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5 <-- 트롤 토벌 -->
‘서신이 백금 왕가에 도착하면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진전되겠지.’
그런 마음을 지니고, 빠르게 행동한 것이 드낙의 서신이었다. 빨리빨리 정신이기도 했다. 트롤 토벌 전에 합의를 이끌어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와 적대하지는 않을 터.’
드낙이 스스로 화해하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드낙의 서신이 〈왕족 제퍼 플래티넘〉에게로 전해지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귀족답지 않았다. 불파겐의 숙청 이후 귀족들은 백금왕가의 눈치를 보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왕족은 아니었다.
귀족 위에 올라서야 하는 것이 왕족이었다. 그들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본다면 자신과 같은 피를 나눈 형제나 부모나 친척이 전부였다. 자연히 〈불명예〉를 저지르고 다녀도 처벌이 가벼웠다.
견제할 수단인 귀족들은 일찌감치 박살이 난지 오래였다. 북부는 통일된 힘을 보이지 못했고, 남부 귀족은 토지가 빼앗겼다.
수도에는 간신들만 가득했다. 혹은 저당잡힌 북부의 귀족 자제들이 전부였다.
그 속에서 나고 자란 제퍼 플래티넘이 제대로 된 엘리트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른 자들보다 교육을 잘 받았지만 그 성정마저 바르지는 못했다.
“이 빌어먹을 귀족 놈이!”
와장창!
선민사상에 찌든 제퍼가 거침없이 장식품들을 부수었다. 백금을 주고 산 그림이 두 조각이 났다. 반쪽이 난 그림을 밖으로 던졌다. 천막이 기울어졌다.
“······”
누구도 제퍼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마법사들이 쩔쩔 매는 사이에 밖으로 나온 제퍼는 아예 드낙의 인장이 찍힌 양피지를 반으로 쭉 찢어버렸다. 몽펠리에에게서 받은 양피지라 굵고 질이 좋아서 머리가 붉어질 정도로 힘을 줘야 찢을 수 있었다.
제퍼 플래티넘은 결코 무인이 아니었다. 〈특징적인 굳은살〉도 없는 것이 그였다. 오직 〈지배〉를 위해서 태어난 존재였다. 그런 왕족에게 고된 육체 수련은 최소한의 수준에 그쳤다.
무정하게 자식을 죽이는 북부의 귀족과는 달랐다. 5살 전후로 검을 잡는 것이 북부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지만 적어도 실력만은 진짜였다. 명예를 위해서 진정으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견제를 받지 못한 〈백금 왕가〉의 왕족은 크게 달랐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찌들어버렸다. 우위를 지닌 400년. 그것이 그들을 타락하게 만든 것이다.
“한 단어도 빠짐없이 적어 메시지 마법으로 수도에 보내라!”
“어, 어딜 가십니까?”
철썩!
“억!”
그의 충직한 시종 노릇을 한 〈몬 엘톤(Mon Elton)〉의 뺨을 때린 제퍼 플래티넘이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평상시에는 다른 귀족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한 번 꼭지가 돌면 개망나니 그 자체였다.
특히나 서열에서 완전히 밀려나가 왕자임에도 마법을 배워야 했던 것이 〈제퍼 플레티넘〉이었다. 그 열등감은 어마어마했고, 청소년 시절의 그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아크온조차도 그를 대우해주며 적당히 둥가둥가 해주었다. 하지만 드낙은 칼처럼 그 가슴을 쿡 찌른 것이다.
그것도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왕족을 왕족답게 대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 위에 있는 것이 현재의 백금 왕가였다. 수도에서 왕족이 지니는 힘과 위세, 영향력은 하늘도 무너뜨린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런데 드낙이 제퍼의 얼굴과 백금 왕가에 재 가루를 뿌린 것이다.
“너!”
“제퍼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순찰을 도는 몽펠리에 가문의 정규병들이 제퍼의 차림새를 보고 단번에 경례했다.
“날 따라와라. 시킬 일이 있다.”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능숙하게 제퍼의 말을 따랐다. 지휘체계가 엉망이 되는 경우임에도 순식간에 받아들였다. 미리 매뉴얼이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충성스러운 정규병이 원칙에 어긋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대단히 화가 나셨군. 대체 무슨 일이지?’
순찰병 중에 한 명이 제퍼가 뒤를 돌자 슬금슬금 딴 길로 새어나갔다. 천막이 그를 가리자 후다닥 뛰었다.
제퍼는 병사 하나를 자신의 앞으로 세워서 드낙의 군막으로 찾아갔다.
“드낙, 이 주제도 모르는 놈아! 어서 나와서 네 잘못을 빌지 못하겠느냐!!”
드낙은 자신을 부르는 거친 소리에 심장이 콩닥콩닥했다. 심호흡하면서도 승기가 있다고 여겼다.
