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4 <-- 마신장(魔神將) -->
드낙은 조용히 명상하는 일이 많았다. 때때로 몸을 들썩이기도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주 귀중한 경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칠주(七主).’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평야 일기토는 드낙에게 꿀맛과도 같은 경험이었다. 백번 듣는 것도 아니고, 백번 보는 것도 아니고, 백번 체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절했을 때와는 다르게 완벽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세파리아스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효율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세파리아스가 움직이는 행동들을 모두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완벽하게 타인의 운용을 몸으로 시전했기 때문이다.
‘불파겐의 비전의 방향성을 이제 좀 안 것 같다.’
적을 죽이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기사의 비전이다. 그리고 그것이 극점이 바로 〈오거 야크트(Oger Jagd, 오우거 사냥)〉였다.
‘말 그대로 사냥.’
누구보다도 〈비전의 극점〉을 찍은 불파겐 가문은 또 다른 방향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하나의 극점을 얻었음에도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피맛을 본 호랑이처럼 거침없이!
‘그것이 칠주.’
비전 속에 깃든 하나의 구성요소에 불과한 한 동작에 대한 연구.
어떻게 하면 체중을 모든 상황에서 극한으로 운용할 수 있는가?
어찌하면 등 근육, 어깨의 힘, 팔의 근력을 물 흐르듯이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가?
전투에 있어서 변화, 변수에 대한 경우의 수는 정확히 몇 개인가?
갑옷을 믿고 서로 충돌함에 있어서 이득을 보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 수많은 자잘한 물음들을 하나씩 정립시켜 만든 것이 칠주였다. 비전을 숲이라보고 그 내부 구성요소에 대한 연구의 완성.
눈을 뜬 드낙은 검은 꿈속에서도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최근에는 무아지경처럼 무(武)에 빠져들고 있었다.
자신만 볼 수 있는 답안지를 옆에 두고 수능을 치는 것처럼 재미가 났기 때문이었다.
“칠주를 재정립하였지만 오히려 무거운 벽에 부딪쳤다는 가주들이 많았다.”
보이지 않는 벽!
천재들만이 느낄 수 있다는 그 무형의 장벽을 뚫기 위해서 불파겐은 그 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두 가지의 〈수련용 비전〉을 개발했다.
“〈이강(肄講)〉! 너는 오늘부터 이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수련용이지만 강력한 비전이기도 하다.”
〈에이너 클린제(Einer Klinge, 하나의 검)〉
단순한 찌르기 3연격이었다. 하지만 그 궤적과 방향성은 명확한 지향점을 지니고 있었다.
상단에서 중단, 중단에서 하단, 하단에서 상단으로의 찌르기.
“찌르기는 한 점을 노리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 점을 생각하며 수련에 매진하다보면 실전에서도 어찌 사용하면 좋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집중〉이 잘 되는 비전 같아 보였다. 혹은 그에 대한 연습 일지도 몰랐다.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되지만 썩 좋은 비전은 아니었다. 상황적인 측면에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쥬사멘발룽(Zusammenballung, 결집)〉
“칠주의 모든 것을 사용하는 비전이다. 총 7개의 묶음이고, 하나의 묶음마다 343개의 동작이 깃들어있다.”
“엉? 몇 개?”
“다 합치면 2401개군. 아무리 무능해도 10년 내외로 배울 수 있다.”
“뭐? 10년?!”
드낙이 까무러치듯이 펄떡 뛰었다. 세파리아스는 그럼에도 무덤덤했다. 그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드낙이 물었다.
“그거 다음도 있는 거야?”
“내 대(代)에서 모든 것을 합일 시킨 것이 있다. 합(合)의 묘리이며 〈부딪침에 어긋남이 없다〉라는 것이 주요한 수련 목표다.”
세파리아스는 그렇게 말하며 불파겐의 핏줄들이 자신을 부르던 말을 뱉었다. 추억 때문에 흘리듯이 말한 뉘앙스를 풍겼다.
“〈마이스터 와흐르(Meister Wahr, 達人 眞)〉···그곳에 도달하자마자 가문이 멸망했지. 아이러니하게도.”
무의 극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육체적으로 오를 수 있는 최강의 경지였다.
“그곳에 도달하기 전에는 엘프를 잡을 생각도 안 하는 것이 좋다. 영혼과 마력으로서 완성된 종족인 엘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이다.”
드낙은 쥬사멘발룽을 베우는데 애를 먹었다. 에이너 클린제의 경우에는 단순해서 오히려 누구보다 더 빨리 수준급으로 올라섰지만 〈결집의 비전〉의 경우에는 달랐다.
“머, 머리가 안 따라가는데.”
