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0 <-- 트롤 토벌 -->
몬스터 군대를 각개격파하는 쪽으로 〈원탁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피곤하기도 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가장 맹장(猛將)이라고 할 수 있는 드낙이 꺼려 했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온 드낙은 다섯 명의 죽은 기수들이 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나무가 많았기에 관을 짤 수 있는 듯했다. 전투 때문에 흉악하게 비틀린 관절도 단단히 천으로 묶어서 바르게 만들었다.
베테랑 기수들은 전우의 죽음을 짧게 애도할 뿐이었다.
그 시간조차도 사치임을 알았다. 이들이 오늘 겪은 슬픔은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갈 것이다. 전투가 끝나서야 풀 수 있을 터였다.
‘뛰어난 전술이 아니었다면 피해가 커졌겠지.’
사격전에서 우위를 대단히 많이 가져간 것이 유용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못해도 30기는 죽어야 정상인 전투였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정규병은 실로 대단했다.
“어땠냐?”
드낙이 이스핀에게 말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드낙이 〈검은 꿈〉을 통해서 멘탈을 잡고 있다면, 이스핀은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갈대와도 같았다. 전쟁터에서 이렇게 노출된 적이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따라다니면서 했기 때문에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휩쓸리면서 자신을 잊을 정도로 얼이 빠진 이스핀을 보며 드낙이 단단히 일러두었다. 자신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이스핀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의 목적이 희미했다.
휘둘리다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정신 바짝 차려라. 살아서 돌아간다는 생각만 해라. 이번 토벌은 너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 적을 죽이는 것보다 네 목숨을 중하게 여기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들은 배움이 다르고, 너와 근본도 다르다.”
드낙이 이스핀의 말을 잘랐다. 전신갑주를 입고 자존심을 세우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자신도 〈전신갑주〉를 맹신했기에 더욱 잘 보였다. 드낙은 스스로 밟아온 길을 알았기에 이스핀에게 일침을 놓을 수 있었다.
뒷골목 깡패의 한계는 명확했다. 아직도 수련하고 공부해야 할 나이이기도 했다. 철이 일찍 들어서 이점이 있다? 웃기는 소리였다. 5살 전후로 검을 집는 것이 귀족들이다. 그들은 연병장에서 펑펑 울고 손에 피물집도 그때부터 생겨났다.
이스핀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시작을 했다. 백금 왕가의 핏줄이나 편한 삶을 살며 기득권으로 살아갈 정도다. 몬스터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남부 왕국의 현 상태였다.
현실의 인간들조차도 총기가 들어서고 나서 짐승들에게서부터 안전해졌다. 그전에는 늑대가 유럽을 뒤흔든 적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것보다 심한 것이 판타지 세계의 몬스터들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도 귀족은 기사가 되어야 했다. 제도보다는 무력이 먼저였다.
이스핀은 모든 면에서 모든 기사보다 덜떨어진 놈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간악할 수는 있어도 강하지는 못했다.
‘살아남는 게 먼저다.’
그렇기에 이스핀은 드낙의 충고를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그가 불명예도 쉽게 꿀떡 넘기기 때문이었다.
“편히 쉬어라. 내일도 아침 일찍 〈원탁 회의〉가 있을 테니.”
“예. 드낙 님도 편히 쉬십시오.”
술 한 병을 비우고 이스핀이 군막 밖으로 나갔다. 따라서 나온 드낙은 밤 하늘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흰여우 세린〉을 위해서였다. 또한 한쪽에서 매캐하게 오르고 있는 봉화가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동쪽의 협곡에서도 달빛을 통해서 검은 연기가 선하게 보였다.
서로의 존재를 멀리서 확인하는 것만큼 마음 따뜻한 것이 없었다.
‘이 정도 봤으면 됐겠지.’
드낙은 군막으로 들어가 화덕을 조금 가까이 놓고, 드러누웠다.
눈을 감았다.
검은 연기가 드낙을 덮쳤다.
검은 문에서는 〈펄 발드의 왼손악력〉을 선택했다. 헤드스 하이에나의 우두머리가 뱉은 검은문도 있었지만 털을 두툼하게 만드는 것이라 깔끔하게 포기했다. 검은 여과기에서는 〈선천적인 궁술〉을 얻을 수 있었다.
펄 발드의 왼손 악력은 펄 발드들의 기병술의 특징이기도 했다. 털가죽을 항상 왼손으로 잡고 거칠게 달리기 때문에 왼손의 악력이 잘 발달된 것이다. 또한 휴머노이드답게 궁술에도 제법 재능이 있었다.
‘나쁘지 않아.’
그 덕을 드낙이 촵촵 빨아먹었다. 이것 또한 스노우볼이라고 여겼다.
