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5 <-- 기어오르는 발바룽 -->
성주가 일을 보는 큰 원탁이 있는 큰 방과는 다르게 제법 작은 수준의 객실에서 이야기가 이루어졌다. 여자인 것을 생각해서인지 방에는 수행원이 두 명이 구석에 배치되어있었다.
드낙의 눈치를 본 배치였다. 그렇기에 그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안젤리카와 마주 보며 앉았다. 에오윈 가문의 혈통은 눈에 검은 점 같은 것이 다수 박혀있다는 것이었다. 이질적이었지만, 매력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다.
이목구비가 크고, 특히 눈이 들어가서 인상이 확 살아나는 안젤리카는 큰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때문에 미인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했다. 입술은 얇아서 여성스러움이 돋보였다.
그녀는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 저희들의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이미 모든 방향성을 정해둔 것이 에오윈 가문인 듯했다. 괜히 고위 기사를 배출한 가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현 상황을 가장 잘 아는 것이 그대들인데, 내가 돌발적인 작전을 하면 서로 분열된 꼴이 아니오? 걱정 마시오.”
드낙이 호언장담했다. 그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딸이 유력가와 결혼하면 껑충 뛰며 좋아하는 그런 범인(凡人)이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초장부터 찍어누르고 오만하게 가는 것은 세파리아스였다.
특히나 곁에 세파리아스를 두고 있는 드낙은 오만함과 거만함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세파리아스는 반면교사였다.
“중태에 빠진 오빠 덕분에 병사 다섯이 죽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장례를 치렀지만, 그들의 원한은 아직도 남아서 구슬프게 울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오. 하지만 필요한 일이기도 했소. 계속 웅크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았소?”
드낙이 장남 랄프 에드윈을 변호해주었다. 안젤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위기에 닥치면 돌파구를 원한다. 에드윈 가문은 꿋꿋하게 웅크렸고, 기회를 봤기에 밖으로 나갔다.
〈기어오르는 발바룽〉의 역량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났을 뿐이었다.
“중태에 빠진 오빠가 깨어나면 정찰을 나가며 얻은 정보를 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정신을 잃고 있어서 언제 깨어날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저희들은 새로이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어떤 것을 생각하셨소?”
“기만술입니다. 저희들의 실책을 바탕으로 삼아 놈들을 엮어낼 것입니다.”
안젤리카는 피맺힌 감정을 담아서 말했다. 그 감정은 절로 드낙에게 전해졌다. 원수를 앞에 두고 칼을 뽑아든 자의 감정같이 절벽 끝까지 올라선 자의 절박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감정은 드낙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성벽에 보이는 병사들의 수를 조금 더 줄였습니다. 헤드스 하이에나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똑똑하기 때문에 반절로 줄이면 바로 저희들의 기만술이 들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안젤리카가 설명을 주르륵 해나갔다.
“그들이 성벽을 넘으면 후퇴를 하여 외성지역에서 싸움을 진행할 것입니다. 골목 곳곳에 마름쇠와 말뚝을 박아놓았습니다.”
드낙이 그 안의 허를 찔렀다.
“수틀리면 빠지면 되는 것 아닌가? 후방을 막아야 하지 않겠소?”
“저와 결사대가 성벽의 근처에서 숨어있다가 다시 성벽을 먹고, 성문에 장애물을 설치해서 막아놓을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끝장을 보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준비한 인간이 유리했다. 스피드를 내기 힘든 것이 외성지역이었다. 대로를 제외하면 집들이 많아서 스피드를 내면 함정을 못 보고 지나치기 쉬웠고, 골목은 좁아서 각개격파 당하기에 좋았다.
전력 차이가 나도 승리할 조건이 충족되는 전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대단한데. 역시 고위 기사를 배출한 가문답다.’
백금 왕가 때문에 파이룬 가문에서 내쳐져서 이런 척박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실로 대단한 전략과 전술이오. 전운이 크게 감돌고 있고, 폭풍전야처럼 주변은 조용하기 그지없으니. 놈들은 반드시 성벽을 넘을 생각을 하고 있으며 준비하고 있을 것이오.”
