 더 크게 만들어주마. 그리 된다면 자연히 그릇의 균열은 줄어들 것이다.]
“감사합니다.”
파아앗!
검은 기운이 곳곳으로 퍼져나가 드래곤 로드 전투 요새의 모든 곳에 닿았다.
쿠구구구!!!
폐허가 순식간에 수복되면서도 전혀 다르게 변화했다. 전체적으로 성의 모습을 지녔지만 동시에 번들거리는 검은막이 돔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아아아!!!”
발라쿠가 전율했다. 마신의 은총이 다시 한 번 그에게 부여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육체를 성장시키지는 않았다. 대신에 계속해서 마음 한 구석에서 탈력감을 주던 짜증나는 기분을 해소시켰다.
마신 성현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돔 위에 존재하는 테두리가 백색이고, 내부는 검은색인 〈검은 태양〉이 발라쿠의 굶주림을 지웠다. 다른 마수들의 굶주림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군침을 흘리며 신경질을 내던 마수들이 빠르게 진정되어갔다.
그들중 지상에 남고 싶은 자들은 남았고, 발라쿠의 뒤를 따르며 중앙에 존재하는 거대한 지하계단으로 내려가서 사라졌다.
‘인간들은 결코 이 평야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두 세 번은 토벌을 진행하겠지. 그것을 통해서 이 힘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 그릇의 붕괴를 완전히 막고, 드워프 제국으로 향한다.’
발라쿠의 진짜 목적은 드워프의 멸망이었다.
그들에게 부모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무리해서라도 마신의 힘을 대량으로 받으며 던전을 키우고, 힘을 길렀다.
타고난 소서러이며, 태어나면서부터 마신 성현의 은총을 받고 태어나는 것이 오우거였다. 그럼에도 더 큰 힘을 원한 이유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워프의 화약과 강철에 무참하게 살해당한 장면을 보고 그것을 잊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인간들도 날 어찌하지 못한다.’
수비를 좋아하고, 지구전이 장기인 인간들이었다. 때문에 토벌이 두세번 실패하면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쿵! 쿵! 쿵!
발라쿠의 발소리가 웅웅 울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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