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8 <-- 트롤 토벌 -->
미남이라고 말했을 때 열 중 열이 고개를 끄덕이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지나치는 모습을 지닌 〈마들린 제스트(Madeline zest)〉과의 만남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특별해진 이유는 제스트 가문의 노림수 때문이었다. 마들린 제스트는 자신의 중요한 시간을 백금 왕가에 대한 주제로 사용했다. 자연히 드낙은 그 부분에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북부 가문들이 모인 곳에서 백금 왕가에 대해서 묻다니, 무슨 의미입니까?”
“이렇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돈 때문입니다.”
“돈?”
마들린 금으로 된 귀걸이를 찰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궁한 것으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들 하는 짓입니다. 이곳에 온 그분이 돈을 그렇게 뿌리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서부터는 누구나 가볍게 드낙 경에게 백금 왕가에 대해서 물을 겁니다.”
‘왕족 놈이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그런 걸 왜 나한테 말씀하십니까? 괜찮습니까?”
“당연한 걸 물으십니다. 그럼 드낙 경에게 숨기고, 백금 왕가 편을 듭니까? 한 마디라도 좋습니다.”
어차피 백금 왕가의 귀에 들어갈 소리였다. 하지만 드낙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긴 합니다.”
“그것은 증오 때문입니까?”
“400년 동안 응어리진 증오를 사람이 품고 있으면 그게 사람입니까?”
마들린이 봄꽃이 핀 것처럼 눈웃음 지으며 웃음소리를 쾌활하게 냈다.
“그건 그렇습니다. 망령이지요.”
망령.
드낙은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일을 기억했다. 앙상하게 변해버리고 오직 증오로 물들어 사지분간 못한 채 덤볐던 세파리아스의 망령이었다. 그가 이성을 잃지 않았다면 죽은 것은 드낙이었을 것이다.
그가 400년이 넘도록 짊어지고 있던 원한은 대영웅을 오물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검은 꿈에서 본 세파리아스와 〈망령〉이 다른 이유도 그러했다.
“드낙 경께서도 개인 사병이 두 명 아닙니까?”
“호위 기사를 빼면 그렇습니다.”
마들린은 제법 좋아하면서 동질감을 느끼듯이 병력수가 적으면 받는 대우를 이야기했다. 드낙은 귀중하게 들었는데, 이것도 큰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별 의미가 없는데.’
기병+몬스터+휴머노이드의 뛰어난 종족값을 지닌 〈헤드스 하이에나〉에게 호되게 당하고 난 뒤로 드낙은 자신만의 전투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세파리아스는 아니었지만, 세파리아스라는 맹장(猛將)형 장수가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정줄 놓고 그런 짓을 자신도 모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스포츠 세계에서 약물과도 같았다. 10의 노력을 1의 노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물약의 사용은 스포츠인들에게 마약과도 같은 일이었다.
남들이 어렵게 가는 일을 목숨 하나 상남자처럼 척 내놓고 쉽게 가는 것이 세파리아스였다.
“함께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토벌에 있어서 그래도 구색은 갖추지 않겠습니까?”
드낙은 흐흐 웃으면서 경박하게 기세를 뿜어냈는데, 마들린 제스트의 혈색이 단번에 나빠졌다. 세파리아스에게도 쫄기 바쁜 드낙이었지만, 평범한 기사 따위는 그저 피비린내 나는 기세로 압도할 수 있는 것이 드낙이었다.
“지금까지 혼자서 대부분의 일을 해결했습니다. 호위 기사가 있는 이유는 제 뒤를 봐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고, 개인 사병 2명은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병사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마들린이 눈을 내리깔며 손수건을 꺼냈다. 손이 떨리는 것을 보니 짐승 같은 날것, 그 자체의 기세에는 약한 면모를 보이는 게 훤히 보였다. 조금 튀어나온 땀을 닦으며 마들린이 드낙의 눈치를 보며 변명했다.
“옛날에 호환(虎患)을 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순식간이었죠. 10살 때였는데, 호랑이가 제 다리를 물고 숲 안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불과 10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죠. 호위 병력들이 있었기에···”
“저런··· 끔찍했겠습니다.”
“흡.”
