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1 <-- 에필로그 -->
아크온은 누구보다 먼저 드낙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함께 딸려보낼 생각이었다. 다른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록시 몽펠리에〉는 드낙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였다. 나이는 이제 13세에 불과했다.
조혼(早婚)이 일반적인 세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또한 대부분의 조혼이 형식적인 결혼에 불과하며, 시간이 지나 진정한 의미의 결혼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았을 때, 현대인이 가진 거북함은 자연스레 사라지는 것이기도 했다.
‘눈매가 날카롭네.’
드낙은 록시와 마주하며 이 소녀가 지닌 야망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눈빛만이 아니었다. 식사 시간에도 옆에 큼지막한 외교 관련 서적을 놓고 먹었다.
‘드레스가 왜 저렇게 야해···’
드낙이 시선을 엉뚱한데 두었다. 소녀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야한 옷을 입고 있었다. 드낙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위화감이 심한 옷차림새였다.
‘제기랄. 눈을 어디다가 둬야하냐.’
미칠 노릇이었다. 순풍 산부인과를 찍으려고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드낙은 그럴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 로리콘 새끼들을 다 화형 시켜야 할 것 같은 사상이 곧추세워졌다. 상대는 고작 13살이었다. 조혼이 그저 형식적이라는 소리가 한순간에 쏙 들어갔다.
‘이스핀, 이 새끼! 나한테 구라를 쳐? 조혼이 그냥 일단 결혼만 하고 손만 잡고 가는 거라고 그렇게 아는 척을 하더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도 했다. 조금 더 마음을 다 잡고 왔어야 했다.
아크온은 그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나서서 변호해 줄 정도로 동생을 예뻐했다. 그 덕에 드낙 또한 가벼이 넘겼다.
“잘 부탁드려요. 아내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형식적인 말만 오고 갔다.
“취미가 뭡니까?”
“요즘에는 백금 왕가의 고대 외교에 대해 관심이 있어요. 남부는 애초에 플래티넘의 힘이 강했지만 서부의 귀족들을 설득하는 것은 힘들었는데···”
드낙은 취미를 물었지만, 들려오는 것은 소녀답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록시는 주절주절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관련 분야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는 듯했다.
점심시간이 수업 시간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커리어를 생각하는 여자를 만난 기분에 휩싸일 정도였다.
“군사력이 있는 서부인데, 외교로 이기다니!”
드낙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외교를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는 드낙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이었다. 그는 불파겐이며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 가문의 후예였다.
“힘만 있다고 지배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록시! 무례한 발언이다.”
아크온이 호통을 쳤다. 록시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죄송해요. 결코 불파겐 가문을 흉본 것이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 또한 외교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외교로 볼 수 있죠. 불파겐 가문의 세력은 나약하며 다른 이들과 친하게 지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낮추세요. 이제 곧 작위를 받을 분이시며, 제 남편 되는 분 아닌가요?”
“아내를 가볍게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드낙은 여전히 하오체가 어색했다. 차라리 존대가 좋았다.
“머리끝까지 올라갈 수 있어. 조심하라고. 드낙, 내 여동생이지만 어디서든 한자리를 할 아이야.”
“전 숙녀에요. 아이가 아니라···”
“레이디 록시, 입에 묻은 것이나 닦으시지요.”
아크온이 농담을 건넸다. 록시가 서둘러 냅킨으로 입을 닦았지만 무엇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하하하.”
드낙이 작게 웃었다. 록시와의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딸 같은데.’
젖살이 빠지지 않고, 배고 볼록한 체형을 지니고 있었기에 드낙은 성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여성스러움보다는 풋풋함과 순수함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드낙은 록시가 말하는 것을 경청하며 아빠 미소를 지을 지경이었다.
아크온은 드낙이 변태적인 성향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가졌다고 해도 여동생을 결혼시켰을 것이다.
감정이 깃든 외교는 가문을 부흥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굶어죽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더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칼같이 잘라내고, 목을 졸라 죽이는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귀족의 소양이었다.
어린 숙녀가 입기에는 지나치게 앞이 파이고,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드낙은 도리어 음식에 시선을 두거나, 아크온과 록시 사이의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다.