‘이런 도발에 걸리다니, 뭐 하는 놈이지?’
물러날 때를 아는 귀족들을 봤고, 용감하게 선두에 서는 귀족을 본 드낙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결코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스핀이 우물쭈물했다.
뭐라도 빠르게 판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낙은 그러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거 잘 만하면···’
드낙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생각보다 왕족이 멍청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걸 보고 저렇게 크게 나올 수 있는 걸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 분명했다.
“겁이라도 먹었느냐! 왕족을 능멸하고 가벼이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불파겐의 그 피비린내 나는 가훈은 어디에 있느냐! 하하하! 또 한 번 멸문 당할 것을 생각하니 두려워서 못 나오는 거냐!”
“백금 왕가의 정통한 왕자가 친히 너에게 왔다! 냉큼 나오지 못하는가!”
드낙이 군막 안에 있음에도 나오지 않자 제퍼는 조롱까지 하기도 했다. 주변에 병사들의 눈과 귀가 많았음에도 거침없었다. 대중의 시선에 긴장은커녕 오히려 흥분했다. 불파겐의 후예를 짓밟음으로서 자신의 위세가 자연스럽게 커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북부 가문이 크게 밀어주고 있는 것이 〈드낙 불파겐〉이었다.
‘저런 겁쟁이 같은 놈을 밀어주다니. 북부의 촌뜨네기 귀족들의 머리도 돌이구나.’
건수를 잡은 드낙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 말 진심인가?”
“어떤 말 말이냐?”
“다시 한 번 멸문시키겠다는 말 말이다.”
드낙의 거침없는 반말에 제퍼가 드낙을 손가락질했다.
“어디서 반말을! 무례하다!”
“먼저 무례를 저지른 것은 네놈이 아닌가?”
드낙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전신갑주를 입고, 사람의 머리털보다 굵은 사자와도 같은 붉은 갈기를 닮은 머리카락이 웅장하게 흔들렸다. 그의 기세를 정면으로 감당키 어려운 제퍼가 자연스레 뒷걸음질 쳤다.
캉!
제퍼를 따라온 정규병이 할버드를 교차시키며 드낙의 앞을 막았다.
“진정하십시오. 드낙 기사님. 어쩌려고 그렇게 기세를 세우는 것입니까.”
정규병은 그렇게 말하면서 목소리를 덜덜 떨었다. 사자나 호랑이의 아가리가 코앞에 있는 것처럼 몸의 컨디션이 나빠졌다. 추위를 느끼듯이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투구를 쓰고 있어서 그것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목소리가 떨리자 이를 악무는 병사를 보며 드낙이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제퍼는 소리를 질러대었다.
“놈을 포박하라! 반역이다! 반역죄다!”
남부왕국의 남부 귀족을 상대하듯이 하는 그 모습에 드낙은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백금 왕가가 영락없이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낼 줄 알았는데, 이런 반푼이를 보내다니. 그들의 착오가 피부 깊이 느껴졌다.
‘형편없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모여있는 병사들이 너도나도 물러났다. 뒷걸음질 치다가 사람이 많이 오고 가서 진창이 된 땅 때문에 미끄러져서 넘어진 병사도 있었다. 〈아크온 몽펠리에〉였다. 전투 망치를 어깨에 척하고 올린 그는 단연 이 소란의 주연이 되기에 충분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아크온 경! 저자가 반역을 저질렀소! 어서 포박하시오!”
“제퍼 공. 드낙 경은 검조차 뽑지 않았는데, 무슨 반역이오?”
“···배, 백금왕가를 모독했소. 모독죄요!”
“그 증거는 어디에 있소?”
제퍼가 그 말에 양피지를 찾았다. 하지만 양피지를 마법사에게 준 것을 기억했다. 병사에게 제퍼가 턱짓하며 말했다.
“마법사들에게 드낙의 서신이 있다! 가서 빨리 가져오라!”
하지만 정규병은 전과 다르게 제퍼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고개는 제퍼를 향하고 있었지만 눈은 아크온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퍼가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병사를 후려치려고 했지만 아크온이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제퍼의 명을 받들었다.
동시에 우악스러운 손길에 제퍼가 소리를 냈다.
“악!”
“아, 이거 죄송합니다. 어깨에 뭔가가 있어서 털어주려고 했습니다.”
“뭐, 뭐라?”
제퍼는 그제서야 이곳에 자신이 편이 없음을 상기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허둥지둥 〈중앙 신전〉의 인물들이 도착해서 제퍼의 곁에 섰다. 그제서야 안심한 제퍼가 드낙을 노려보았다.
침묵의 시간 동안 서로 정황을 이야기했다. 다른 귀족들도 소식을 듣고 속속들이 도착했다.
‘이거 좋지 않다.’
