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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359화 (358/1,239)

0359 <-- 어둠 -->

“뜨낙! 괜찮으십니까?”

대장쥐를 비롯해서 핏빛쥐들이 투구를 힘겹게 벗으며 새하얗게 질린 드낙을 서둘러 부축했다.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소모를 겪은 드낙은 현기증마저 느꼈다.

그만큼 두려움이 컸다.

상환 날짜가 존재하지 않는 고리대금에 손을 댄 것 같은 감각. 아니, 그것보다 더 했다. 눈앞에 보이는 늪이 깊은 것을 아는데 몸은 이미 그곳을 향해 깊이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

드낙은 부축을 받으며 드러누웠다.

트롤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90마리가 넘는 놈들은 고블린과 다른 몬스터 때문이라도 단단한 산 지하에 당분간 살 것이다. 식량으로 쓰이고 부하처럼 부릴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몬스터도 겨울 때문에 쉽게 도망치지 못할 터였다.

그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전처럼 검은 연기가 그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이게 대체.”

연기가 사라진 깔끔한 모습의 검은 꿈이 드낙을 맞이했다. 그 앞에 항상 있던 툭 튀어나온 팔 대신에 석고상처럼 생기 없는 피부를 지닌 사람이 머리와 상체만 있는 채로 눈을 감고 드낙을 마주하고 있었다.

또한 원을 두르며 검은 꿈에 있는 존재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채로 드낙을 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말을 열지 않았다.

“드디어 만났다. 나의 챔피언아.”

단어 자체는 감정이 깃들어있었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무미건조했다.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딱딱한 말이었다. 어조 자체도 돌처럼 굳은 것처럼 보여서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사람 같지 않았다. 마치 로봇 같았다.

“······”

꿀꺽.

드낙은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정도였다. 손끝과 발끝이 이상하게 저려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중립신(中立神), 엘 마르토 카사다민이다. 전혀 짐작하지 못했나?”

그 물음에 드낙은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또한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어떤 대답을 들려줘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학 새내기처럼, 갓 전입 온 이등병처럼, 이정표 하나 쥐고 있지 못했다.

“긴장하고 있군. 그럴 만도 하지. 수없이 많은 인연을 지나고 너를 통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나 또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며 중립신이 손을 들어 올렸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나의 챔피언이다. 박호훈이든, 드낙이든 전혀 상관없다.”

그 말에 드낙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진짜 신입니까?”

“진짜 신? 네가 말하는 진짜 신은 어떠한 신이냐.”

“전지전능하고···”

“한없이 따뜻한?”

“······”

드낙은 그 이상으로 말하지 않았다. 저 무감정한 존재가 사랑을 알 것 같지는 않았다.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慈悲)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진짜 신은 아니지만, 나는 인신(人神)들과 인간(人間)들을 이끈 대신 중의 대신이다. 그것이 너에게 중요하지 않겠느냐? 다시 지구로 돌아가 수많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고 말고. 애초에 내 동생이자 빛의 인신인 프레이는 지구로 향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말문이 트이자 드낙은 하나씩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다가 배신당하여 죽었습니까?”

“서로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떤 의견이 달랐습니까?”

“미래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중립신이 손을 조금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드낙은 환상을 경험했다.

후우우웅···쾅!

시퍼렇게 불타는 유성이 땅에 떨어져내렸다.

쿠구구! 주르륵!

땅이 서로 일어나며 부딪치며 용암이 솟구쳤다.

화산재로 하늘이 뒤덮이고, 곳곳에서 푸른색의 불꽃을 태우는 죽은 것들이 앞으로 진군했다.

중립신의 목소리가 드낙에게 들려왔다.

“신들의 땅을 지배하면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때문에 이곳은 신들의 땅이라 불리면서도 보이는 모습은 파멸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일군 것이 앞에 보이는 언데드들이다.”

[우하하하! 어디에 숨었느냐! 어디로 도망가느냐!]