안젤리카가 드낙의 평가에 크게 좋아했다. 대부분 자신이 군사서적을 뒤지면서 고안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선대의 군사학에 대한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무력을 높이는 데는 함께 노력했지만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 신부로서의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 군사학에는 소홀했던 것이 안젤리카였다.
그녀가 배워야 할 분야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평범한 재능은 아니었다.
드낙은 대저택에 방을 받았다. 이스핀 또한 개인실을 받았고, 그들의 개인사병인 정찰 순찰자들은 방 하나만 배정받았다. 차별을 두어 다른 두 사람을 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방은 많았지만 그것이 귀족의 방식이었다. 여유롭다고 해서 다 내어주지 않았다. 수준에 따라, 필요에 따라서 판단을 달리했다.
드낙은 그 세세한 차별조차 깨닫지 못했지만, 이스핀이 그에 대해서 말하자 그제서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많이 있다고 많이 내주면 망하기 딱 좋다는 어디서든지 말할 수 있는 조언을 체감했다.
말로 100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큰 변화와 깨달음을 주는 것이 딱 이짝이었다.
짐을 모두 정리한 드낙은 이스핀을 대동하고, 조용한 계곡 성채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상황은 전보다 더 악화되었는걸.”
곳곳에 함정이 준비되어있어서 주민들은 다른 곳에 따로 모여있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성채 내부의 풍경은 에오윈 가문이 관리하는 인구수가 얼마나 적은지 알 수 있었다. 대저택의 지하에 있는 피난민들의 숫자도 500명에 불과했다.
‘병사가 아닌 자들도 자경단이나 민병대의 일원으로 무기를 들고 있을 정도니.’
쌍둥이 성채의 동쪽을 계곡이라는 좁은 곳을 통해 막아주는 곳이었기에 몽펠리에의 지원은 계속될 것이지만 이미 영지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할 정도였다.
‘아!’
드낙은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나가자 몽펠리에의 한 수를 읽어낼 수 있었다.
‘고위 기사를 배출한 가문을 받아들여도 골치가 아팠겠지. 성장하기 힘든 영지를 내어주고 자신들의 지원금으로 먹고살도록 만들어서 목줄을 채웠구나.’
〈몽펠리에〉에 완전히 귀속될 때까지 목줄을 채워놓은 것이다. 세대를 계속 거치면서 몽펠리에의 지원금으로 살아가다 보면 친 몽펠리에 성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먼 세월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훗.’
그걸 읽어낸 드낙은 자신을 칭찬했다. 우쭐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 컨디션이 좋았다. 몇 번의 선택을 자주적으로 선택하면서 게으름과 귀찮음으로 굳어진 머리가 말랑말랑해졌다.
성채를 한 바퀴 돈 다음에는 저녁을 먹었다. 성주와 안젤리카 그리고 몇 안 남은 베테랑 병사들과의 저녁 식사였다. 이스핀 또한 참가했는데, 전신갑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 성이 없습니다. 그냥 이스핀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이스핀은 자신의 성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에 성주가 물었다.
“어떻게 전신갑주를 하사받았나?”
“드낙 님에게서 비전을 전수받았기 때문입니다.”
“헉.”
다른 이들이 크게 놀랐다. 사자의 갈기처럼 거칠며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드낙은 이야기꾼에게서나 들었던 불파겐 가문의 후예였다. 그 비전을 받았다는 것은 곧 불파겐 가문의 일원이며, 방계라는 소리였다.
“대, 대단하군. 일개 용병에게 그런 대단한 은혜를···”
“사람이 중요하지, 신분이 중요합니까? 그리고 그때는 절박했기도 절박했습니다. 지금 제가 받은 토지에는 문인부터 몰락한 자유기사까지 제 가신이 되어있습니다.”
“오···”
이스핀 덕분에 드낙은 자신의 토지, 가신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에는 이스핀을 단련시켜주었다.
카가가강!
덩치는 이스핀이 컸지만 되려 밀리는 것은 이스핀이었다. 이스핀은 자신이 왜 밀리는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강함의 묘리〉에 대한 성취가 크게 다르다!’
