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9 <-- 기사왕 -->
“더 이상은 무의미합니다. 왕자 전하.”
〈황실 기사단장〉 〈불릿 발레아르〉가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볼레티안 기사단〉은 모두 평민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전신갑주를 운용할 줄 알고 정규병도 쉬이 이기는 기사들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은 보기가 힘들었다.
특히나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기토가 이루어졌다. 누구도 채 10합을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백금 왕가의 군세의 사기는 계속해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물론 정규병이었기 때문에 탈영하는 병사는 없겠지만 싸움에 있어서 정신력은 매우 중요했다. 그것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3왕자 길게이 플래티넘〉은 그것을 알면서도 일기토를 계속 진행했다.
“내가 한 말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기사 100명을 아끼기 위해서 왕족이 한 말을 철회한다? 농담이 지나치시오.”
“······죄송합니다.”
“또한 마법을 안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파겐의 진면목을 측정하는데 오늘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없을 것이오. 국지전을 대신하는 것이니 많은 병사도 살아남을 수 있고.”
평민 기사는 어중간한 위치였다. 귀족이라 불리지만 실제로 귀족으로 대우해줄 리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존재했다. 완벽하게 법으로 규정된 〈계급 사회〉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보병을 중보병으로 그것도 트랜지셔널 아머(Transitional armour, 鏡幡甲)를 보급한 것이 백금 왕가였다. 국가의 마법 역량이 늘어나면 인챈트가 기본으로 장착될지도 몰랐다.
3왕자의 눈이 다시 전황으로 향했다.
세파리아스는 왕국 기사를 크게 폄하했지만 사실 그것은 그의 추억 보정 때문이었다. 가슴 아픈 일도 시간이 흐르면 그리워지는 법이었다. 흑백 사진이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추억의 감각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모든 면에서 과거보다 상향 평준화가 일어났지만 드낙의 뛰어난 육체 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우오오오오오!!!!”
280cm에 달하는 그레이트 소드를 중단 찌르기 자세를 한 채 마법을 통해서 돌진하는 왕국 기사는 호쾌했다. 특히나 붉은색의 바람의 강화 마법이 적용되어있어서 그 속력은 인간의 속력이 아니었다.
세파리아스는 피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앙!
섬뜩한 충격과 함께 그레이트 소드가 그대로 박살이 났다.
〈강철이 흐르는 강(Steel flowing river)〉은 오우거 슬레이어를 위해서 드워프들이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을 강철에 담은 것이 스틸 플로잉 리버였다.
보검 중의 보검이었고 신화 속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전설적 물건이었다.
그 어떤 물리적 충격으로 부술 수 없는 것이 물이었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의 충돌이기도 했다.
엄청난 힘을 맞받아치는 것만큼 충격량을 크게 높이는 것이 없었다. 상대 기사가 마법을 사용해서까지 돌진력을 높였기에 보여줄 수 있는 광경이었다.
뿌득!
그 대가는 물론 컸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오른 손목이 순식간에 피멍이 들며 관절이 고통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렇게 피부와 내부 혈관을 터트린 피는 순식간에 주변을 재생하며 사라졌다.
트롤의 재생력이었다.
휘릭! 팡!
검을 한 번 빙글 돌리며 비전, 〈엘라스티쉬 제스트렁(Elastisch Zerstorung, 탄력적인 파괴)〉 사용해서 허공에 파공성을 터트린 세파리아스는 충격으로 손을 덜덜덜 떨고 있는 기사의 투구를 올려쳐서 벗겼다.
“젊다.”
30살이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그 말을 모욕으로 들었는지 고함을 내질렀다.
“죽여라!”
말이 끝나자마자 두개골이 박 터지듯이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피와 뇌수가 퍼뜨려졌다. 온정 따위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투고, 전쟁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미화할 수 없는 잔혹한 행위였다. 그러나 그 진실과는 반대로 극명하게 편이 갈린 이 간단하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는 환호성이 떠나질 않았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흑백으로 나누어진 전쟁을 사랑했다. 정치는 추잡스러울 정도로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낙의 바보 같은 짓을 보며 사실은 인간이 잡스럽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하게 되었다.