마들린 제스트가 콧물을 조금 흘리며 그것을 훔쳤다. 드낙은 그때의 기억을 나게 할 정도로 범(虎)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지, 짐승 같은 기사로다. 기세가 이리도 난폭할까.’
제스트 가문의 기사는 그렇게 허둥지둥 빠져나갔다. 그 뒤로 드낙은 가문들이 하나같이 백금 왕가에 대해서 묻는 것을 보며 어처구니 없이 웃음 지었다. 대놓고 이 짓거리를 하는 것이 아니꼬웠다.
‘자신이 나보다 위에 있다는 것처럼 굴지 않는가.’
기분이 나빴다. 자신은 지금 태풍의 눈이었다. 그것을 가볍게 여긴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밀정을 보내는 것도 아니라, 한두 마디 얻고 오라는 것뿐이었다. 몽펠리에 가문이 도리어 경계심을 가지는 것이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게 〈백금 왕가〉의 스타일이었다. 보여주는 게 나은 것은 그냥 보여주고, 정말로 숨기는 게 좋은 것은 숨긴다. 이 일은 철저하게 분리되어있었고, 왕족끼리도 숨긴 일에 대해서는 서로 알지 못했다.
그 덕에 문제가 생겨도 꼬리를 자르는 것이 쉬웠다.
‘방계라더니··· 이득이 될 짓은 그냥 하는구나.’
몽펠리에의 방계라도 왕족에게 청탁을 받으면 실행에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아크온이 비호해주지는 않는 듯했다. 아니면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비록 말에 불과하지만 일이 제법 진행되고, 윤곽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파이룬 가문의 〈도로 사업〉은 드낙이 반드시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버려진 영지와 가장 인접한 가문이 파이룬 가문이었고, 그다음이 〈토치라이트 가문〉이었다.
자연히 드낙을 묶을 거리가 많았다. 남부 왕국이 기를 써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이점을 가지기란 힘들었다.
오히려 이번 일을 부수입처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왕족이 베풀어도 결국에는 자신들의 편을 들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피로 이어지고, 비전으로 이어진 것이 직계와 방계였고, 북부의 가문들이었다.
“한 번 만나고 싶을 정도요. 별다른 감정은 없소.”
드낙은 시종일관 그렇게 대답했다. 만나서 정실로 만날 생각이었지만 조금 다르게 변했다.
‘첩으로 달라고 해야지. 짜증 나는 놈들이야.’
물밑 작업을 너무 대놓고 했다.
“〈스웬슨 보두앵(Swenson Baudouin)〉이오. 보두앵 가문의 삼남이오.”
“반갑소.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소. 자리가 빛날 것이오.”
드낙의 말에 스웬슨은 목례만 한 번 더 할 뿐이었다. 그는 과묵한 기사였다. 그리고 단번에 장식되었으며 은으로 이루어진 목함을 척 올려놓았다. 제스트 가문 또한 주고 간 것이었다.
상인들이 은화가 든 목함이었다면, 기사들은 은으로 된 장식 목함이었으며 그 내용물은 제각각 달랐다. 제스트 가문의 경우에는 비싼 약초였다.
“앞으로 몽펠리에의 외척이 될 불파겐 아니오? 장남인지 차남인지 생각을 해두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게 무슨 소리요?”
“차기 가주 말이오. 하는 것을 보면 아크온 경에게 줄을 대었던데, 그분은 가주에 뜻이 없소. 잘 하시리라 생각하오.”
“음!”
드낙은 민감한 문제를 들이미는 스웬슨 보두앵을 보며 할 말을 아꼈다. 그도 답변을 바란 것은 아닌지 선물만 주고, 보두앵 가문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내어주고는 그대로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제 할 말만 하고 가는 것을 본 드낙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방계 중에서도 힘이 있는 3가문인 보두앵, 린파이크, 히터는 서로 다른 후계자를 밀고 있었다. 보두앵은 차남. 린파이크는 삼남. 히터는 장남인 아크온이었다.
모두 벌써부터 그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거나, 생각해볼 것을 기대했다. 드낙으로서는 짜증 나는 일이고, 귀찮을 뿐이었기에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방계 다섯 가문도 은근히 지나가는 투로 묻기도 해서 곤란했다.