드낙의 타격점에 뭉쳐지는 극악스러운 난이도의 모든 힘의 방향이 송곳처럼 집중되는 모습을 이스핀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또한 칠주(七主) 중 강(强)의 묘리를 드낙에게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따당!
특히 드낙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강함의 묘리를 사용할 줄 알았는데, 족적(足跡)의 자국만 봐도 깊게 팬 것과 작게 팬 것이 구경하는 케이슨 성기사의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기술의 정수였다. 보고도 왜 저렇게 다른지, 어째서인지 강함의 묘리를 배우지 못한 자는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의 깊이〉가 존재했다.
‘난 아직도 한참 부족하구나.’
이스핀은 드낙이 보여주는 강함의 묘리를 체감하며 자신이 판 우물이 얼마나 얕은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드낙과의 대련은 지극히 배울 점이 많았다.
“큽!”
투구에 정통으로 드낙의 주먹이 꽂히자 이스핀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드낙이 고함을 질렀다.
“뒤로 물러나면 예기가 꺾인다. 분위기가 상대에게 돌아간다! 전투의 흐름을 잘 봐라!”
물러나는 이스핀을 가슴으로 그대로 들이받아 뒤로 넘어지게 하면서 드낙이 롱소드로 목을 겨누자 이스핀이 대자로 뻗었다. 투구 밑으로 흐르는 피가 어깨 보호대를 지나 주륵 흘러내렸다.
“피해도 크게 주지 못하는 공격도 쓰기 나름이다. 상대의 흐름을 끊을 수 있다면, 너도 일류다.”
싱거울 정도의 한 수였지만, 그 속에 깃든 〈전투의 흐름〉은 일류무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기도 했다. 단순히 주먹을 투구에 꽂는 것으로 상대의 흐름을 끊게 만들고, 신체를 불편하게 여기게 하여 수습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비전이나 다름없었다.
“코, 코피가···아이고.”
이스핀이 약한 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뒤로 빠져나갔다. 드낙과의 대련은 지나칠 정도로 실전적이었다. 덕분에 배울 것은 많았지만 자잘한 부상은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케이슨 성기사 또한 그 대련을 지켜보며 노하우를 배웠다.
신성력이 번쩍이며 이스핀의 코피를 멎게 만들고, 고통을 지워주었다.
스르릉.
드낙이 검을 집어넣었다. 고른 호흡과는 다르게 이스핀은 〈전투의 흐름〉이 빼앗긴 채 대련을 이어나가서 거친 숨을 내뿜고 있었다. 극명하게 갈리는 모습에 케이슨 성기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똑같아 보이는 전신갑주를 입고도 싸움의 차이가 천지차이였다.
‘기사는 그저 기사일 줄만 알았는데, 기사끼리도 실력 차이가 저렇게 심하다니.’
기사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능력치는 개체별로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이었다. 이스핀은 투구를 벗고, 전신갑주를 탈착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대야에서 물을 퍼서 뒤엎어 썼다.
“후아아아!”
“어흐흐!”
냉수로 땀을 씻겨내고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나서야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호위 기사란 놈이, 날 지치게도 못 만들다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라!”
“예!”
이스핀은 대답은 곧잘 했다. 케이슨 성기사는 대련이 끝나자 서둘러 일어났다. 보살필 환자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력이 그들 모두를 감당하지 못해서 상태를 조금씩 호전하는 정도에 불과하였기에 매일 출근하듯이 대저택의 지하로 향하고 있었다.
잘 지내는 것 같았지만, 3일이 지나고 4일째에 드낙의 인내심이 무너졌다.
‘언제까지 대기만 타? 이거 못 참겠다.’
언제 에오윈 가문의 전략을 그대로 이행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잊은 것처럼 안젤리카 에오윈을 찾았다. 그녀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녀를 통해서 약속을 박살 내고 밖으로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5435자
평추코! 다양한 의견 추!
코멘트로 드낙 보유 능력 올리겠습니다. 능력이 아닌 것도 있으니 감안하세요. 배운 것이나, 노하우 같은 것들도 적어놓은 것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