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3 <-- 트롤 토벌 -->
〈진흙돼지 마을(Mud pig Town)〉에서의 버티기는 끝을 몰랐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드낙이 고블린 1만 구에 달하는 부산물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소문은 〈쌍둥이 성채〉에서 곳곳으로 퍼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크놀 철광산〉을 토벌하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높은 수준의 몬스터 무구는 드낙의 전공을 덮기에 좋았다. 그 덕에 〈선두 보급대〉와 〈후방 보급대〉의 간격은 늘어진 상태였다.
〈평야 타격대〉 또한 〈펄 발드(Fur Bald)〉의 별동대 때문에 숲에서 잔류를 결정했다. 선두 보급대에게 보급을 주기 위한 날짜까지 상황을 늦춘 것이다.
터더더덩!
겹겹이로 쌓아놓은 방패에 투창이 흉악하게 파고들어왔다. 건너편에 있는 병사는 끔찍한 표정을 지은 채 머리도 내밀지 못했다.
인간의 장점이 사라지고 동등한 무기의 질로 일어난 싸움은 당연히 공성전임에도 몬스터의 활약만 드글드글했다.
후우웅!
마른 똥이 잔뜩 묻은 장작이 불에 타오르며 목책 위로 넘어갔다. 하지만 진흙 작업을 했기에 불이 쉽게 붙지는 않았다.
“컥!”
드낙이 던진 투창에 장작을 투척하기 위해서 가까이 온 펄 발드가 그대로 피를 뿜었다. 단번에 낙마해서 나뒹굴었다. 가슴에 박힌 투창을 쥐며 피 묻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X같은 놈들.’
드낙은 사격전만 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적기병이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드낙은 그들 야생마를 조종하지 않았다. 겁먹게 하는 것과 조종하는 것은 또 달랐기 때문이다.
대인 마법인 〈얼어붙은 표적 독수리(Frozen Target Eagle)〉을 통해서도 꾸준히 적을 죽였지만 상대는 몬스터였다. 다음 공격전 때는 더 불어서 올 것이다.
“드디어 물러나는군.”
〈에녹 히터(Enoch Heater)〉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투구를 벗으며 혼잣말을 했다. 3일에 걸친 대공세가 끝나며 조용한 나날이 또 며칠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곳곳이 망가졌기에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목책 수복, 무기의 회수, 시체의 처리, 부상자를 비롯한 피해 확인 등 수많은 일거리가 남아있었다.
‘해자라도 있었다면···’
크게 아쉬웠다. 그저 크기만 한 마을이었다. 많아봤자 호수가 500에 불과한 이 마을은 매일 몰락하고 있었다. 못해도 며칠 내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샌드백이 되어서 얻어터지는 상황의 사이클이 새롭게 돌아오며 〈원탁 회의〉가 열렸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하오. 숲에서도 우리가 신호를 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후방에 기병 전력이라면 킨 가문의 궁기병과 노타블 전차병, 보두앵 가문의 중갑기병 잔여 병력뿐인데, 차라리 이곳에서 후퇴하는 것이 어떻소. 놈들의 무기를 보나, 드낙이 말해준 숲의 상황으로 보나, 지금은 다음을 위해···”
〈찰리 린파이크(Charlie Linpike)〉는 후퇴를 원하고 있었다. 답답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기병전력과 기사의 전신갑주에 있는 마법으로 적을 부러 뜨러야 하는데 〈트롤 토벌대〉의 기병전력은 현재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저쪽이 이쪽으로 오던지, 자신들이 숲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럼 이 마을은 파괴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점을 삼기 위해서 몇 달을 더 소요해야 할 것이오.”
“병사들의 피해 그리고 전략적 패배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후퇴가 정론 아니오?”
“전쟁은 결코 정석으로 하지 않소. 인간은 항상 병력 수가 적기에 더더욱···”
에녹 히터의 말을 린파이크 가문의 기사가 가로챘다.
“더더욱 후퇴해야지요. 하나를 지키려다 둘을 잃을 수 있소.”
원탁이 잠시 조용해졌다. 모두 깊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드낙의 신묘한 힘도 결국 부딪쳐야 했다. 마을의 수호를 위해서 보병을 남기더라도 적이 작정하고 자신들이 빠져나갔을 때 마을을 후려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반대로 후방 보급대의 기병 전력만으로는 이곳에 올 수 없었다. 별동대의 숫자를 효과적으로 줄여서 적을 놀라게 한 드낙의 맹위가 아니었다면 기병전력이 빠져나간 틈을 펄 발드들은 반드시 노렸을 것이다.
