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5 <-- 트롤 토벌 -->
킨(keen) 가문의 궁기병 20기가 느긋하게 움직이며 정확도가 높은 사격을 감행했다. 그런 느긋한 분위기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노타블 가문의 전차병 때문이었다.
덜컹!
전차가 크게 들썩거렸지만 왼손만으로 능숙하게 전차를 컨트롤하는 전차병 기수가 그대로 오른손에 쥔 철퇴를 휘둘렀다. 쇠사슬이 있는 철퇴의 끝은 그리 두툼하지 못했다. 제어력을 위해서 무기의 무게를 포기했다.
퍽!
“꺽!”
하지만 흉악한 전차의 운동에너지는 그런 작은 철퇴에도 수수깡처럼 펄 발드들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아슬하게 지나가면서 몬스터의 골통을 슬쩍 건드리고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효과음은 흉악했다.
전차병의 옆에 있는 또 한 명의 기수는 무게 중심을 위해서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단창을 던져대었다. 자벨린보다 조금 짧은 것이었다. 노타블 가문의 전차가 오직 보병을 죽이기 위하도록 설계된 것이 명확하게 보이는 투척 무기였다.
경기병이 돌아다니며 사격을 감행하면서 사방팔방에서 화살이 투둑 투둑 떨어졌기 때문에 흙먼지 속에 있는 펄 발드들은 정처 없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들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켁!”
경기병들이 무리 지어서 두들겨 박아대며 칼로 베어내는데 소수에 불과한 펄 발드들은 창을 들고 발악해도 소용이 없었다. 창에게 노려진 경기병은 쳐내면 그만이었고, 그 옆을 지나가며 등을 베면 그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술적으로 단박에 부러진 펄 발드들의 군세는 명백하게 전장에서는 다수였지만, 경기병들이 상대하는 펄 발드들의 숫자는 항상 경기병보다 적었다. 그리고 그런 그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다수를 상대함에도 여러 개의 라이트 렌스를 보유한 중기병의 돌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여라! 모여!!”
2차적으로 돌진하며 뒤통수를 노렸지만 세상사가 항상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었다. 피맛을 봤기 때문에 더욱 생존을 꿈꾸는 몬스터들은 적을 죽이기 위해서 흙먼지 밖으로 뛰쳐나가 경기병들에게 달려들 듯이 중기병을 상대하면서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키아아아아!!!!”
오히려 거세게 고함을 지르며 자신들이 건재함을 알렸다. 종족 자체가 전투적이었고, 호전적이었다.
퍼거걱!
그렇게 밀집대형을 이룬 펄 발드 보병은 종잇장처럼 라이트 렌스의 투창에 꼬치가 되었다. 적게는 2마리 많게는 4마리까지 꿰여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리고 경직된 놈들을 사정없이 베어 나가 내부로 치고 들어간 중갑기병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찍찍!”
제3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도 있었다. 지하에서 드낙을 따라다니는 〈핏빛쥐〉들이었다. 그들은 11마리에 불과했지만 사냥꾼 그 자체였다.
쏘옥!
머리만 내밀 정도의 구멍을 뚫어놓고, 펄 발드가 발을 푹하고 집어넣으면 그대로 잡아당겨서 뜯어먹었다.
까드득! 촵촵!
뼈를 부수는 앞니. 생살이 피와 함께 뿜어져 나오며 찰지게 씹혔다. 다리를 잃은 펄 발드가 고꾸라지면 또 움직여서 다른 곳에 굴을 팠다. 인간이 걸릴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가만히 있었다.
킁킁!
코만 꿈실거리면서 피 묻은 앞니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펄 발드 기수의 다리만 물어뜯고 다녔다.
파팍!
이상한 구멍이었지만 다른 곳으로 움직이면서 어느 정도 다시 묻혔기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도 적었다.
카앙!
“바리다막, 싸르악!”
기수들은 낙마를 했지만 몬스터답게 피해를 입어도 전투불능에 빠지지는 못했다. 뒤이어서 들어온 보병들과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보병들의 분전이기도 했지만 새하얀 털을 지닌 늑대 한 마리였다.
능숙하게 병사들의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내밀면서 아가리를 벌렸는데 그곳에서 푸른색의 불꽃이 토해져서 펄 발드를 끝장내버렸다. 〈주술 불꽃〉을 뿜어내는 도노는 완벽하게 영물로 보였다.
더군다나 사람들을 도왔기에 더욱더 도노의 모습을 각인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서 전장을 크게 휘저었다.
〈스웬슨 보두앵(Swenson Baudouin)〉은 흙먼지 속에서 드낙의 뒤를 쫓고 있었다. 가까이서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 드낙이 행하는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담겼다. 지휘권을 버리면서 드낙을 따라온 이유는 당연히 드낙의 진면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전공.
목격담.
그런 것보다는 〈기사의 증언〉만큼이나 진실성이 있는 게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수년을 함께한 베테랑 기수들의 목숨보다 가문이 더 중요했다.
드낙에게 달려드는 펄 발드들은 단 1합도 붙어보지 못했다.
