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2 <-- 마신장(魔神將) -->
세 번째의 거대한 마법에 〈솟아오른 첨탑〉이 화염에 잔뜩 물든 채 무너져내렸다.
쿠구구구··· 콰아아앙!
어찌나 높은 탑인지, 성을 넘어 그 밖에까지 쓰러질 정도였고,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서 쉽게 사라지지 못했다. 대량의 먼지 속에서 〈싸워라〉는 소리 대신에 〈함께 싸우자〉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퍼져나갔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폐허가 되어가는 곳에서 인간들이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 함성소리는 세상이 주홍빛으로 물들고, 달빛이 중천에 오를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
백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대전. 둥근 원탁에 중심이 파여있는 곳에는 남부 왕국의 국토가 마법으로 선명하게 자리 잡고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수많은 왕족들이 자신들의 가신들을 뒤에 세운 채 갑론을박을 하고 있었다.
“전쟁에 있어서 양면 전선이라니! 이 상태가 보름만 지속되어도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현실적인 군사적 결론을 벌써부터 내리는 자도 있었고.
“누가 그걸 모르는가? 하지만 지레 겁을 먹고 벌벌 떨기만 해서 후퇴만 외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호랑이를 본 개처럼 꼬리를 순식간에 말아버리는 것에 반감을 지닌 왕족도 있었다.
“우리 왕국의 저력을 무시하는 발언이오!”
치사량급 국뽕을 장착한 의견도 있었다. 이들은 끊임없이 가신들에게서 귓속말을 받으며 의견을 나누고, 가신들은 때때로 다른 왕족의 가신과 접촉해서 의중을 서로 확인하기도 했다.
웅성웅성!
탕! 탕! 탕!
원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단상에 있던 가신이 나무 망치로 나무 판을 두드리자 빠르게 조용해졌다. 계단으로 높인 상석에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부 왕국의 왕〉 〈플래티넘 42세〉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그렇게 떠들어도 결국에는 탁상공론이다. 이래서야 플래티넘 왕가의 미래가 훤히 보이는구나.”
“송구하옵니다!!”
모두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재위하고 3년간 쥐 죽은 듯이 인자한 척을 한 플래티넘 42세는 순식간에 돌변하여 반대파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구족을 멸한 피의 왕이었다.
“북부는 언제든지 칠 수 있다. 하지만 서부는 마신의 종자에게 황폐화가 될 수 있다. 서부를 지키는 것이 정론이다.”
“실로 그러합니다! 서부 평야가 황폐화되면 그곳의 기반부터 모든 것이 무너질 것입니다!”
플래티넘 42세가 손을 조금 올리자 다시 조용해졌다.
“허나, 북부 귀족들의 기세를 살려주고 싶지는 않다. 병력을 반절을 빼더라도 대치 상태를 유지하여 놈들의 기를 눌러줘야겠다.”
병력을 뺀다는 소리에 그럴듯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점수를 좀 따내려는 자들도 제법 있었다.
“폐하! 이미 보급이 어지럽게 변하고 있습니다. 저희 왕국은 대규모 보급 작전을 펼친 적이 없어서 모든 것이 위태롭습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또한!”
“제 정보원들에 의하면 많은 이들이 지금 이 혼란을 이용해서 보급품을 착복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왕족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손가락질까지 하며 격하게 반응했다.
“필요하다면 그 인명부를 보여줄 수도 있소!”
플래티넘 42세는 진절머리를 치며 손을 까딱거리자 단상에 있는 가신이 나무 망치를 탕탕탕 두드렸다.
“그에 대해서는 짐 또한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경험 아닌가?”
“맞습니다! 폐하!”
모두가 합일하여 우렁차게 대답했다. 실로 그의 권력이 느껴졌다.
“짐의 개인적인 욕심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북부는 지금까지 강력한 군사력으로 제대로 세금도 내지 않는 곳이고, 〈메디오 성주〉는 허수아비가 된 지 오래다. 괘씸한 것들에게 혹독한 겨울이라도 겪게 해줘야겠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북부가 병력을 빼냈을 때 〈회전(會戰)〉을 걸 생각을 가지겠는가?”
“서로 끔찍한 피해를 낳을 것입니다. 백금 왕가의 정규군은 결코 후퇴하지 않습니다. 서로 피해가 크면 손해를 보는 것은 북부입니다. 역량이 크게 차이나기 때문입니다.”
인구와 자원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것이 현재 백금 왕가의 북부의 차이였다. 국력이 한 곳에 집중된다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다.