“병신아. 몸에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어눌해도 한 동작을 반복하지 말고, 끝까지 완성시켜라.”
한 번에 2401의 동작을 다 해야 했기 때문에 검은 꿈에서만 수련할 수 있었다. 짧게 끊어서 반복하는 것을 세파리아스가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하라는 대로 해야겠지.’
*
‘느낌이 좋지 않아.’
수도의 점성술사들의 관측이 이루어지고 그 정보가 북부 전선으로까지 이어졌다. 모든 것이 짓뭉개진다는 흉악한 점괘였다.
“어명이 떨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바로 다음 날 메세지 마법을 통해서〈최소한으로 협약하여 물러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길게이 플래티넘〉은 결국 먼저 화친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고, 사절단이 몽펠리에 성으로 향했다.
“들어오지 못한다!”
“무, 무례하다!!!”
사절단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10명의 문인들이 바락바락 온갖 논리로 핍박했지만 병사는 귓등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북부 귀족들이 나와서 턱짓을 했다.
“먼저 시작하고 먼저 고개를 숙이다니, 이렇게 줏대가 없을 줄이야.”
모욕적인 언행도 거침없이 일삼았다. 뒤에 있는 병사들은 미리 이야기한 대로 낄낄거렸다. 문인들의 표정이 시뻘게졌다. 자신들의 충성을 받는 곳에 대해서 저렇게 대하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수도에서 백금 왕가의 위세는 날아가는 드래곤도 말로 떨어뜨릴 정도였다.
북부 귀족들이 조금만 스리슬쩍 지랄을 한 것만으로도 노발대발이었다. 씩씩 거리는 소리까지 들리자 도리어 그 반응에 북부 귀족들의 빈정도 상했다.
“먼저 찾아온 객의 신분으로 지금 그 태도는 무엇이냐! 돌아가라!”
“왕자 전하의 말씀도 안 듣고 우릴 쫓아보내겠다는 소리인가!!!”
스르릉!
한 귀족이 검을 뽑아들자 다른 귀족들도 검을 뽑았다. 그 모습에 문인들이 뒷걸음질 치고는 큰 소리만 뻥뻥 치면서 도망갔다.
“문인이 힘을 쥐니 천지를 모르고 까부는구나!”
퉤!
귀족 중 하나가 침을 뱉었다. 더러운 기분을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위험 속에서 제대로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뻗대는 꼴을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에 근육만 든 것들! 크게 후회하게 해주마!”
큰 소리를 뻥뻥 치던 문인들 10명은 모조리 참수당해 몽펠리에 성으로 전해졌다. 이를 전하는 문인은 북부 귀족들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사람을 죽임으로써 길게이 플래티넘이 화해 무드로 돌아서려고 한 짓이었다. 물론 이 문인도 성문에서 대화를 나눠야 했다.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서로 겨울에 병사를 동원하는 것은 힘들고 고된 일 아니겠습니까. 저희 왕자 전하께서는 시민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것이 괴로워 오늘의 일을 후일로 미뤄두고 싶어 하십니다.”
“확실하게 매듭짓지 않고, 뒤로 미루자고? 하하하. 그럴 수는 없네.”
“시민들의 고통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미 병사를 물리고 서있는 제식만 갖추고 있는 자들로 속이고 있었기에 북부 귀족들은 태평했다. 몇몇 이들은 기만을 위해서 시민을 까기도 했다.
“버러지 같은 잡초 따위 몇 죽는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왕자가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그는 시민의 왕이지 귀족의 왕은 아닌 듯하군.”
“그 말씀은 대단히 지나치십니다!”
문인이 발악해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더 조롱만 당했다.
“···또한 금화 5만닢을 배상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시지요.”
“그럴 수는 없다. 백금 왕가의 지금 행태는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다. 어찌 그리 오만하게 전쟁을 일으키고 쉬이 그것을 덮으려고 하는가? 돌아가라!”
“먼저 시작한 것은 제퍼 플래티넘이고, 백금 왕가다! 배상을 이야기하기보다 스스로 나서서 사과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치적 패배를 두려워한다면 왜 먼저 손을 건네려 하는가! 보면 볼수록 어리석다!”
교섭은 단번에 끝이 났다.
협상 결렬 이후 3일 만에 막강한 서부의 전투 요새인 〈드래곤 로드 성채〉가 함락되었다. 백금 왕가의 모든 전력이 서부로 집중되어야 했고, 길게이 플래티넘은 별 수없이 4일을 더 기다려서 수도에 있는 〈제퍼 플래티넘〉을 압송(押送)하여 이곳으로 데려왔다.
