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6 <-- 트롤 토벌 -->
검은 연기가 드낙을 덮쳤다. 보상의 시간이었다. 그가 살육을 저지를 때마다 〈검은 꿈〉은 그에게 확실한 보상을 항상 준비했다. 그것은 사료나 다름없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본다면 누구나 그것을 〈목줄〉이라고 여길 것이다.
‘이번에는 찌꺼기로 안 나왔네. 이상하군.’
드낙은 의문을 가졌다. 무슨 기준으로 〈찌꺼기〉와 〈검은 문〉으로 나누어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분히 주관적이었다. 객관적 조건이 아닌 듯했다.
〈검은 여과기〉에서 〈하얀 물〉 또한 나왔다. 그만큼 죽였기 때문이다.
드낙은 가장 먼저 검은 문부터 확인했다. 검은 문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오랜만에 드낙의 가슴을 뛰게 했다.
‘〈질긴 피부〉.’
칼로 베어도 깊게 베이지 않았다. 날이 무딘 것이라면 긁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맨몸으로도 생가죽을 한 겹 입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드낙은 잘 알았다.
‘〈전신갑주〉는 만능이 아니다.’
방심한 결과 순식간에 돌팔매질에 훅 갈 뻔했던 드낙이었다. 어느 세계이던지 방심하면 뒤져야 마땅했다.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도 방심했다고 하면 죽어나자빠질 수 있었다. 〈헤드스 하이에나〉와 판이 다르게 펄 발드를 상대로 빈틈없는 전투를 수행한 이유도 방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물렁물렁해서 어떤 각오를 가지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전투력이 크게 차이가 났다. 챔피언을 따내기 위해 독기를 품고 로열 로드를 걸은 복서가 방어전에서 참패를 하는 것과 같았다.
마음가짐은 전투에 나선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괜히 무인(武人)들이 정신을 단련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검은 문 또한 확인했다.
〈천재적인 투창〉
‘이것도 매력적이지.’
드낙의 경우 가만히 있는 표적은 곧잘 맞추게 되었지만, 움직이는 표적은 활로 맞추기가 힘들었다. 근거리에 들어온 상대에게 투척 단검을 던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격전에 젬병인 것이 드낙이었다. 그것을 가려줄 수 있는 것이 〈천재적인 투창〉이었다. 〈재빠른 갈리악〉이 그 재능을 보이지도 못한 채 일격에 죽었기에 전투에서는 알 수 없었던 재능이기도 했다.
‘정예 몬스터조차도 자신의 재능을 몰랐나 본데.’
투창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후방에서 견제를 하며 드낙을 노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전투가 쉽게 흐르지 못했을 터다. 말 그대로 〈천재적인 투창〉이기 때문이다.
“으!”
드낙이 고민하며 다른 검은 문을 확인했다.
〈27번째 척추〉
하나의 척추가 더 추가되는 능력이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고, 어떻게 기능하는지 환상을 통해서 보는 게 아니라면 선택하기가 곤란한 능력이기도 했다. 척추가 하나 늘어나면서 더욱 조물 해진 척추는 빈틈이 줄어들어서 내구력적인 면에서 탄탄함이 강해졌다.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신체의 능력이 상승했다. 힘을 내는 축이 되는 코어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드낙은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알 수 있었다.
근육을 넘어 뼈 자체가 조밀해져서 강해졌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매력 있네.’
마지막 검은 문은 〈단단한 속살〉이라는 것이었다. 질긴 피부가 베기 저항을 주는 것이라면 단단한 속살은 관통에 저항을 주는 것이었다. 근육 외의 모든 살들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펄 발드〉들은 그들의 수북한 털 때문에 가려졌지만 사실은 신체의 단단함이 우월한 종족이었다. 낙마하고 피해는 입을지언정 죽은 놈이 없었다. 그 덕에 중앙에서 드낙이 시체의 언덕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그 내구력. 펄 발드는 훌륭한 종족이었다.
〈질긴 피부〉 〈천재적인 투창〉 〈27번째 척추〉 〈단단한 속살〉.
