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7 <-- 기사왕 -->
문인(文人)의 등에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모든 것은 왕자 전하의 명대로 하는 것이었지만 상대는 불파겐이었다. 저 사자의 갈기와도 같은 붉은 머리카락은 피를 듬뿍 먹은 것처럼 보였다.
인간은 시각 정보에 80% 이상을 의존하기 때문에 더더욱 공포감에 물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인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냐! 왕족을 능멸하고 고개 숙이는 것이 부당하고 여기는 것인가!”
귀족 하나가 나서서 중재 혹은 반박하려고 하기 전에 드낙이 몸소 일어나 문인에게 다가갔다. 그것을 야수 기사, 그라돈 토치라이트가 만류했다.
“대전에서 피를 보는 것은 좋지 않소.”
“내가 무슨 짐승이오? 저리 약한 사람을 어찌 벨 수 있겠소.”
그 말에 그라돈이 비켜주었다. 문인은 드낙이 가까이 다가오자 뒷걸음질 치다가 길게 늘어진 자신의 옷을 밟아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습이 실로 범 앞의 사슴이었다.
“고, 고맙소.”
드낙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엄청난 힘에 문인이 쭈그러들 듯이 말했다.
“계속 말해보시오. 왕자 전하와 백금 왕가가 나에게 전하는 귀중한 말씀 아닌가?”
“여, 역사의 뒤안길에 있어야 할 망령이 다시 나올 리 없고 녹색의 눈동자도 아니니 사칭이 분명하다. 그러니 응당 항복하고 왕족 모욕죄를 인정하고 수도로 가서 법의 판결을 받으라!”
“하하하. 그럼 이 붉은 머리카락은 무엇인가?”
“염료로 물들인 것이다!”
“어차피 그것을 증명하려면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이렇게 나를 도발해도 소용이 없소. 힘만 센 것이 불파겐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오.”
침착한 드낙의 모습에 모든 귀족이 경청했다. 그는 잘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거짓일 수 있지. 그렇기에 왕자 전하께서는 그대가 불파겐이라는 것을 증명할 자리를 마련해주었소. 그 은혜는 하해와도 같고, 왕족을 모욕했다는 것을 제쳐두고 반드시 거쳐야 할 증명이니 지금 상황을 제쳐두고라도 증명을 받아야 하는 것이오.”
“그게 무엇인가?”
드낙의 말에 문인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뛰어노는 아이들조차도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소!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100번의 일기토를 통하여 100명의 기사를 홀로 베어넘긴 그 위대한 업적을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재현시켜줄 수 있다면! 왕자 전하께서는 그대의 작위를 인정해준다고 하셨소.”
“그건 백금 왕가의 뜻인가?”
문인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옆으로 슬쩍 발을 옮기면서 팔을 들어 올려 천천히 빙글 돌리며 귀족들의 시선을 모으며 눈을 마주쳤다. 모두 불파겐의 무력을 확실하게 측정할 수 있는 판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번 왕족 모욕죄에는 자유기사 드낙의 문제가 가장 크오. 그에 대한 증명이 먼저인 것을 귀족들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의 혈통을 진정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투와 역사뿐이요.”
몇몇 가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인이 드낙을 보며 말했다. 귀족들까지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만든 것은 매우 중요했다. 분위기 자체가 드낙이 혼자 있는 느낌을 만들게 했다.
“백금 왕가의 군세는 많다!”
아크온이 한 소리를 내뱉었다. 할 수 있다면 해달라는 뜻이었다. 100명의 기사를 잡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난 상관없다.”
드낙은 쿨하게 대답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새끼들. 왜 대리가 게임에서 만악의 근원인지 보여주마.’
“좋소.”
문인이 대답하며 기침을 하며 말했다.
“항복하기를 거부하는 불파겐의 후예라 사칭하는 자를 돕는 귀족은 이곳에 있는 모두인 것이 맞소?”
“나는 몽펠리에 가문의 아크온 몽펠리에다. 그러하다.”
“나는 파이룬 가문의 게실리안 파이룬이다. 그러하다.”
문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들은 서로의 가문을 말하며 그렇다고 답하였다.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확실히 하였다. 이것은 드낙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도, 아직 전투가 끝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과 같았다.
결국에는 여러 번 부딪쳐야 한다는 뜻이다. 문인이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드낙이 어깨를 잡았다.
“헉!”
화들짝 놀라는 그를 보며 드낙이 입을 열었다.
“오늘의 무례와 그의 불명예스러운 말은 이곳에 있는 모든 명예로운 북부의 귀족들이 들었소. 내 말이 틀리오?”
“맞소.”
“맞소!”
귀족들이 드낙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드낙은 되려 문인을 놓아주었다.