오고 가고를 반복하면 5일이 걸리는 인간과는 다르게 상대는 공격만 하면 되었다. 드낙은 당연히 적극적 행동을 촉구했다.
“지금이라도 준비한 봉화를 피어 올리고, 한 판 크게 붙어야 합니다. 매번 늘어나고 있는데, 적 주력을 하루라도 빨리 격파시켜야 합니다.”
“목책을 넘고, 성문을 부수고 놈들이 들이닥쳐도 버틸 수는 있지 않습니까?”
드낙의 말에 모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사실 드낙이 말을 겁줘서 낙마시켰다고 해서 제대로 한 판 붙기가 꺼려졌다. 손실이 클 것 같기 때문이었다. 현 상황에서 전력이 분산된 상태에서 또 보병과 기병을 나누어서 분산시키는 드낙의 전투는 빈틈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야.’
드낙의 퍼텐셜만 믿고 진행하기에는 기사들의 군사적 지식이 너무 뛰어났고, 실전적 노하우도 대단했다.
불파겐이 밀고 있는 전략은 사실 전략도 아니었다. 답답한 이 전쟁에서 화끈하게 한 판 붙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후방 평야 타격대와의 기병전력의 합류 -〉 호로상놈의 펄 발드와의 정면충돌 -〉 승리.
이게 드낙이 미는 전략이었다. 전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했다. 하지만 이기면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후퇴하면 큰 마을이 무너지고, 보급 진지가 사라지니 몬스터들의 헛짓거리에 후방은 계속 교란될 것이오. 나중을 위해서라면 오늘 도박수를 던지는 것이 옳지 않겠소?”
드낙이 닦달했다. 그는 이 빌어처먹을 정도로 사상자가 적게 나오는 싸움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피에 절은 기사로 보일 정도로 전투를 외쳐대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오직 승리하며 왔기 때문이다.
“좋소. 하지만 보병 70명과 기사 2명은 여기에 남아야 할 것이오.”
최소한의 끔찍한 패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스웬슨 보두앵(Swenson Baudouin)〉이 찬성표를 결국 던졌다. 오랜 고민 끝에 드낙을 믿기로 한 것이다. 밖으로 나갈 보두앵 가문의 기병을 다루는 기사가 찬성표를 던지니 남은 두 명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스핀 호위기사는 말을 능숙하게 몰지 못하기에 여기에 남아야 하는데, 함께할 사람이 있소?”
“내가 하겠소.”
에녹 히터 경이 자원했다. 그날 밤부터 거대한 불이 지펴져서 연기가 피어 올라왔다. 그 모습은 평야를 지켜보는 〈옹달샘 숲〉에 있는 〈평야 타격대〉에게도 보였다.
“때가 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크온조차도 평야의 일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생각보다 〈크놀 철광산〉의 저항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모두 자력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총지휘관임에도 최전선에 서야 하는 것이 기사였기에 지휘부가 후방에 놓인 채 모든 것을 지켜보는 선진적 지휘체계는 수립되지 않았다.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평야와의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대충 때려 맞춰야 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의 호흡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폭풍전야(暴風前夜)의 3일이 천천히 흘렀다.
평야 타격대와 보병 십여 명을 이끈 보급대가 숲에서 빠져나왔고, 진흙돼지 마을에서도 30 여기의 기병대가 합류를 위해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부터 그것을 지켜보며 하루의 거리를 유지하는 펄 발드의 무리는 하루가 지났을 때 200기가 넘었고, 2일이 지났을 때에는 500기가 되었다. 전 병력이 모이고 있다고 여겨졌다.
동시에 특출난 〈정예 몬스터〉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마갑을 입은 덩치 큰 야생마에 탄 검은 털의 펄 발드였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숫자였기에 기수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도리어 드낙은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 벌써부터 개박살이 나는 몬스터가 상상이 되었다.
인간들이 믿는 것은 중기병뿐이었다. 경기병들이라도 마갑을 두른 중갑기병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공세를 펼치고 곧바로 행동을 개시하였기에 투창 보유수가 적을 것을 기대했다.
투창에 맞아도 판금갑옷을 입고 있는 중기병은 생존율도 높았다. 그 사이에 드낙이 적을 낙마시켜야 했다. 드낙은 자신이 있었다.
‘영웅적 승리인가, 끔찍한 패배인가.’