남부 왕국의 힘이 서쪽으로 몰리고, 북쪽에서도 일부 병력을 회군하라는 명령이 전달됐다.
메시지 마법이 수 시간 유지되면서 그 소식은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엄청난 마력이 소비되었지만 말보다 빠른 것이 메시지 마법이었다. 지형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완벽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북부전선의 삼왕자 〈길게이 플래티넘〉은 얼굴을 찌푸렸다.
“오우거에 이어서 1만만 남기고 빼라니. 허.”
상대는 점점 병력이 모이고 있었는데 자신들은 오히려 줄여야 했다. 이것은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발레아르 경. 어떻게 보는가?”
“북부는 덤비지 못할 것입니다. 평야에서의 회전은 압도적으로 숫자와 기병에 따라 판가름이 납니다. 또한 저희들은 아직 마력이 가득 찬 〈마법 마차〉가 수십 대나 있습니다. 화력 또한 북부는 감히 회전을 걸지 못할 것입니다.”
“보병과 궁병을 줄이면 될 것 같습니다.”
중보병 5천과 장궁병 3천이 회군을 준비하고 떠나갔다. 1만 8천에 달하는 보급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오우거를 토벌한 전적이 있는 것이 백금 왕가였다.
그 업(業)을 버티지 못하고 목을 자른 왕족은 광전사로 변해 죽임을 당했지만.
*
“지금이 적기(適期) 아니오? 더 추워지기 전에 끝을 내야하오!”
북부 귀족들은 원탁회의에서 열띤 토론을 가졌다. 항상 외적에게 휩쓸리는 것이 북부였고, 그렇기에 북부 귀족들은 싸움을 각오한 이들이 많았다.
“결단을 내려야 하오. 패배한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싸우지 않는다면 더욱 굴욕적인 나날이 계속될 것이오.”
아크온 몽펠리에와 게실리안 파이룬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것은 자신들이 선택해야 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 킹슬레이(Ban Kingslay)〉는 주도적으로 움직였다. 사실상 이 싸움에 가주가 직접 온 것은 킹슬레이 가문 뿐이었다.
“들으시오! 모두! 내 말을 들어보시오!”
“이대로 군대를 유지한다면 보급 때문이라도 많은 시민들이 싸늘하게 길바닥에 널브러져 죽을 것이오. 그들은 우리를 믿고 식량을 내어주고 있소. 백금 왕가의 폭압보다는 많은 세월을 함께 해온 우리들과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오.”
“허나 기병 전력을 이기지 못하면 평야전은 이기기 힘들 수밖에 없소.”
모두 침묵했다. 하지만 드낙이 조용히 일어났다. 붉은 머리카락이 절로 크게 보이자 귀족들이 시선이 모였다. 일어서있던 킹슬레이가 물었다.
“드낙 경, 무슨 의견이라도 있소?”
“내가 한 마디 하겠소. 따르고 안 따르고는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소. 애초에 나는 이곳에 병사도 없고, 지킬 시민도 없기 때문이오.”
스스로를 조금 낮추며 드낙이 침을 삼키고 입에 침을 바르고 발언을 준비했다. 〈검은 회의〉에서는 이미 이런 상황을 시뮬레이션 한 것이 있었다. 특히나 〈흰여우 세린〉의 점성술 때문에 그런 뉘앙스의 상황을 점쳐놓고 회의를 한 것이 〈검은 회의〉였다.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상대는 결코 바보가 아니라는 점이오. 회군한 병사들의 병과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오. 보병과 궁병만 합하여 8천이 빠졌소. 이 말이 뜻하는 것은 평야에서의 싸움을 이미 예견하고 있다는 것이오.”
모든 귀족이 드낙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단단히 준비한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성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오. 현재 모인 4천의 병력은 사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왜냐하면 상대는 공격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저들이 돌려보낸 병과를 통해서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오.”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기만술을 하는 것을 요청하오.”
“하지만 그래서야 언젠가 들키고 말 것이오.”
이에 드낙이 빙그레 웃었다.
“밤마다 성의 뒤로 돌아가서 새로운 가문의 깃발을 들고 서쪽이나 동쪽에서 들어온다면 우리가 계속 힘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여길 것이오.”
북부 귀족들이 서로를 보았다. 제법 표정이 살아났다.
“아예 싸움을 포기한다···”
발상의 전환이었고, 현대인의 유연한 사고 덕분이기도 했다. 아크온은 이 판단이 실로 재밌고,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백금 왕가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상대에서 한 번은 간을 보려고 할 것이 분명하오.”