“그렇다고 이 문인을 벌하지는 않겠소. 왜냐하면 오늘 이 문인의 세 치 혀로 들은 모든 것은 왕자 전하와 백금 왕가의 뜻이기 때문이오. 이 나약한 문인 하나의 목숨으로 가려질 모욕이 아니오!”
드낙은 문인을 보며 말했다.
“내 말을 한치도 빠짐없이 전해라.”
“아, 알겠소.”
사절단 10명은 허둥지둥 대전을 빠져나갔다.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불파겐을 도발하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드낙에게도 이득이었다. 불파겐의 편견이 공식적으로 사라지는 것이기도 했다.
일기토는 다음날 동이 트고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했다. 여독을 풀라는 〈3왕자 길게이 플래티넘〉의 뜻이었다.
‘오만한 놈.’
드낙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들은 왕족인 제퍼 플래티넘을 죽이지 않고 있었다. 크게 일이 어지럽혀져도 정리할 수단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날은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은 꿈〉에서는 또 달랐다.
“싫다. 대리기사라니. 난 그런 불명예스러운 것을 싫어한다.”
“불파겐인데 무슨 불명예야? 그럼 100명 베다가 내가 죽거나 꼴사납게 나뒹굴면, 백금 왕가는 싸울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를걸? 전면전으로 북부의 세가 크게 기울면 그다음은 버려진 영지인데?”
“제국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
“거기서 어떻게 마탑을 세우고 할 수 있어? 내정관이 지역을 다스리는데, 난 그런 소양도 없고 하기도 싫어.”
세파리아스는 계속 싫다고 했지만 드낙이 계속 떼를 부리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팔아! 난 안 된다니까!”
세파리아스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약칭으로 부르지 마라!! 내 이름은 세파리아스 불파겐이다!”
애초에 드낙의 정교한 검술은 〈킬 더 배틀〉의 지속력에 있었다. 기사를 뜨문 뜨문 보내는 일기토와는 맞지 않기도 했다.
한마디로 세파리아스만 믿고 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면 무조건 이득이잖아! 왜 하기 싫다는 거야?”
“불명예스럽기 때문이다!”
“누구도 모른다니까··· 생각을 해 봐. 진짜 불파겐으로 다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데 제대로 해야지! 엄청 멋지게! 여기서 빨리 승부를 보고 트롤 잡으러 가야지! 거기에 이번 일은 반드시 제국으로 퍼져나갈 것이고, 상단을 안 보내도 불파겐의 후예를 아는 놈들이 찾아올걸?”
“쯧.”
세파리아스가 고민하다가 이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질끈 감은 것이 사약을 받아먹는 것처럼 굴었다.
‘어휴, 그놈의 명예.’
드낙은 속으로 세파리아스를 욕했다. 물론 자신도 공명심이 상당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실익보다 명예를 생각하다니. 굶어본 적이 없는 놈이 분명해.’
자기도 멘토를 유비로 삼았으면서 남 욕은 참 잘했다.
동이 트기 전부터 양쪽 진영은 분주했다. 성벽 위에 병사들이 온갖 깃발을 올려대었고, 돌로 된 망루에는 시야를 확대하는 마법 장비가 설치됐다. 귀족들이 그곳에서 관전하기 위함이었다.
평야에 있는 병사들은 비계를 쌓아올려 관전하기 좋은 곳을 만들었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드낙의 몸을 점검했다. 기사를 상대함에 있어서는 정교함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무렇게나 뿌리는 잽은 갑주를 입은 기사에게 반격의 기회가 될 뿐이었다.
‘더 좋아졌군.’
〈피부 혈액 저장소〉, 〈트롤의 재생력〉, 〈타고난 혈액〉, 〈불사혈관〉, 〈검은 곰의 두번째 간〉, 〈일각수의 간〉.
〈혈액〉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검은 문의 능력들은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더 강한 힘을 내고 있었다. 드낙이 원했든 원하지 않든 이미 드낙의 검은문 컨셉 하나가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근육의 이완과 수축.’
그곳에 관여하는 에너지와 산소를 운반하는 피! 상처를 입어도 순식간에 회복한다는 점까지.
팡!
위력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코어의 힘 또한 수준급이었다. 다른 인간보다 척추가 하나 더 많다는 것은 대단한 이점이었다.
‘허리를 중심적으로 운용할수록 무서운 기세를 만들 수 있다.’
스스···
특히나 소리 없는 발걸음은 상대 기사의 청각을 교란시키기에도 좋았다. 발소리 또한 중요한 전투적 요소였기 때문이다.
세파리아스는 드낙이 지닌 능력들을 확인하며 새벽 수련을 끝냈다.
‘이런 몸뚱이로 여기까지 밖에 못 오다니.’
특히 드낙이 말려도 귀족이 바락바락 드낙의 신분을 추켜세워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는 것은 드낙의 무력이 〈귀신의 가문〉답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놀랍긴 하지만 불파겐의 위명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라는 소리였다.