푸른 불꽃을 뿜으며 거인의 손뼈가 튀어나와 땅을 깊게 쥐며 지하에서 튀어나왔다. 용암조차도 그 뼈를 녹이지 못했다. 손뼈로 이루어진 다리는 거미처럼 숫자가 많았다. 온갖 휘황찬란한 장신구로 치장된 다리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마법 아이템이다!’

드낙은 어렵지 않게 그것에 깃든 초월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압도적이었다. 보석의 크기도 집채 만했고, 그 안에 깃든 사령마력은 대해(大海)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했다.

해골로 이루어진 몸체에서는 계속해서 주문이 흘러나왔고, 수십 개에 달하는 거대한 팔에 쥔 지팡이는 온갖 기적을 이루어냈다.

“〈죽음의 세바리악〉의 등장으로 언데드 세력은 모든 종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 직전에 단 한 번의 실수로 단숨에 수많은 종족신들에 의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쩌적!

수많은 빛이 거대한 산과도 같은 언데드 리치를 죽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이야기를 빨리 진행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놈과의 전투로 인간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고, 인신들은 신들의 땅을 떠나게 되었다.”

“아!”

환상에서 깨어난 드낙이 현기증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어마어마한 정보가 그에게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에 불과했고, 한 호흡만에 진정되었다.

괴이한 일이었다.

“왜, 이런 걸 저에게 자세하게 말해주시는 겁니까?”

“네가 나의 챔피언이기 때문이고, 너는 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입니까?”

“나중에 가면 중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지금은 중요하다.”

오히려 그 평가는 드낙이 엘 마르토 카사다민에게 신뢰를 가질 정도였다.

“이야기를 돌려서 인신들은 새로운 인간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신들의 땅으로의 진출을 꿈꿨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중립신께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신들의 땅은 인신들에게는 기회의 땅이었지만, 인간들에게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그곳으로 다른 차원의 인간들을 내모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지.”

〈나쁜〉, 〈사악한〉 등의 단어가 아니라 어리석다고 말하는 중립신의 말은 드낙에게 이상하게 들렸다.

‘인간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이 시작하여 그곳을 인간들을 위한 〈인간의 땅〉으로 만들자고 했다. 우리들의 존재는 인간들을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신 거군요.”

“설마 내 동생이 그것도 빛의 인신이 뒤에서 칼을 찌를 줄은 꿈에도 몰랐지.”

분노할만하고, 증오할만하며, 감정이 격해질 수 있는데도 중립신은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저 드낙에게 이 정보를 건네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왜 접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챔피언이 되기에는 자격 미달 같습니다.”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겠지.”

그럼에도 드낙은 의심을 접지 않았다.

“절 어쩔 셈입니까?”

“업을 쌓아나가라. 내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럼에도 드낙은 의심을 굽히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생각입니까?”

“나는 이 행성계에 뿌려졌다. 그것을 최대한 엮어내어 그곳을 〈테라(Terra, 흙)〉라 부르며 나의 아들과 딸들을 위한 곳으로 만들 생각이다.”

끝없이 커지는 행성, 테라! 그것은 중립신의 몸이고, 정신이 될 것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풍족하게 살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중립신이 말하는 대로 일관성 있게 〈필멸자들을 위한 땅〉이 될 예정이었다. 그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땅이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신의 땅〉이기도 했다. 물리법칙을 뛰어넘어 부족하면 더욱 크기가 커지는 광활한 대지가 되는 것이 그의 진짜 목적지였다.

그럼에도 드낙은 의심에 빠져들었다.

“진짜 목적이 정말로 그겁니까?”

“믿고 싶어도 믿기 힘들 것이다. 너에게 쥐어지는 증거는 오직 내 말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어라. 내 말이 곧 증거이니라.”

드낙은 그 말에 코웃음쳤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환멸을 느끼게 만드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감정 또한 중립신은 간파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었다. 그것만으로도 드낙은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어감을 느꼈다.

“아, 아악!”

“너를 죽이고 그 육을 내가 취해서 업을 키우는 방법도 있다. 가장 쉬운 일이겠지.”

주먹 쥔 손이 펴졌다.

“헉, 허헉! 헉헉헉!”