그런 우려에 드낙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놈들이 소규모로 병사를 보낸다면 홀로 나가 쳐부수고 오겠소.”
하하하!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호쾌한 기세와 발언에 절로 가슴이 뻥 뚫렸기 때문이다. 한 번 그렇게 당하고 나면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다. 또 전면전을 하기에는 저들의 장궁병의 숫자는 고작 1300명에 불과했다.
드낙의 〈너만 보급 소모해 전략〉은 그대로 채택됐다.
북부의 전선은 겨울처럼 꽁꽁 얼어버렸다.
백금 왕가는 북부에게 벌을 준다고 생각했고, 북부는 몰래 밤마다 성벽 뒤로 병력을 빼돌려 자신들의 가문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했다. 몽펠리에 소속의 병사들은 빙 둘러서 다시 돌아오며 새로운 깃발과 새로운 복장 그리고 병과를 달리했다.
때때로 백금 왕가의 경기병이 추격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작은 싸움이 순식간에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었다.
이에는 〈기사왕 드낙 불파겐〉의 100인의 기사를 벤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낙은 때때로 단기로 나와서 고함을 내질러 백금 왕가를 도발했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덤벼라 이 창녀의 자식같은 놈들아! X달린 놈들이 숨어만 있냐! 고개 숙이지 말고 이리 나와서 붙어보자! 계집애 같은 것들아! 너희 부모가 욕하는 상대에게 입 다물고 지내라고 가르쳤더냐!!! 겁쟁이처럼 살라고 말하셨더냐! 하하하하!!”
드낙은 특히나 부모를 들먹거리는 욕을 즐겨 사용했다. 적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이 절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욕은 패드립이지!’
게임에서 배운 진리였다. 몇몇 기사는 분기해서 허락을 받고 드낙에게 덤벼들었지만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모욕적인 욕이었다.
*
호다닥!
흑마법사들이 빠르게 남쪽으로 도망쳤다. 아예 바다로 숨어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발라쿠가 인간들의 성채를 공격하자마자 가짜 흑마법사 키메라를 두고 그대로 빤스런하고 있는 것이 흑마법사들이었다.
“다시는 마신장을 믿지 않겠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개쌉소리에 농락당한 것이 흑마법사들이었다. 명언과 현실이 만나면 시궁창이라는 공식을 그들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달리면서 사냥한 동물들을 이용해서 〈키메라의 알파던〉이 순식간에 탈것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서 마수로 만든 너덜너덜한 탈것을 버리고 새로 갈아타서 또 달렸다.
“언제 성이 함락될지 모르니 일단 무식하게 계속 달립시다!”
“그럽시다!”
〈흑마법사 게페락스〉는 다시 세월의 힘에 기대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다. 지금 시대는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백설산맥에 히드라를 잡은 오크 히어로가 나타났고, 잊혀진 불파겐의 후예가 흉성을 소유하며 역사에 등장했다. 그릇이 파괴될 정도로 마신의 은총을 받은 오우거에···’
그야말로 몇 천년만에 볼 수 있는 영웅들의 집합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 하려고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을 수 있었다.
은둔하는 것이 답이었다.
성을 점령한 마신장 오우거 발라쿠는 찐득한 액체가 된 흑마법사들의 키메라를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아아!!!! 이 비루하기 짝이 없는 흑마법사 놈들이!!!!”
쿵! 쿵! 쿵!
지진이 땅을 뒤흔들었다. 조금 뒤늦게 집 한 채가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키메라 보급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서부의 중앙까지만 도달할 정도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앞으로 성 2개 정도만 정복할 수 있다는 소리였고 발라쿠는 광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릇이 붕괴되어 새하얗던 머리도 생명체를 잡아먹으며 붉게 변했지만 언제 다시 하얗게 변하며, 탱탱한 피부도 쭈글쭈글해질지 몰랐다.
‘이럴 때가 아니다!’
“남은 인간들을 쫓지 마라! 동쪽으로 진격해서 모이고 있는 인간들의 거점만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
“키야아아아아!!!!”
마수들이 목청 높여 발라쿠의 흉포한 기세에 고함을 내질렀다. 혹독한 겨울의 밤바람에도 마수들이 〈우뚝솟은 첨탑〉을 빠져나가 동쪽으로 우직하게 달려나갔다. 발라쿠 또한 똥꼬가 빠지도록 동쪽으로 향했다. 〈키메라 보급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5952자
평추코! 다양한 의견추!
??? : 나를 믿었음? 흑마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