씻고, 30분 남짓을 명상하며 정신을 다스린 세파리아스가 노크 소리에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왔다.
“!”
아크온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주춤했다. 기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세파리아스는 단 한마디도 없이 아크온을 지나갔다. 이미 검을 뽑아들고 있는 모습에 모두가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기세가 엄청났다.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어라아아!”
쿠드드득! 드드드득!
거대한 쇠사슬이 덜컹덜컹 움직였고, 성문이 주춤주춤 내려갔다.
말을 타고 500걸음을 뻗어나간 세파리아스가 말의 엉덩이를 치며 돌려보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일기토를 위한 기사가 다가와서 50걸음을 앞두고 멈춰서 말을 돌려보냈다.
이곳의 기사는 마상전투가 발달되지 못했다. 땅에 서있는 기사가 오히려 더 큰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동력을 위해서 전투의 환경에 따라서 말을 선택할 때도 있지만 기사전에서는 오히려 단점이 많았다.
‘혈통 하나 없는 기사군. 나이도 젊고, 무기는 창. 훌륭하군. 태어날 때부터 어떻게 기를지 결정된 기사다. 내 기세를 버틸 정도로 혈기도 많고. 처음에 보내기 좋다.’
숙련된 창수는 숙련된 검수를 압도적으로 패버릴 수 있었다. 그만큼 창은 폴암류 다음으로 강력한 백병전 무기였다.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서 창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100번 싸워 1번만 이기면 되는 것이니, 백금 왕가는 지구력으로 승부를 볼 생각도 가지고 있고.’
“나는···”
기사의 말은 세파리아스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끄럽다. 너 같은 놈이 기사라고? 건방지구나.”
기사의 말을 끊었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기사를 보며 세파리아스가 그의 애검(愛劍), 〈강철이 흐르는 강(Steel flowing river)〉을 하단에 내려놓으며 기세를 아예 없애버렸다.
“휴우. 이딴 놈도 기사라니, 마법에 미쳐버린 제국 놈들이랑 어떻게 하등 다를 바가 없구나.”
“무, 무례한! 일기토를 무엇으로 보고!”
이름과 하사받은 가문명도 말하지 못한 왕국 기사가 그대로 덤벼들었다. 그의 등 뒤에서 〈대인마법〉이 발현되었다. 상, 좌, 우로 뻗어나가며 벼락같이 움직이는 전격의 창이었다.
세파리아스는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투구 아래로 바람에 휘날렸고, 세파리아스에게 닿지도 못한 채 그대로 스파크가 튀기며 상쇄되었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검이 기사의 창을 올려쳤다. 세파리아스의 허리와 몸이 조금 앞으로 기우는 모습을 연출했다.
‘무슨 힘이!’
왕국 기사가 경악했다. 뒤로 빠지기에는 세파리아스가 후려친 힘이 창을 크게 올려쳤기에 2합만에 승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최대한 장기전이 왕국 기사들의 전법이었다.
‘주먹으로!’
창을 올려친 세파리아스의 검은 그 반동과 함께 탄력적으로 움직이며 옆으로 휘어졌다. 마치 왕국 기사의 의도를 꿰뚫는 것처럼 보였다. 왼 팔뚝을 후려치며 그 반동이 순식간에 대각선 위로 올려졌다.
검이 번쩍거리면서 따당하며 순식간에 좌우를 치고 머리를 노리는 뱀과도 같은 움직임을 왕국 기사는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했다.
“헉!”
세파리아스가 그 순간을 노려서 순식간에 발로 땅을 치며 모든 힘을 검의 뽀족한 작은 점에 집중시켰다. 110kg의 체중, 앞으로 향하는 힘 등이 새끼손가락보다 작고 뾰족한 점에 집중된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그 압점을 막을 수 없었다.
푸걱! 주르륵.
턱을 찌르며 검이 왕국 기사의 몸에 그대로 박혔다. 투구에서 피가 좌르륵 쏟아져 나왔다.
그그극.
기사가 쥐고 있던 올려쳐진 장창의 창날이 내려가며 세파리아스의 바깥쪽 팔뚝을 긁으며 떨어졌다.
쿵!
기사는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엎어졌다. 왕국 기사의 시체가 평야를 물들였다.
“우와아아아아아!!!!!!”
성벽에 올라간 병사들이 함성을 크게 내질렀다.
단 한 합! 한순간에 기사의 머리가 꿰뚫렸다.
‘비전을 쓸 필요도 없군. 힘의 차이가 너무 크다.’
팡!
검에 묻은 사람 기름과 피부의 살점 등이 묻은 검이 한 번 휘둘러지자 분무기처럼 이물질이 허공에 퍼뜨려졌다. 품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들어 세파리아스가 검을 닦았다.
무엇 하나 묻어 나오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6127자
평추코! 다양한 의견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