‘깔끔하게 정립하려고 한 것이 내 실수가 아니었을까.’
그 깔끔한 흑백은 결국 〈백금 왕가〉와 〈불파겐〉을 명확하게 나누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100인의 기사를 모조리 쳐죽인 평야는 을씨년스러웠다. 백금 왕가 쪽에서는 그 시체 속에서 문인을 보내어 불파겐의 후예를 인정해주었다.
물론 작위를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반역을 한 귀족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엄연히 백금 왕가를 향해 칼을 겨눈 핏줄이었다.
“또한 예기치 않게 흥분하여 왕자 전하의 말씀과 백금 왕가의 의도를 더럽힌 문인을 대신해서 하사품을 내려 상한 마음을 다스리려 하신다.”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작은 함이 앞으로 나왔다. 궤짝이라기엔 너무 작았다. 하지만 백금으로 된 것만으로도 금화 1000닢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정도의 재력을 지닌 상인이 이것을 살지는 미지수였다.
드래곤 두 마리가 포효를 하고 있는 장식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고, 초록색의 사파이어가 굵직하게 모서리마다 1개씩 박혀있었다.
세파리아스는 함을 받아들였다. 버려진 영지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내용물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탐욕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길로 몽펠리에 성으로 되돌아갔는데, 많은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드낙의 이름과 불파겐의 이름을 외쳤다.
“기사 중의 기사!”
“기사왕 드낙 불파겐!”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사 100명을 홀로 죽였다. 기사 중의 기사이니 기사왕이라는 표현도 쓰일만했다. 그러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드낙 불파겐을 옹호한다는 것을 들은 이상 이미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백금 왕가 진영〉에서는 곧바로 원탁회의에 들어갔다.
100번의 일기토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두 가장 실력이 좋은 〈불릿 발레아르〉의 판단을 기다렸다.
“기이합니다. 특히 칸세이르 경의 싸움에서 정면충돌한 것을 보십시오. 갑옷에서 피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에도 검을 빙글 돌리며 불파겐의 비전을 사용하여 건재함을 드러냈습니다.”
“치료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건가?”
“첩보에 의하면 드낙 불파겐이 입고 있는 갑주는 파이룬의 직계 전신갑주입니다. 치료 마법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장신구에 담은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기에는 장신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더 뛰어난 혈통이 되었다는 겁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토록 개량하려고 했던 백금 왕가의 기사들은 변변찮은 고위기사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데.”
삼왕자가 혀를 찼다. 마신장의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얻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실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이대로 진행하면 전세가 어찌 될지 모르게 되는데.”
보급의 한 줄기를 댄 귀족의 말에 삼왕자가 눈을 부라렸다. 〈불릿 발레아르〉가 끼어들어서 발언했다.
“국지전은 물론이고 전면전도 적극적으로 나서면 안 됩니다. 차라리 북부 귀족을 압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계속 말해보라.”
황실 기사단장이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이어나갔다.
“당초 계획한 대로 움직인다면 병사가 반절 줄어들었을 때, 저희 쪽에서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할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대치 상황의 장기전을 통해서 그럴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보급은 어찌하려고 하시오? 점점 줄어들 것이오.”
많이 죽을 것을 예상했기에 1만 8천의 대군이 이곳에 몰린 것이다. 죽어야지만 보급이 유지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보급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수송량과 소비량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간 모은 보급이 떨어지면 순식간이었다.
“그전에 북부 귀족이 포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가져온 공성 병기를 통해서 몽펠리에 성을 계속해서 두드린다면 그들은 드낙 불파겐을 앞장 세워서 협약을 맺으려 할 것입니다.”
“수도로 데려가지는 못하겠군.”
“하나를 지키면 하나를 잃는 법입니다. 왕자 전하.”
길게이 플래티넘이 조금 고민했다.
“불파겐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고 결정해야 하는군.”
“그렇습니다. 왕자 전하.”
