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4 <-- 기어오르는 발바룽 -->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가 자신보다 풍족한 삶을 산다면, 그것만큼 분노할 일이 없을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살려고 버둥거리는 하찮은 것들이 이룩한 것이 자신의 종족보다 높은 탑을 이루고 있는 것만큼 자괴감이 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때가 왔다.’
스스로를 깨우쳐 자신을 〈기어오르는 발바룽〉이라 이름지은 〈헤드스 하이에나(Heads Hyaena)〉를 이끌고 있는 정예 몬스터는 굴에서 조용히 조잡하게 구운 도기에 담긴 염료에 손을 대었다.
모닥불의 옆에는 머리가 잘려 작대기에 꽂혀진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병사의 머리가 있었다.
‘인내심 없는 인간 놈들. 그들을 무너뜨리고 〈어머니〉를 우두머리로 삼아 우월한 존재가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
1:1로 싸우면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기병의 속성을 지닌 헤드스 하이에나를 정규병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성벽을 쌓아올려 웅크린 놈들은 그런 〈웅크리는 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발바룽에게 있어서 인간은 그 정도로 하찮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물론 대단한 자도 있지만, 그런 대단한 자의 피가 발바룽의 창에 묻어있었다.
푹찍.
염료를 거침없이 피부 곳곳에 발랐다. 붉은 염료는 피를 연상케했다. 공포스러운 문양은 기괴함마저 가지고 있었다. 초월의 힘이 담겨 있지 않은 그저 워페인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몸에 그리며 발바룽은 〈조용한 계곡 성채〉에 대한 총공세를 펼칠 마음을 잡았다.
각오를 다졌다.
네 발 달린 짐승이라도 성벽을 기어올라갈 수 있도록, 필요한 도구는 이미 준비되어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착오는 단 하나였다.
인간이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종족이라는 것이다.
강철을 두른 전사라도 포위되면 그 단단한 갑옷이 벗겨지는 법이었다.
“하하! 하하하!”
꽁지 빠지게 자신의 부하를 버린 채 도망친 강철의 전사를 생각하면 웃음이 차올랐다. 발바룽은 거침없이 손을 움직여서 머리가 꽂힌 나무 작대기를 잡아서 단번에 모닥불에 집어넣었다.
고기가 타는 냄새가 굴 안에 가득 퍼져나갔다.
스으읍.
그것을 맡으며 발바룽은 인간들을 학살할 때를 상상하며 희열을 느꼈다.
*
쌍둥이 성채 야습이 지나가고 아침해가 떠올랐다. 밖은 여전히 분주했고, 난잡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드낙은 그 분위기 때문에 날이 선채 보통 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새벽 수련을 해야 했다. 이제 기사의 역량을 대충 올려도 될 것 같다는 게으름이 있었지만, 세파리아스의 거듭되는 조언에 계속 수련을 하고 있기는 했다.
‘아직 닿지 않은 경지가 있긴 있지.’
비전, 탄력적인 파괴의 완벽한 운용술.
물이 검에 묻으면 분무기의 작은 입자처럼 팡하고 터지게 만드는 원심력과 탄력성을 이용한 아름다운 파괴술.
인간의 몸처럼 불파겐 가문의 보검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극의(極意). 검은 꿈에서 그것도 어제 그것을 전해 듣고, 눈앞에서 보게 된 드낙은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이스핀의 말로는 흘러버렸지만, 검은 꿈에서 직접 그 파괴력을 보여주는데 몸이 안 달아오는 것이 이상했다.
땀을 빼고, 아침 식사를 했다. 이스핀이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케이슨 성기사는 야습 직후 신전에서 따로 지내다가 다시 드낙이 머무는 곳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안 봐도 뻔하지.’
이권을 위해서 시민을 죽인 지역 신전이다. 진절머리가 날 것이다. 그 목숨값을 〈성기사 케이슨〉은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는 똑똑하기 때문에 단편적인 정보들만으로도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 양피지도 받았습니다. 제가 입고 있는 전신갑주의 이름은 〈거인의 전신갑주〉랍니다.”