몇 번의 연락 이후에 평야에서 귀족들과 왕족 몇과 가신들로 이루어진 원탁 회의가 이루어졌다. 탁 트인 곳에서 원탁만 덩그러니 있었다.
“읍! 으읍! 흐으! 읍!”
제퍼 플래티넘은 재갈이 물린 채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본래라면 얼굴도 천으로 덮어야 했지만 신원확인을 위해서 벗은 것이다.
“확인되었으면 다시 덮어라.”
“예!”
가신이 누더기로 된 주머니로 얼굴을 덮었다.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었고, 더럽기 짝이 없었다.
‘쯧. 애초에 말이었구나. 왕족조차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니.’
드낙은 마음이 불편했다. 희생양이 된 제퍼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이다. 그는 본래 밑바닥 계층이었기에 이런 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라 많이 힘드실 것이오.”
3왕자 길게이 플래티넘의 말에 드낙이 툭 내뱉었다.
“백금 왕가보다 더 하겠소? 그 유명하던 쌍두룡의 검은 성문이 오우거에게 박살이 나지 않았소.”
“···!”
길게이의 말문이 턱 막혔다. 떨리는 그 입술은 순식간에 고쳐졌지만 모든 이들이 집중하여 그를 보고 있었다.
“실로 정보력이 대단하시오. 어떻게 이런 상황에 그런 정보를 그토록 빨리 알 수 있었소? 메세지 마법이 닿는 것도 아닌 듯했는데.”
“누구나 한 가지 비수는 가지고 있는 법이오.”
백금 왕가의 현 상태를 초장부터 찍어버린 드낙이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가 훅을 날렸다면 게실리안 파이룬은 온풍을 불었다.
“서로 처지가 안 좋은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소? 왕자 전하께서도 스스로 때가 아님을 알고 있고, 우리 또한 그렇소. 아직도 〈외눈 악마〉의 힘을 각성한 트롤을 토벌하지 못했고, 오우거도 흉악하게 기세를 뻗쳤소. 왕국의 북쪽과 서쪽이 어지러운데 왜 인간끼리 싸워야 한단 말이오?”
“맞소. 하지만 서로 앙금이 남은 채로 헤어지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제퍼 플래티넘을 이 평야에서 처형하여 백금 왕가의 잘못을 풀고 싶소. 드낙 경에게도 내 사과하리다.”
“사과해서 끝날 일이라면 병사를 동원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드낙이 냉큼 끼어들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 말에 드낙이 가장 먼저 북부 귀족들을 챙겼다.
“이번 일에 참가한 가문들에게 금화 1만 닢을 각자 지급하도록 하고, 트롤 토벌을 위해서 금화 3만 닢을 쾌척(快擲)해주시오. 그리한다면 백금 왕가와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 같소.”
“하하. 돈으로 어찌 오해를 푸는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세 치 혀로 놀리는 것밖에 되지 않소?”
몇 번이고 〈검은 회의〉에서 연습한 대로 드낙이 입을 놀렸다.
‘간악한 놈!’
길게이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뿐인가?”
드낙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번 전쟁에 힘을 보태준 북부에 대한 처우고 나에 대한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오.”
“말해보라.”
“버려진 영지에 대한 토지권을 주고, 세금을 30년간 면제해주시오. 또한 백금 왕가와의 화해를 위해서 공주를 첩으로 받아들이고 싶소.”
“처, 첩?!”
길게이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원탁을 쳤다. 첩이라니! 부글거렸지만 대단한 인내심으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좋다. 하지만 전쟁에 참가한 모든 가문에게는 배상을 모두 해주지는 못한다. 가려내어 10가문에게만 배상을 할 것이다.”
나쁘지 않았다. 드낙은 그곳에 속해지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며 양보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오우거 토벌이 끝이 나고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기다리겠소.”
제퍼 플래티넘은 목이 내려쳐졌다. 사형수가 세 번을 내려쳐서 목이 잘려졌다.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터였다.
그것이 북부 전선에 뿌려진 마지막 피였다.
북부 전선에 평화가 찾아왔다. 백금 왕가는 빠르게 철수했고, 몽펠리에 성에서는 3일을 더 두고 보며 사위를 살피고 나서야 귀족들이 기사 마차를 타고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트롤 토벌은 겨울이었기에 불가능했다. 몬스터들 또한 〈단단한 산〉에서 빠져나오지 않을 터였다.
“드낙, 돌아가려고?"
아크온의 말에 드낙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따로 할 일이 있어.”
아크온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이스핀은 〈조용한 계곡〉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고, 드낙은 이를 허락했다. 몽펠리에 성의 내성 창고 하나는 드낙이 들고 갈 것으로 가득했다.
전리품을 두고 드낙은 도노와 카이야만을 데리고 단단한 산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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