그 뒤로는 〈검은 회의〉가 으레 열렸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거냐? 1일 1트롤로 검은 문을 확정적으로 열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때가 아닌 걸 잘 알지 않느냐.”
세파리아스가 바로 태클을 걸었다.
“검은문 코인은 반드시 떡상한다. 날 믿어라, 세파리아스.”
“미친놈.”
싸늘하게 욕을 하자 드낙이 농담을 던진 모습과는 다르게 진지해졌다.
“이곳에서 이득을 내가 가장 많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트롤이잖아. 검은 문으로 못 보고 그냥 죽이면 업(業)만 받아들이는 건데 무슨 이득이 있어?”
그 말에 발바룽이 대꾸했다.
“그는 그것을 토다는 것이 아니야. 대국적인 면에서 헛수를 놓아서 기분이 나쁜거지.”
“저 몬스터의 말이 맞다. 트롤로 검은 문을 3개나 열면 이득이 아닌 걸 누가 모르냐? 지나가던 개새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큰 그림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건 네 실수다.”
농담으로 쉽게 풀어가려고 한 드낙이 팩트리어트 미사일을 위아래로 후려 맞고 입을 다물었다.
“트롤에 또 눈이 돌아가서는 그걸 또···단기전으로 안 가고 못해도 2번을 싸울 생각을 해? 응쯧쯧···”
세파리아스가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드낙은 검은 문 중독이었다. 절세미녀가 달라붙어도 트롤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달려나갈 놈으로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뭐라도 맛본 놈이 잘 안다고, 성행위보다 검은 문에 눈을 뜬 것이 드낙의 현주소였다. 게임도 자주 해 본 놈이 잘 아는 것과 같았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그렇게 트롤이 중요했냐? 엉? 이 멍청아!”
드낙은 눈을 조용히 감았다.
‘세팔이, 이 녀석. 잔소리가 점점 심해지네. 자기 말 안 들었다고 이러는 것 같은데···’
“결혼동맹도 생각을 해봐라! 트롤 토벌이 끝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면 백금 왕가가 뭔 수를 반드시 낼 것이다. 심하면 귀족들이 손을 떼고 너랑 백금 왕가만 버려진 영지에 갈 수도 있다.”
〈백금 왕가〉라는 덩어리를 드낙 혼자 등에 짊어지고 고군분투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었다. 그만큼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겨울 전에 토벌을 해야 한다고, 내가 그렇게 말을 했는데. 이제 낙엽도 떨어질 만큼 떨어졌다, 이 녀석아!”
지독한 직설에 발바룽이 세파리아스를 진정시켰다.
“그래도 400년간 백금 왕가는 스스로 전쟁을 건 적은 없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해봤자 후계자 싸움에 지원을 한 것이 전부고 인력은 투입하지도 않았지. 그렇게 본다면 백금 왕가가 이번 일에 무력을 투입하는 일은 없을 텐데?”
“만일에 하나라도 조심해야 한다. 버려진 영지에서 그렇게 꽃을 피우고 싶다면···휴우···”
세파리아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검은 연기로 휩싸이며 아예 사라져버렸다. 드낙도 머리가 멍청한 것은 아니었기에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세파리아스와 드낙은 궁극적으로 서로 추구하는 것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네 영지도 아니다. 초토화가 된다고 해도 트롤 토벌에 성공하면 그 명성을 봐서도 백금 왕가는 물러날 수밖에 없다. 싸우기엔 전쟁은 불확실성이 넘치기 때문이지.”
특히나 전투에서 빛을 발한 것이 드낙이었다. 그런 드낙의 판에 어울려줄 선택을 안 할 것이 농후했다.
“오늘 본 점은 어때?”
드낙이 〈흰여우 세린〉에게 말했다.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그녀는 썩 좋은 표정을 짓지 못했다.
“흉성과 악마의 힘이 한곳에 몰렸어. 불운이 곳곳에서 발생할 거야. 그건 인간이든 몬스터든 무엇 하나 상관없이 똑같긴 하지만. 백금 왕가에게는 좋을 수밖에 없지. 놈들은 멀리 있으니까. 무엇이든지 나쁘게 돌아갈 수 있어서 소극적인 대처도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고꾸라지는 것보다는 비틀대는 것이 낫다는 소리였다.
그 와중에 모습을 감춘 세파리아스의 말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겨울이라서 오히려 귀족의 힘을 빼기도 좋다. 아니길 빌어야지.”
〈트롤 3마리〉에 대한 각개격파에 대한 논의는 다음 날 아침부터 이루어졌다.