“오. 그래?”
드낙이 흥미를 가졌다. 전신갑주는 언제나 재미난 이야깃거리였다.
“본래는 방계에게 10년마다 수정 및 강화 작업을 하여 재생산에 들어가는 보급형 전신갑주인데, 특별히 내어준 것이라고 집사가 결코 전신갑주의 가슴 문양을 지워서는 안 된다며 당부를 그렇게 하고 갔습니다.”
“새로 문양을 하려면?”
“왼쪽이나 밑에다가 하랍니다. 위에 하면 그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꼴값떠네.’
드낙은 그 생각을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자신의 가문 위에 다른 문양이 와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몽펠리에의 가문 일원이 느끼는 자부심이었다. 그것은 힘이었다. 남들이 몽펠리에를 위협하면 목숨을 바쳐 막을 것이고, 적대할 것이다.
좁은 범위의 민족성과 비슷했다.
드낙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은 민족성에서 나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신라가 통일을 하고도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나올 때에도 백제의 이름이 깃발 위로 올라섰다. 그것은 끈질긴 명줄을 지닌 가치였다. 그 또한 그런 끈질긴 명줄을 지닌 것을 높이 세워야 했다. 그렇기에 마음속으로만 몽펠리에의 치졸한 짓거리를 욕했다.
“흙을 주로 사용하는 마법이라 마력 소모가 적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마법의 형태를 주변 흙을 이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준비 시간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가장 보급형 전신갑주로 쓰기 용이한 것이 〈거인의 전신갑주〉였다.
“좋네. 마력 소비가 적으면 한 번의 전투에 여러 번 생각 없이 사용할 수 있거든. 마법 쓰면 끝나고 나를 찾아와. 충전시켜줄 테니.”
“드낙 님만 믿겠습니다.”
이스핀이 히히덕거리면서 기분 좋아했다. 활기차고 행복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금, 만금을 줘도 자격이 안 되면 못 가지는 것이 전신갑주였다. 드낙에게 비전을 받고, 그를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받지 못했을 터였다.
특히나 이실레아 브릴리언트도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방방 뛸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드낙 또한 미소를 지었다. 뒷골목 깡패 새끼를 키웠는데 제법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점심 전에 그들은 〈조용한 계곡 성채〉로 다시 떠나야 했다.
“케이슨 성기사. 그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따라가겠습니다. 이곳의 지역 신전은··· 저와는 조금 뜻이 달랐습니다.”
드낙의 개인사병인 것처럼 꾸며진 〈정찰 순찰자〉들도 2명 함께했다. 도노 또한 드낙의 옆에 섰다. 전날 밤에 병사들을 이용해서 라바도 몇 마리 뜯어먹은 것이 도노였다.
‘이제 털색깔도 거의 바뀌었네.’
갈색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새하얗게 되어있었다. 이제 〈갈색 늑대〉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덩치 또한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었다.
“드낙! 하하하!”
아크온은 마중을 나와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문에게 있어서 드낙은 중요한 인물이었다. 직접 밖에 나올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왜 직접 나오고 그래?”
서로 말을 트면서 친분을 과시했다. 짐마차는 새로운 것으로 바꿔져 있었고, 제법 비싼 티가 나는 푸른색의 천이 테두리에 걸쳐 있었다. 물건은 마법 천막으로 덮여져 있었는데, 마법 천막 또한 한 번 세척해서 깨끗했다.
말은 전과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확 짐마차의 허름한 모습이 사라졌다.
“조용한 계곡 성채에서의 일이 끝나면 바로 쌍둥이 성채로 오는 게 좋다. 토벌은 어차피 여기서부터 시작이니까. 내 가문이 북부를 꽉! 잡고 있다는 말이지.”
드낙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북부의 상황 때문에 그나마 남쪽에 치우친 몽펠리에가 완전히 대장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몽펠리에의 역량과 수준 또한 높다는 것을 잘 알았다.