누구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런 숙맥 같은 행동 때문에 아크온과 록시는 이 점심시간을 누구보다도 즐길 수 있었다.
‘열여섯 살이라고. 전쟁터에서는 그 나이를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용맹했던 것이 드낙이었다. 잠자코 있을 때도 자연스레 풍기는 맹수의 기세는 착 가라앉아있음에도 시선이 가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번 트롤 토벌에서 어디에서건 시선을 받은 것이 드낙이었다.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도 불파겐에 대한 것이었다.
저녁에는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기에 파티를 벌였다.
“감사하오. 잊지 않겠소.”
드낙은 선물 공세에 파묻혀서 인사를 하기 바빴다. 수금날처럼 그가 앉은 테이블의 옆에는 온갖 상자가 가득했다. 이스핀은 양피지로 열심히 명단을 쓰기 바빴다. 술 한 모금, 음식 한 점도 입에 넣지 못했다.
‘미치겠다!’
때때로 몽펠리에의 가신이 교대를 하며 도와줬기에 이스핀은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교대를 받지 않았다면 진땀으로 범벅이 된 채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선물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토치라이트 가문의 선물이었다. 아예 궤짝을 하인들이 놓았다. 그라돈 토치라이트는 목례를 하며 사과까지 했다.
“일각수 고기 건은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항상 군량에 허덕이고 있어서 눈에 뵈는 것이 없었소. 저것은 소소한 사과의 의미요.”
“뭘 저런 것까지 다···”
묵직하게 내려와졌기에 드낙은 순식간에 토치라이트 가문에 대한 앙금이 사라졌다.
“영웅에게 첩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내년에라도 생각이 있다면 연락을 줬으면 하네만.”
“저야 바라던 바요. 제 영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게 토치라이트 가문 아니오?”
“하하하. 이거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몰랐소.”
야수 기사가 잔을 들어 올렸다. 드낙이 부딪쳐주었다. 그는 오직 그것을 위해서만 왔는지 성큼걸음으로 순식간에 파티장을 나가버렸다.
‘토치라이트 가문이 겁을 크게 먹었구나. 파티도 안 좋아하는 사람을 여기에 남겨둘 정도니.’
무엇보다 야수 기사는 고위 기사 중에 하나였다. 그런 그가 내키지도 않는 싸움이 아니라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드낙을 두려워하는 토치라이트 가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드낙은 또한 이곳에서 삼왕자, 길게이 플래티넘과 다시 조우하기도 했다.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표하는 드낙을 만류하며 친근하게 스킨쉽을 하며 드낙의 상체를 다시 일으켜 세운 그가 말했다.
“하늘도 떨어뜨리는 것이 불파겐 아닌가. 내성지역에 줄줄이 늘어선 트롤의 부산물을 보았네. 단단한 산에 숨어든 트롤을 모조리 토벌하였다고.”
“예. 겨울 내내 홀로 죽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즘 컨디션이 좀 안 좋기도 합니다.”
“저런! 몸은 괜찮나?”
서로 알고 싶지도 않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드낙은 일부러라도 왕자에게 존대를 했다. 길게이는 그 모습에 짜릿함을 느꼈다. 귀족과 왕족을 다르게 대우해주는 드낙 때문이었다.
‘겁을 먹었나? 시간을 벌기 위함인가? 여하튼 좋다.’
나쁘지 않았다. 불파겐이 일부러라도 그들이 잘 하지 못하는 분야에 손을 쭉 내밀었는데 바로 못을 박기에는 백금 왕가의 현 상태는 위태로웠다.
“다름이 아니라···”
길게이가 오우거에 대해서 말하려고 할 때, 게실리안 파이룬이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옆에 지팡이를 쥐고 계신 여성분은 왕자 전하의 파트너로 보이는데, 맞소?”
“뭐라!”
길게이가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그의 옆에 있던 여자가 움츠러들었다. 지팡이를 쥐고 눈을 감은 채로 있는 것으로 봐서 〈장님〉인 듯했다.
“···그녀는 나의 파트너가 아닐세. 드낙 경, 소개해주겠네. 〈제 32 왕녀〉이자 자네의 첩이 될 〈레이시아 플래티넘(Reycia Platinum)〉이네.”