드낙이 뒷걸음질 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온몸에 식은땀으로 범벅이었고, 오한에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존재의 소멸은 영겁을 살아온 강력하며 초월적인 존재도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일개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해내준 너를 집어삼킨다면 그것은 인신이 아니라 악신일 것이다.”

“널 대체하는 것도 수월하다.”

중립신이 다시 손을 들어 올려 세파리아스를 가리켰다. 순식간에 세파리아스와 드낙의 영혼이 뒤엉켜서 하나가 될 것처럼 변형되어갔다.

‘으, 으읏···’

드낙은 끔찍함을 느꼈다. 개인으로서 완성되는 인간은 하나의 존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서로의 영혼이 섞여서 하나 되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끔찍한 기분을 선서해주었다.

중립신이 다시 손을 내리자 드낙이 토악질을 했다.

“우웨에에엑!!!!”

안에 것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쏟아내었는데도 바닥은 깨끗하기만 깨끗했다. 정신이 붕괴될 것만 같았다.

“너를 지배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다.”

중립신은 그것을 직접 보여주지는 못했다. 드낙의 정신력이 바닥이 났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미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증거가 아니더냐?”

“마, 맞습니다···”

드낙이 기어들어가듯이 말했다.

중립신은 드낙에게 말을 이어나갔다.

“너를 살려주는 이유는 네가 인간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기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박호훈의 전생은 이곳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너와의 인연에서 나는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다. 너는 그 속에서 훌륭히 성장하여 〈마브로스 리꼬〉마저도 요행이지만 토벌에 성공했다.”

중립신은 드낙이라는 〈평범한 인간〉이 이루어낸 위업을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드낙은 영웅으로 보였지만 엘 마르토 카사다민에게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먼지 같은 존재가 이루어낸 기특한 일이었다.

〈무감정〉한 그조차도 드낙이 사랑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절박함과 버둥거림 그리고 그 사이사이마다 있는 나약함들. 인신(人神)으로 태어나서 오랜 세월을 살아간 중립신에게 새로운 피를 부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는 자격이 있다. 나의 챔피언으로서의 자격 말이다.”

부족하기에 왕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비루하기에 신의 오른좌에 앉을 자격이 있었다. 그것은 모순된 것처럼 보였지만, 중립신이 만들어나갈 〈테라〉에서는 필수적이었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없습니까?”

드낙은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이미 중립신은 자신을 찢어발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겨울 동안 이곳에 남은 트롤들을 죽여라. 악마의 인자가 숨어있는 것들이다.”

자신의 피로 태어난 트롤임에도 중립신의 말은 매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트롤이라서가 아니었다. 이미 중립신은 인신(人神)이라 불리기에 애매했다. 많은 종족들을 자신의 아들과 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모조리 죽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드낙은 또 궁금한 것이 있었다. 중립신은 괴이하게도 드낙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말해주었다.

“널 이토록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유는 업(業)으로 나와 네가 강력한 연결고리로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검은 꿈은 진짜이지만, 가짜이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에서 너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아···예···”

드낙은 중립신이 전지전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을 기점으로 드낙이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의문이 해소되었다. 중립신다운 발 빠른 행동이었다. 동시에 드낙은 그날부터 〈중립신의 챔피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테라···’

이곳에 태어난 모든 이들을 위한 세계. 그리고 부활이 아니라 그 땅이 되려고 하는 엘 마르토 카사다민의 면모는 진실되게 드낙에게 신으로서 인정받을 그릇이었다.

‘무시무시하구만.’

자신의 아들딸이라면서 죽여서 업을 쌓아야지만 중립신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별의 소유도 마찬가지였으며, 다른 곳에 존재하는 행성도 업을 쌓아야지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엄청난 스케일이다.’

드낙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율감에 주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겁을 먹지는 않았다. 오히려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든든하다.’

어떻게든 해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구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이곳으로 지구의 문물을 가져올 수 있다는 소리.’

무엇보다 드낙은 지구의 문물을 다시 접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기대를 가졌다. 물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신의 챔피언이 되었는데 왜 지구로 돌아가나?’

이곳에서 신덕을 보며 영원토록 게임이나 영화 같은 것을 쪽쪽 빨며 살아가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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