오른쪽에서 시작된 롱소드는 물처럼 흘렀다. 아래에서 위로 어깨를 살짝 베며 지나가며 목을 긁고, 다시 아래로 향하며 무기를 쥔 펄 발드의 손목을 잘라냈다.
연한 손목의 연골을 깔끔하게 베고 지나가는 검술은 〈일류의 검〉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손목을 자른 검은 드낙의 정면을 지나 왼쪽으로 파도처럼 흘러가며 두 마리의 펄 발드를 죽였다.
하나는 도약해서 드낙을 노렸는데, 드낙의 검에 팔이 달아났다. 마지막 놈은 슬라이딩을 하듯이 하단을 노리며 드낙의 빈틈을 노렸다. 부드럽게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천천히 회전한 검은 수직으로 내려가서 펄 발드의 명치에 정확하게 내려꽂혔다.
‘마스터의 경지.’
마치 드낙을 위해 만들어지는 연극처럼 펄 발드들이 드낙이 향하는 검에 급소를 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흡!”
그것뿐만 아니었다. 드낙과 대적하는 펄 발드들은 덩치맛에 어울리지 않게 헛바람을 집어먹거나, 이상할 정도로 오버액션을 취하면서 무너져내렸다. 힘을 가득 넣어야 할 때, 그 직전에 드낙이 그 힘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불파겐의 묘리.’
전투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재능이 있다면 30대. 재능이 없어도 남을 가르치면서 황혼을 기다리는 노기사가 깨닫게 되는 〈일류의 흐름〉이라 불리는 것은 마치 기사들에게 전해지는 〈뜬소문〉 같은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전신갑주의 성능. 마법의 효율성과 마력 축적의 기술력. 축적된 세월만큼이나 정교해지는 비전과는 전혀 다른 구름과도 같은 이야기다.
불파겐과의 전쟁을 경험했고, 동시에 그 파괴적인 피해를 입고도 살아남은 가문은 이것을 〈상승(常勝)의 묘리(妙理)〉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물론 모두 불파겐 가문과의 전쟁에서 얻어낸 지식이었다.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몽펠리에 가문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몇몇의 〈마스터〉를 배출해냈다. 그리고 그 가문의 방계인 보두앵 가문 소속인 스웬슨 경은 드낙의 모든 행위를 판단할 수 있었다.
어디서 굴러다니는 변방의 기사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남부 왕국을 선두에서 이끄는 첨병이었다. 이 정도의 눈썰미도 없다면 그런 위치까지 올라서지 못했다.
피떡이 되어서 쓰러져가는 펄 발드의 숫자 속에서도 드낙의 온갖 마법은 사방 팔방을 타격했다. 난투극 속에서 정확한 마법 선택은 스웬슨의 등골이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마법으로 생긴 오한이 갑옷 깊이 스며들었는지도 몰랐다.
“우와아아아아악!!!!!”
피에 절은 드낙이 거칠게 흉성을 터트렸다. 달리던 펄 발드들은 이미 드낙 주위에 있는 시체에서 풍기는 피냄새에 이성이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드낙의 팔을 물어뜯어 늘어졌고, 드낙의 무릎이 그런 놈의 목뼈를 박살을 냈다.
제법 덩치가 있는 펄 발드 정예는 드낙이 발을 굴러 강하게 발을 밟아버리자 전기가 통한 것처럼 펄떡 뛰었고, 단번에 목이 베어지며 피를 뿜었다.
“크오아아아!!!”
드낙에게 몸통 박치기를 한 검은 털을 지닌 〈정예 몬스터〉 〈재빠른 갈리악〉은 드낙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신체적 조건은 당연히 갈리악이 좋았다. 하지만 튕겨져나간 것은 갈리악이었다.
떨어져 나가며 갈리악은 양 팔이 허공을 날았다. 작은 굉음(轟音)이 두 번 그의 귀를 때리고 지나갔는데 모든 것은 끝나있었다. 튕겨져 나간 몸이 바닥에 부딪치고,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와 떨어져 나간 양팔이 투둑하고 서로 다르게 땅에 내려앉았다.
“울컥!”
피를 크게 토한 갈리악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동시에 드낙에게 호쾌하게 달려든 만용의 대가였다.
‘싱겁네.’
느려진 체감 속에서 드낙은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싱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중대형 몬스터나 기사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스웬슨 경의 눈에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육체 제어력을 통해서 적을 토벌하는 것처럼 보였다.
빡!
투구로 박치기를 하기도 했고, 주먹, 무릎, 발, 어깨 그리고 마법에 죽은 시체까지 이용하는 드낙은 전투의 신이라고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변에 시체의 언덕이 쌓였다.
농도 짙은 피와 간간이 터져 나오는 흉성(凶聲) 그리고 낮이라 생명체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드낙의 정수리에 놓여있는 흉성(凶星)까지 몬스터의 이성을 날려버리기 충분했다.
드낙으로 적들이 몰렸고, 반대로 인간들은 적들을 수월하게 처리해나갔다. 실제로 인간이 펄 발드를 죽인 숫자는 600마리에 불과했다.