“반갑습니다.”
그녀는 딴쪽을 보며 말했다. 이에 드낙이 한 걸음 다가가서 말했다.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공주 전하.”
“공주에게는 전하라는 말을 쓰지 않네.”
길게이 플래티넘이 매정하게 말했다. 이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시아 공주께서는 눈이 불편하신 듯합니다. 이 시끄러운 곳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녀의 말은 다른 곳에서 떠들고 있는 귀족들 때문에 들리지도 않았다. 이에 드낙이 가만히 술을 홀짝이며 록시에게 눈이 고정되어있는 아크온에게 손짓을 하자 옆에서 사주를 경계하던 시중이 아크온의 어깨를 톡톡 건들며 귓속말을 했다.
그의 시선이 그제서야 드낙에게로 향했다.
짝짝!
아크온의 박수소리에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고,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가벼운 연주가 끝나고, 귀족들의 말은 다시 줄어들어 소근거림으로 이어졌다. 곧 다시 시끄러워지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드낙 경이 벌써부터 공주를 위해주는 것이 눈에 보여서 아주 좋군.”
“과찬이십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할 말이 있네. 때가 되면 찾아와줬으면 하네만.”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길게이는 그 길로 레이시아를 버려두고는 파티장을 나갔다. 이곳에 자신의 편이 없었기에 한시라도 있고 싶지 않았다.
파티에 억지로 참석해야 했기에 겸사겸사 레이시아를 드낙에게 소개해준 것이다.
‘〈백금 왕가〉가 〈결함품〉을 나에게 주는구나.’
드낙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레이시아에게 동정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칼로 심장을 쑤셔 박아도 저런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모습이었다.
“이, 이야기 나누시오···”
귀족들이 괜히 이 소리 저 소리 하지 않고 물러갔다. 테이블에 그녀를 앉힌 드낙이 이야기를 대부분 주도했다.
“같이 온 시녀나 그런 분들은 계십니까?”
“왕성에서는 3명이 저를 도와줬습니다.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모두 헤어졌습니다. 급여를 내는 것이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런···”
드낙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장님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것이 드낙이었다. 현대에서 살면서도 시각장애인을 평생 단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이다. 봉사활동? 먹을 쌀 벌기 바빴던 것이 그였다.
“이곳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북부 귀족 또한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공주를 대우할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드낙의 시선이 이스핀에게로 향했다.
“예? 뭘 어떻게, 제가 어찌···?”
장님을 상대해야 했기에 이스핀 또한 버벅거렸다. 당황한 것이 역력했다. 머리가 딱 굳어버린 것이다.
“레이시아 공주 전하를 도와줄 사람을 붙여달라고 부탁하고 와라.”
“아! 예!”
이스핀이 서둘러 움직였다.
“공주는 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윤기가 있는 은발을 뒤로 넘기며 레이시아가 말했다. 하지만 드낙은 오히려 그것이 그녀와 연결고리를 지닐 수 있다고 여겼다.
“왕족이면 다 전하라고 부르는데, 왜 공주 전하라고 부르면 안 됩니까? 다른 공주들에게도 그냥 공주라고 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됐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공주 전하라고 부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드낙은 그녀의 사과가 습관적인 것을 깨달았다.
“취미가 뭡니까?”
“독서나 자수··· 그림도 그리는 걸 좋아하고, 악기도 여럿 다룰 줄 압니다.”
레이시아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드낙은 새하얀 그녀의 목에 시선이 갔다가 다시 얼굴로 향했다.
‘어딜 보려는 거냐, 드낙아! 정신 차려라! 이 변태새끼!’
드낙은 음식에게로 다시 눈을 돌렸다. 침묵 속에서 이스핀은 시녀를 두 명 데려왔다. 그러면서도 무신경한 소리를 내뱉었다.
“드낙 님 때문에 보내주는 거랍니다.”
“너 오늘 왜 그렇게 상태가 안 좋냐?”
“예? 아! 그게! 죄송합니다!”
이스핀이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들의 선물을 미친 듯이 받으며 염병할 글자를 쓰다 보니 머리통이 박살 난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연거푸 죄송하는 모습에 레이시아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적은 실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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