‘몽펠리에 가문도 파벌이 있구나.’
에크미 가문은 데보네이어 가문을 싫어했고, 데보네이어 가문은 에크미와 하모니를 싸잡아서 험담을 하기도 했다. 특히 킨 가문의 경우에는 하모니 가문에게 가족을 잃은 적도 있었다.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그나마 노타블 가문은 전체적으로 잘 어울렸지만 동시에 평범했다. 몽펠리에의 방계도 아닌 슈퍼브 가문은 토벌에서 힘을 합하려고 드낙에게 왔다가 돌아갔다.
드낙이 혼자서 해결하는 종류의 기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가문이 유려하고 고풍스러우며 가치가 높은 은함을 선물로 주었기에 그 내부의 선물까지 생각하다면 그것만으로도 감내할 만남이었다.
‘이래서 출세를 해야 하구나.’
추석마다 수북하게 쌓이는 선물을 받는 고위직 기분이었다. 물론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기사 가문과의 면담은 짧게 그리고 자주 2일 동안 더 이어졌다.
서로가 밀고 있는 상단과 상인에 대해서 소개를 놓으는 움직임도 보였다.
당연히 드낙은 파이룬 가문이 있었기에 내켜 하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분 나빴던 일은 킨(keen) 가문이 버려진 영지에 있는 석재를 원한다며 그냥 금화 1천 닢으로 〈엘라한의 돌산〉을 원했기 때문이다.
“아직 그곳이 남아있다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소. 금화 1천 닢이면 어마어마한 돈이 아니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내가 어디 촌구석에서 있다가 툭 튀어나온 지 아시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드낙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치자 킨 가문의 기사가 몸을 들썩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몇 번이나 사과를 했어야 할 정도였다. 하루에도 순차적으로 방문하며 하나씩 던지고 가는 기사 가문들은 드낙에게 점점 골치덩어리였다.
‘빨리 원탁회의를 아크온이 열었으면 좋겠다. 이미 보급이 끝난다고 말한 시간보다 2일이나 더 지났는데.’
킨 가문의 기사가 빠르게 저택을 나가는 것을 창을 통해서 본 드낙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순찰자들은 어김없이 드낙에게 보고를 올렸다.
“용병들의 밀정이 하루에도 10명이 옵니다. 이놈들은 밥 먹을 때도 쪽지를 보내옵니다.”
드낙은 순찰자들에게서 손바닥만 한 누런 종이를 받았다. 뭔가 질감이 무르고, 부서질 것 같아서 조심스러울 정도로 내구력이 형편없는 종이였고, 변색도 심했다.
“하나같이 민감한 것들이군.”
백금왕가의 겉으로 이루어지는 움직임은 연막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런 용병들이 주는 쪽지가 진짜였다.
파이룬 가문을 통수치는 사업내용. 몽펠리에 비전과 불파겐 비전을 바꾸자는 내용도 있었고, 왕가 쪽에서 연락을 원한다는 것도 있었다. 살해 협박도 있었는데, 몽펠리에 가문에서 꺼지라면서 온갖 욕을 빼곡하게 썼다. 또 남부 귀족들의 이름도 거론되어있는 쪽지도 있었다.
‘개판이네.’
생각보다 귀족가문들은 명예를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구질구질했다. 방식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드낙이 혀를 찼다. 귀족들의 이런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며 이스핀이 리액션을 취했다.
“돈맛 때문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술이나 마셔야겠다.”
이스핀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시녀가 술을 가져왔다. 드낙은 가장 먼저 술잔을 들어 올렸다. 포도주가 담겼고, 드낙이 거침없이 마셨다. 이스핀 또한 술잔에 입을 대었는데 드낙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독이다! 마시지마!”
“푸우웃!”
이스핀이 뒤로 자빠지면서 입에 문 포도주를 허공에 뿜어냈다. 순식간에 저녁식사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음 날에 술을 따른 시녀와 포도주를 유통한 일꾼부터 그 책임자까지 모조리 지하감옥에 갇혀서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모두 자신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해줄 수도 없었다.
증거가 없는 세상이었다. 협박을 받더라도 그것을 이행하면 죽음 뿐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줘야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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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야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