싸움이 끝나고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성기사 케이슨의 황금빛 신성력이 드문드문 곳곳에서 터져나갈 때마다 고통의 울부짖음이 줄어들었다.
서서히 안정화되는 곳에서 모든 이들의 시선을 확 잡는 것이 있었다.
물경 400구에 달하는 펄 발드들이 쌓이고 쌓인 작은 언덕. 그곳에 드낙이 피에 물든 채 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온 드낙은 투구마저 벗었다. 그리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후우웅!
바람이 거칠게 불면서 사자의 갈기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그 위업을 보고 있을 때, 오직 스웬슨 경만이 정신을 추스르고 경악하고 있는 이들의 표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기사들조차 멍하게 드낙을 보고 있었다.
평야에 시체의 언덕이 쌓아올려졌다. 오직 드낙이 행한 일이었다.
부상자들과 피해를 확인했다. 죽은 자들은 10명에 불과했다. 모두 보급대에 소속된 신참 병사들이었다. 이것은 지휘부의 잘못된 판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머릿수를 갖춰야 할 정도로 적이 강대했기에 그들의 죽음은 오히려 적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새하얀 천이 죽은 채 가지런하게 누워있는 병사들을 꽁꽁 묶었다. 나무관은 주변에 나무가 없었기에 만들 수 없었기에 이대로 〈옹달샘 숲〉으로 이동될 것이다.
굴럭, 구루럭.
느릿느릿하게 기름이 부어졌다. 짐승의 마른 똥도 곳곳에 뿌려졌다. 드낙이 만들어낸 시체의 언덕에 죽은 다른 펄 발드들의 시체가 얹어졌다. 그리고 불이 타올랐다. 못해도 3일은 내리 탈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식사가 이루어졌다. 병사들은 당연히 드낙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다. 그는 명백히 이번 싸움의 주인공이었다.
“〈시체언덕의 드낙 불파겐〉.”
남들 별명 지어주기를 좋아하고, 재능도 제법 있는 병사가 술병을 흔들며 모닥불에서 드낙의 새로운 명성을 말했다.
“크.”
“미쳤다.”
병사들이 감탄을 그지 못했다. 시체언덕의 드낙! 그것만큼이나 이번 전투의 백미를 보여주는 것이 없었다.
“지릴 뻔했잖아. 혼자서 중앙에서 그냥 펄 발드를 죽이며 언덕을 쌓아버린 거 보고··· 어휴, 진짜 온몸에 전율이! 아주 그냥, 꿀꺽 꿀꺽.”
병사가 말을 하다 말고 술을 마셨다. 진짜 술맛이 났다. 아주 맛있었다. 영웅의 이야기였고, 자신이 겪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안줏거리로 최고였다.
“진짜 드낙 기사님은 미쳤다고 밖에 말을 할 수가 없다. 최고다. 최고.”
다른 모닥불에서도 드낙이 만든 펄 발드의 시체 언덕을 극찬하기 바빴다. 그만큼 극적인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덤덤한 것도 난 좋더라.”
“한 마디를 안 하던데.”
도리어 불 뿜는 늑대에 대한 것이 기억에서 지워진 것처럼 언급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평야에 시체로 된 언덕이 떡 하니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임팩트를 겪고 딴 소리로 옮겨가는 놈이 이상한 취급을 받을 지경이었다.
임시 군막도 없이 기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서로 공을 치하하기 바빴다. 특히나 모두가 드낙을 추켜세워주었다.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괴이쩍게도 〈스웬슨 보두앵〉이 적극적으로 드낙의 공을 주도적으로 이야기하며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누가 400구에 달하는 몬스터를 홀로 한자리에서 잡겠소?”
“그만하시오. 스웬슨 경. 그 이야기가 대체 몇 번째요? 벌써 다섯 번은 들었소!”
진절머리를 치는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스웬슨은 그렇게 대꾸를 받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혹자는 스웬슨이 드낙의 가신이 되려 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만큼 한순간에 사람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 모습을 보며 드낙은 적당히 감사를 표했다.
‘새끼. 계속 날 따라다니더니.’
결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일을 통해서 보두앵 가문이 자신의 뒤를 받쳐줄 것이기에 더욱 공을 세우기 쉬워졌다고 생각했다.
이번 식사 자리에서 높은 적극성으로 이야기를 주도한 스웬슨 보두앵은 식사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모두가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웬슨이 식은땀을 줄줄 쏟아내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헉!”
온몸이 땀으로 가득했다. 손발이 저려오자 스웬슨 경은 손과 발을 주무르며 모닥불에 물을 데워서 후후 불며 마셨다. 주황색의 모닥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공포로 잔뜩 물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30분의 격전에서 400마리의 몬스터를 베어 죽였다.
그 광경을 보고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그는 기사였다. 손에 피를 묻히고 실전적인 배경지식이 있었다.
“우웩!”
속까지 더부룩해진 스웬슨이 속에 것을 게워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대영웅이었지만, 가까이서 본 드낙은 도저히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어떤 다른 것에 불과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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