‘하얀 물도 확인해보고 결정하자, 중복이 될 수 있으니까.’
드낙은 이번에는 〈하얀 물〉을 확인했다. 환상이 그를 덮쳤다.
〈펄 발드의 눈〉
버려진 영지에서도 한 번 마주한 적이 있는 펄 발드들은 평야에서 살아가는 휴머노이드 종족이었다. 드낙은 그들과의 만남으로 식량과 가죽을 교환하기도 했다. 〈파충류 초원〉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압도적이다.’
드낙은 환상을 통해서 자신은 그저 검은 점으로 본 것이 세세한 병과 구별, 무장 상태의 확인까지 가능하게 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독수리의 시야와도 같이 시력이 대단히 높아지는 것이었다.
몽골인의 시력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인간보다 우월한 신체능력을 지닌 펄 발드였기에 더 뛰어났다. 거의 독수리와 같았다. 눈을 깜빡이면 확대가 한 번 되는 것이 펄 발드의 눈이었다.
‘사격하는데도 도움이 되겠는데.’
물론 고정된 표적이라면 그랬다. 드낙은 하얀 물을 마셨다. 펄 발드의 눈이 가지는 강력한 시력이 드낙에게 주어졌다.
“햐!”
드낙은 몬스터의 정밀한 시력에 감탄했다. 새눈으로 갈아끼운 것 같았다. 무시무시했다. 드낙의 눈동자는 파충류처럼 변하지는 않았다. 대신 동공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 두꺼워졌다.
‘검은 문은 무엇을 선택할까.’
질긴 피부와 단단한 속살은 아쉽게도 탈락이었다. 상대적으로 격차가 났다. 천재적 투창과 27번째 척추를 고민해야 했다.
‘내 장점을 살리는 것은 척추. 내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투창.’
당연히 드낙은 자신을 잘 꿰뚫어보고 있었다. 마력을 운용할 수 있었기에 사실상 투창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았다.
그는 〈27번째 척추〉를 선택했다.
키는 그대로였지만 척추가 하나 추가되면서 척추가 더욱 조밀하게 변하며 굵어지기도 했다. 압축하는 것과 같았다. 몇 cm도 안 되는 척추 하나가 들어온 것에 불과했지만 원심력을 통해서 척추에서 나오는 힘은 어깨 팔뚝 손목을 지나 검으로 흘러가 파괴적인 힘을 낼 것이다.
“잘 했다!”
검은 문이 사라지고 나온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드낙을 칭찬했다. 이 거지 같은 놈은 전투에 있어서 매번 마음가짐이 들쑥날쑥했다. 그 때문에 헤드스 하이에나의 함정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자연히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겨우 기사다운 정신을 가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허접한 놈들이었어. 웬 호들갑이야?”
드낙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세파리아스는 드낙이 헤드스 하이에나 정예 다섯 마리에게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항상 그런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해라! 강하다고 죽지 않는 게 아니다!”
드낙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이 정도는 아닌데.’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잘 나가던 사업가도, 나라도, 영웅도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거 하나 때문에 세파리아스가 저렇게 극찬을 하자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비아냥거림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흙돼지 마을(Mud pig Town)〉은 평화를 맞이했다.
평야는 인간의 손에 다시 들어왔다. 주력을 잃은 몬스터들은 평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순찰을 했지만,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선두 보급대〉는 다시 길을 떠났다. 〈후방 보급대〉는 보급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본대는 〈크놀 철광산〉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마법으로 천천히 타격하여 토벌하고 있어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저항이 생각보다 거센 것 같네.’
그러거나 말거나 드낙은 못 먹어도 고였다. 평야를 벗어나자마자 〈선두 보급대〉는 일단의 무리와 조우하게 되었다.
*
똑똑똑.
예정된 시간에 방문한 이실레아 브릴리언트를 게제라스 총관이 맞이했다.
“요즘 바쁘실 텐데, 어쩐 일이십니까?”