스웬슨 보두앵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드낙에게 찬성표를 던졌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몽펠리에 가문을 위해서였다. 드낙의 전투력을 판단할 수 있다면 앞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스웬슨 경은 그렇기에 이 미친 작전에 찬성한 것이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질 수 있었다. 까도 까도 계속해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드낙은 그에게 두려움과 경계심을 주었기 때문이다.
‘너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이번 전투에 여실 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가 투구 속에서 죽음을 각오했다.
*
〈호수 마을〉은 추수가 시작되었다. 추수라고 해도 뿌리작물이 대부분이고, 알도 크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름에 이곳에 도착했기에 키울 작물이 한정되어있었다. 바람이 잘 부는 언덕에서는 〈이실레아 브릴리언트〉와 〈도렌 부대장〉이 잡은 곰고기가 소금을 먹인 채 바람에 말려지고 있었다.
조금 썩은 내도 났지만 이렇게 하면 겨울 내내 먹을 수 있었다.
“방비는 어떻습니까?”
〈게제라스 총관〉은 보름마다 원탁회의를 개최했다. 오늘이 딱 그날이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밝았는데, 역시 가훈(家訓)이 가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처럼 이실레아는 드낙이 부재했음에도 그와의 의리를 지켰다.
“많이 부족합니다. 농지는 벌려놓기만 벌려놓고, 저수지를 지을 곳에는 망루조차 없습니다.”
아직 장원을 받지 못한 이실레아는 게제라스에게도 존대를 썼다. 게제라스 또한 기사인 그녀에게 존대를 했다.
“흠··· 그래도 봄이 오기 전에 저수지를 최대한 갖추고 싶습니다. 이곳의 땅은 정말 지독할 정도로 척박합니다.”
〈버려진 영지〉는 황폐화가 급격하게 일어나있어서 지하수조차 찾기 어려웠다. 호수 마을의 호수는 물고기 양식을 위해서 식수로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이곳 마을에 있는 우물은 고작 다섯 곳뿐이었고, 그중에 3곳은 마을 밖에 있었다.
농업용수뿐만 아니라 식수를 위한 수로의 건설까지 해야 했다. 당연히 까마득했다. 하지만 식수는 멀리 있는 우물을 통해서 급수하면 될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농업용수였다.
이실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방비가 허술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다. 게제라스의 내정 발달 욕심은 지나칠 정도였기에 현재 병사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뛰어넘는 면적을 방위하고 있었다.
괜히 도렌이 이실레아를 따라가서 곰 같은 야수를 토벌하는 게 아니었다. 봄이 오면 굶은 곰이 아주 개지랄을 떨 것이 분명했다. 개체수를 지금 당장 줄여놔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꾸벅. 꾸벅.
내정과 군사 두 곳에 인력을 제공하는 도렌은 회의하는 중에도 졸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가만히 놔두었다.
‘생각보다 난놈이야.’
불만이 있어도 참고,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하는 도렌은 1등 가신감이었다. 요령이 붙는 게 느렸지만 한 번 배운 것은 능숙했다. 하나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이 들었지만 한 번 하나를 배우면 잊지는 않았다.
대기만성(大器晩成) 형에다 성품도 얌전하다. 이런 부하는 무조건 중히 여겨야함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덕에 이실레아는 군사적으로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추수가 끝나면 방위를 크게 줄여서 호수 마을과 저수지 건설에만 병사를 배치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병사들의 피로도도 줄일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수지는 최우선 과제입니다.”
게제라스가 감사를 표했다. 사실 지금 그런 양보조차도 이실레아가 세울 공이 사라지는 것이기에 대단한 양보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내정적으로 〈버려진 영지〉가 날갯짓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도렌 부대장에게 잘 전해주십시오. 저는 그럼 이만···”
게제라스가 빠르게 회의장을 나갔다. 할 말은 다 했고, 무엇보다 이실레아가 도렌에게 자꾸 눈길을 줬기 때문이다.
‘잡아먹겠네. 잡아먹겠어.’
게제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미인(美人)의 미인계(美人計) 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없었다.
두 명만 남은 상태에서 이실레아가 졸고 있는 도렌의 뒤로 가서 그를 껴안으며 손을 잡았다.
“엇.”
도렌이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얼굴을 발갛게 하고는 일어났다.
“얼굴이 붉은걸?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미, 미치겠네.’
도렌이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화끈거리는 얼굴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서 이실레아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스킨쉽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녀가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외모로 보나, 몸매로 보나, 수많은 병사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이실레아 브릴리언트는 도렌의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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