그날 밤부터 공성 병기가 몽펠리에 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주먹만 한 반들반들한 돌이 발리스타에 장전되어서 그대로 쏘아들어갔다. 포물선을 크게 그린 소형 발리스타는 성벽을 지나 집 지붕을 부수고 떨어졌다.
후우웅, 텅!
대문짝만한 돌덩이가 성벽에 부딪쳐서 굴러떨어졌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응사하라!”
성벽 위에서도 공성 병기를 쏘았지만 그 수준이 백금 왕가의 것보다는 열악할 수밖에 없어서 닿지도 않았다.
과학기술은 결국 돈으로 결정되는 법이었다.
콰앙!
“으아악!”
성벽이 흔들거렸고, 병사가 그대로 떨어졌다. 몽펠리에 성의 사제에게 그대로 이송되었다. 집에서 떨어지는 석공도 무시무시했다.
“저들은 〈마법 마차〉를 가지고 있다. 지금 마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아크온은 버틸 것을 명령했다. 사람들은 북쪽으로 모두 대피시켰다. 병사들은 적의 별동대를 염두에 둬야 했기에 소수만 성벽을 지켰다.
후우웅, 쾅!
후두두둑!
크고 작은 돌들이 흉악하게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마치 결단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누구 하나 그런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합의 가장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하나가 될 때다.’
*
“구웨에에에엑!!!”
피부가 시꺼멓고 바퀴벌레처럼 반들반들한 길쭉한 지렁이 같은 몸을 지닌 마수가 산발한 여자의 얼굴에서 검은 액을 토해냈다.
달리던 경기병이 그 액에 맞자 그대로 균형을 잃었다. 검은 액의 무게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찐득하기도 해서 쓰러져서는 일어서지도 못했다.
콰드득!
마수 〈오물 악귀 지렁이〉가 버둥거리는 인간을 잡아먹었다. 뼈를 씹듯이 오도독 소리를 냈다.
“달려라! 달려! 산개해라! 산개애애애!!!!”
블랙 드래곤의 깃발을 쥔 순찰대장이 소리를 지르며 동쪽으로 내달렸다. 서부에서 시작된 마수들의 침공은 겨울 바람이 불어오자마자 시작되었다.
“히히힝!”
말이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땅에서 갑자기 슬라임 같은 것이 튀어나와 다리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진흙 색깔을 지닌 슬라임 몸체를 지니고 내부에 해골이 들어가 있는 마수 〈진흙 해골〉이었다.
버둥거리는 인간이 숨을 쉬지 못하고 죽었고, 그건 말도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은 경보병은 수 기에 불과했고, 그들은 사방팔방 퍼져서 곳곳의 마을을 방문하여 가장 서쪽에 있는 〈우뚝솟은 첨탑성〉으로 향했다. 남서쪽에 위치한 이 성은 〈백금 왕가〉의 위세를 위해서 지어진 성이었다. 남서쪽의 영주들의 토지를 빼앗고 만든 기념비이기도 하였다.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지쳐 쓰러진 말에게서 빠져나온 기수가 병사에게서 물을 얻어먹었다. 하지만 먹자마자 토했다.
“웨에엑!”
몸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말이 버텨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정도로 내달려왔다. 기절하여 반나절 뒤에서나 〈성주 벨렌 하이타워〉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마수의 침공?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고통이 없는 마신의 광신도들이었지만 그들 또한 생명체였다. 〈던전〉이 아닌 곳에서는 뭐라도 먹어야지만 육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못해도 10일 내에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검은 물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땅도 오염되듯이 검었습니다〉.”
기수는 평야를 물들이는 검은 핏줄 같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0일, 오우거의 크기 등이었다.
“오우거는? 목격했느냐?”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엄청난 놈이었습니다. 이곳의 첨탑과 비슷한 크기입니다.”
“잘 못 본 것이 아니고? 그런 마신장은 책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정말입니다. 〈무너진 산〉을 지나는데 머리가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허어···!”
첨탑에 마력이 번쩍이며 〈메세지 마법〉을 유지시켰다. 하루를 유지시켜서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성을 지나고, 또 지나서 순식간에 남부 왕국의 수도로 이어졌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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