“당연히 총관에게 볼일이 있으니 온 거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거침없이 자리에 앉았다. 권하지도 않았는데 손님이 앉았음에도 게제라스는 가볍게 넘어갔다. 그녀는 모든 도리를 다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무례는 무례도 아니었다.
오히려 친밀감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게 좋았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이실레아는 털털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 기사 생활을 제법 하면서 생긴 성격일 것이다.
“도렌 부대장이 부끄러워하기만 하고 그게 끝입니다. 바람을 좀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예? 제가요?”
게제라스 총관이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랐다. 이실레아가 볼을 거친 손으로 긁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괜히 시선을 테이블에 놓았다.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도렌 부대장은 걸음이 늦습니다.”
“으흠! 도와주신다면 이유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끄러워하는지 이실레아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모습에 게제라스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리어 빠지신 겁니까?”
“누가 누구한테 빠졌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신랑감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이실레아가 구구절절 말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목까지 붉어져 버렸다. 게제라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독기 하나로 카리스마 넘치는 여기사의 상기된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지경이었다.
‘어려울 것 없지.’
드낙은 브릴리언트 가문을 품에 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 두기만 할 뿐이었다. 이실레아와 교류도 있었지만 그건 핑크빛 교류가 아니라 주군과 가신의 관계일 뿐이었다.
그 선은 떠날 때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결혼 얘기 하나 없었다. 무엇보다도 드낙은 여자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고자라는 소문이 밑으로 돌았지만 이스핀과 도렌이 아침마다 대쪽처럼 솟아난 그것을 봤다고 병사들에게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 상황을 들은 게제라스는 미친놈을 보듯이 이스핀을 바라봤지만 그는 그대로 드낙을 변호한 것이라고 총관의 따가운 눈총을 피했다.
‘드낙 님에게서 비전을 받은 것이 도렌이다.’
줄을 잘 타서 실수만 하지 않으면 방계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때쯤 되면 도렌 또한 이실레아와 격이 맞았다. 무엇보다 꾸준함이 있는 도렌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나이로 따지면 이실레아보다 4살이나 낮은 것이 도렌이었다. 거진 데릴사위로 데려가는 일이었고, 브릴리언트 가문을 통해서 〈계승〉을 받게 된 도렌은 훌륭한 방계가 될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사이좋게 손잡고 방계와 브릴리언트 가문이 한 가족이 되면 안정적인 것은 당연지사.’
내정에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드낙 때문에 거진 〈버려진 영지〉의 내정관이 될 소지가 있는 게제라스에게 이런 움직임은 환영할 만했다.
“좋습니다. 제가 바람을 넣어드리겠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아니, 너무 욕심쟁이 아닙니까? 결혼하면 총관에게 이득이 되면 되었지.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 말에 게제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서 말씀하시니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단 3일! 단 3일 만에 담판을 내게 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도렌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접니다. 숙맥 중의 숙맥입니다. 그냥 손만 잡아도 허둥지둥하지 않습니까?”
“잘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요즘에는 식사를 같이하고 있는데, 음식에만 눈을 고정해서는···”
이실레아는 그것이 귀엽다라는 말을 삼켰다. 그것까지 말하면 게제라스 총관은 또 웃을 것이 분명했다. 차선을 선택했다가 생각 외로 속이 꽉 찬 도렌에게 빠져들어버렸다. 이건 게제라스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도렌이 여자에게 매력적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서로 계단을 밟듯이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가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실레아 경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매일 도렌 부대장과 제가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짧은 대화뿐이겠지만, 그 대화를 통해서 도렌 부대장은 하루마다 태도가 조금씩 바꿔질 겁니다.”
“물론 이실레아 경 또한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제법 진지하게 대화를 조금씩 나누셔야 할 겁니다.”
대화 자체를 조밀하게 서로 조율하기 시작했다. 이실레아는 흡족한 표정으로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연애도 전쟁이나 다름없어. 전략만 가지고 전술로서 타격하여 쟁취해내면 돼.’
무식한 생각을 하면서 거침없이 걸어나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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