“〈알베온의 언덕 전투〉도 참고하기에 좋소. 자유기사가 민병대와 함께 7일을 트롤을 상대로 버틴 곳 아니오?”
“그때 사용한 전술은 짚이 많아서 가능했소. 대용이 있소?”
"낙엽을 잘게 부수면 짚보다 더 유용할 것이오.”
“트롤이 문제가 아니지 않소? 고블린과 놈들에게 조련된 탈것을 효율적으로 막아야 하오.”
“결국에는 덫인데···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는데··· 허.”
수많은 전투들이 거론되었다. 수많은 전투 역사들은 인간들의 또 다른 힘이기도 했다. 순간적인 기지(奇智)도 이들에게는 하나의 지식에 불과했다.
“산으로서의 이점을 살린다면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소. 결국 거점 방어를 통해서 이득을 내는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산 정상으로 가기는 가야 하오.”
“그전에 트롤이 덤벼온다면 어쩔 셈이오?”
“유격대를 먼저 보내놓는 것이 좋겠소. 산 정상은 바위가 많아서 모이면 보일 수밖에 없소.”
드낙이 바로 손을 들었다.
“유격대에 속해도 되겠소?”
“척후병들도 놀랄 정도로 조용히 움직이는 드낙 경 아닌가? 당연히 들어가야 하오.”
모두가 웃었다. 어디서든 먼저 총대를 맬려는 드낙은 호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자신의 권세를 누리지 않고, 귀족들과도 적당히 지내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에 기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드낙에게 호감이었다.
“아래로 유격전들이 크고 작은 함정을 놓고, 점심때에는 올라가는 것으로 하겠소.”
드낙이 일어서자 아크온이 잠시 막아서서 말했다.
“일단 큰 그림은 트롤의 각개격파요. 거기에 맞춰서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깃발병을 통해서 기사들은 통솔함에 있어서 반드시 그 행동을 곳곳에 알려야 하오.”
“명심하겠소.”
드낙 또한 대답했다. 유격대는 자신이 통솔하는 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스핀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드낙은 싸울 때는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한 손 거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넌 유격대와 함께 중턱에서부터 내려오며 무거운 함정을 만들어라.”
“예? 힘쓰는 일에요?”
나름 기사라고 반문하는 이스핀에게 드낙이 스리슬쩍 힘을 줬다. 이스핀이 밀려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윽.”
"어쭙잖게 칠주(七主)까지 썼냐? 자존심 하나는, 흐흐. 시끄럽고 그렇게 해라. 어젯밤의 말을 기억하겠지?”
“예···명심하겠습니다.”
유격대에 차출된 정규병은 10명이고, 용병이 30명이었다. 드낙은 활을 든 용병 중에 날렵한 체형을 지닌 10명만 선별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고, 나머지는 이스핀 경을 따라가 함정을 준비하라고 일러두었다.
함정을 통해 속도를 줄이고, 그 사이에 산에 진지를 구축, 산에서 버티기를 시전해서 고블린을 많이 죽이며 기회를 봐서 기사들이 트롤을 죽이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들의 일은 그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산 아래에서 덫을 놓던 드낙은 전령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협곡에 몬스터가 몰리고 있다고?”
“예! 아마 어제 관심을 끌기 위해서 출정했다가 피맛을 보고 몬스터들이 아주 작정을 한 듯합니다.”
‘일이 크게 돌아갔구나! 불운탓인가?’
남쪽에서 패배를 겪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더는 기다리지 않고, 인간을 각개격파하겠다는 의지였다. 서둘러 드낙이 복귀하자 이미 출정을 준비하기 위해서 분주한 병사들이 보였다.
“닥치는 대로 장애물을 모아라! 평야에서 정면으로 놈들과 붙을 것이다! 나무 한 조각이라도 필요하다!”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투마는 마갑마저 벗겨진 채 짐말이 되어있었다.
극박한 움직임에 드낙 또한 그곳으로 흘러들어갔다. 자신의 전투마 또한 짐이 잔뜩 실려져 있었다.
‘애초에 빌린 거긴 한데, 참···’
기사들 모두 뚜벅이가 되어있는 모습이 어처구니없었다.
“대체 무슨 전략을 하려고···?”
남부군은 평지에 〈알박기〉를 할 준비를 마치고, 몇 시간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자마자 평야로 나왔다. 다행이라면 먹구름이 들이차기 시작해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고블린 부락에도 고블린 하나 없었다. 모조리 동쪽에 몰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한 방 싸움! 트롤들이 제대로 피맛을 맡았다.
밤에도 울리는 몬스터의 울음소리에 병사들이 침 삼키는 소리가 드낙의 귀에 들려왔다.
광란의 울음소리는 인간을 섬뜩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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