〈중앙 신전〉에 소속된 추기경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대개 무인들의 서신은 투박하고 본론만 쓴 것이 평균적이었다. 그것을 문장가가 고쳐 써서 왕족에게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퍼 왕자 전하의 실수 아닌가. 저쪽에는 변명할 거리가 넘쳐난다.’
뒷머리를 긁었다.
“왜 말을 안 하는가. 내가 잘못한 건가?”
“그, 그것이··· 분명 예법에는 어긋난 서신이오나···”
쩔쩔매는 사이에 마법사들이 드낙이 쓴 양피지를 가져왔다. 당연히 찢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이 신음소리를 냈다.
“음···”
“저런···”
“귀족의 서신을 찢다니.”
부정적인 소리를 냈다. 아무리 왕족이라도 귀족과 왕족은 태생적으로 사회계급적 차이가 없다시피했다. 그게 북부 귀족들의 관념이었다. 귀족의 힘이 모여 왕을 추대하는 보편적 봉건제다운 정신론이었다.
반면 반토막이지만 중앙집권을 이뤄냈고, 그 맛을 보고 그것을 눈으로 본 제퍼는 귀족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자 눈이 날카로워졌다.
“왕족 밑에 귀족이 있는데, 양피지를 찢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를 귀족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크온이 나섰다.
“그게 〈백금 왕가〉의 뜻입니까?”
“그렇다! 내가 백금 왕가의 피를 지니고 있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
제퍼의 고함에도 귀족들의 반응은 싸늘한 겨울처럼 착 가라앉아있었다. 제퍼 플래티넘은 열이 확 식는 것을 느꼈다.
“아.”
그제서야 자신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또한 귀족들은 조금 허탈함을 느끼기도 했다. 드낙이 한 일은 눈에 보이는 하찮은 도발이었고, 백금 왕가와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그런데 결과는 웬걸.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와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이득을 본 것은 드낙도 제퍼도 아니라 북부 귀족들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 말이 아니다!”
“그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었던 거냐?”
아크온이 제퍼에게 바짝 다가가서 말했다. 성기사가 그 앞을 막았지만 되려 밀려났다. 아크온의 체격은 성기사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꿀꺽.
제퍼가 아크온을 올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말을 해라. 넌 지금 북부 귀족이 〈플래티넘 가문〉보다 낮다고 말하지 않았나.”
아크온은 아예 〈백금 왕가〉라고 칭하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귀족들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미, 미안하오. 말이 헛나왔소.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은 그저 나 혼자만의 의견이오.”
제퍼가 고개를 숙였다. 모욕적이고 끔찍한 표정이 가려졌다. 하지만 아크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차피 드낙이 먼저 칼을 뽑아든 격이 되었다. 여기서 박쥐같은 짓을 할 양반이 아니었다.
“제퍼 전하께서는 수도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북부의 귀족을 돕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는 안 보입니다. 전쟁 선포를 하러 온 것으로 보입니다.”
“수도로 돌아가라고? 나보고?”
“다른 왕족을 보내십시오. 뭐 하느냐! 제퍼 공을 모셔서 데려가지 않고!”
아크온이 마법사들에게 닦달했다. 그들은 엉거주춤했다.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감도 서지 않았다. 눈앞에 어둠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할 제퍼도 앞이 캄캄해졌다.
‘아···아! 아아아!’
휙!
“아!”
아크온은 멍한 표정을 짓는 제퍼에게서 찢긴 양피지를 회수했다. 중요한 증거물품이었다. 그곳을 펼쳤는데, 여실 없이 드낙의 인장이 찍혀져 있었다. 투박한 인장이었지만 〈불파겐〉의 예전 인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백금 왕가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었나? 남부 귀족들, 이 멍청한 놈들. 이딴 놈들에게 400년도 못 버텼다고?’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아크온은 이것마저 백금왕가의 노림수라고 생각하며 경계했다. 만약 그렇다면 백금 왕가는 이를 빌미로 군대를 보낼지도 몰랐다.
명분은 왕족 모욕죄로 드낙을 호송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런 형편없는 왕족을 보냈는지도 몰랐다.
‘오히려 죽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군.’
아크온의 눈이 좁아졌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이라면 그 물을 엎지른 것은 드낙이라는 점이었다.
‘자식마저 정치적 도구로 사용한다, 이건가? 간악하구나. 하지만 오히려 잘 됐다.’
이것으로 드낙과 백금왕가가 갈라질 수 있었다. 북부 귀족에게 있어서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제퍼 플래티넘〉은 절반의 마법사와 10명의 성기사를 호위로 삼으며 수도로 돌아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어떤 기준으로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메시지 마법〉을 통해서 묻기에는 자세한 말을 할 수 없어서 오히려 자신의 입지가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판단과는 별개로 종군 마법사 중에 다른 왕족을 모시는 마법사가 〈쌍둥이 성채〉에 있는 대량의 마력을 통해 소식을 전할 것은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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