5명으로 이루어진 드낙 일행이 다시 쌍둥이 성채를 떠났다. 그들의 목적지는 〈조용한 계곡 성채〉였다. 그곳에 있는 〈정예 몬스터〉를 잡는 것이 드낙의 목표였다. 물론 다른 헤드스 하이에나도 모조리 쳐죽일 생각이었다.
업(業)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는 길은 평탄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는데, 드낙은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
‘전운(戰雲)이 감도는데.’
폭풍전야(暴風前夜)처럼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계곡은 조용했다. 새도 보기 힘들었고, 짐승의 울음소리를 밤에 듣기도 어려웠다.
몬스터와 인간의 전투가 바로 코앞에 있는 기분에 휩싸여서 드낙은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감각이 전보다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게제라스 없이 머리를 쓰면서 자신의 처지를 체감하게 되어서 용병 시절의 드낙이 지녔던 절박함이 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머리에서 땀이 날 정도로 계략을 준비한 드낙의 폼이 본래의 폼으로 올라간 것이다.
‘에오윈 가문 또한 고위 기사를 배출한 가문이랬지? 그 가문의 둘째 딸도 첩으로 들이겠다고 말해봐야겠다.’
닥치는 대로 개판이라면, 고위 기사를 배출한 가문도 끌어들이는 것이 좋아 보였다. 특히나 이곳은 영지 자체가 척박해서 제대로 고개를 펴지 못하고 지내는 듯했기 때문에 드낙을 따라나설 공산이 컸다.
‘다 와. 다 모여!’
드낙이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세파리아스는 드낙의 처세에 크게 웃었다. 딱히 백금 왕가에 대한 증오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증오는 드낙이 아니라 진정한 불파겐의 후예가 해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문을 열어라!”
익숙한 전신갑주를 본 병사가 거침없이 소리쳤다. 성문이 열리고 잔뜩 굳어있는 표정의 병사가 드낙에게 경례를 올렸다.
“성주님께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앞장서게.”
드낙 일행은 곧바로 병사의 안내에 이끌려 대저택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전과 다르게 경비가 삼엄했다. 노병은 있었지만 대저택을 순찰하는 병사가 뒤로 보였고, 대문도 단단히 기강이 잡힌 병사가 있었다.
“드낙 불파겐 경이시다.”
“바로 들어가시오.”
프리패스로 들어가서 성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수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드낙이 모습을 들어내자 크게 환영해주었다. 양손으로 드낙의 손을 붙잡을 정도였다.
“잘 왔네. 빨리 와주어서 고맙네.”
〈발그 에드윈(Bulg Edwin)〉의 환대는 드낙의 경계심을 올리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에오윈 가문〉의 혈통을 크게 받지 못한 성주였기에 힘 앞에서 비굴해지는 면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과 다르게 경비들이 매우 삼엄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소가주인 내 장남, 랄프가 지금 중태에 빠져있소. 포션으로 겨우 안정화를 시켜놓았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소···”
그 말에 드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투구를 벗고 있었기에 표정이 절로 드러났다.
“아니,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소?”
“헤드스 하이에나들의 정보를 캐려고 나갔다가 그만 놈들의 매복에 걸려 병사 다섯을 잃고, 장남 홀로 도망칠 수 있었소. 모든 것이 그날 무너졌소. 이제는 성채의 수비조차 불안할 지경이오.”
고작 다섯이 죽은 것에 불과하지만, 하루 24시간을 지켜야 하는 성벽이었다. 인원이 조금만 빠져도 금방 표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정되었다니, 다행이오.”
드낙의 위로에도 성주 발그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헤드스 하이에나는 특별한 모습을 보이고 있소?”
“전혀. 그래서 더 두렵소. 일반적인 몬스터의 행동이 아니니, 예측을 할 수가 없소. 내 머리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오.”
발그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 위를 휘적거리며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성주로서의 카리스마도, 자신감도 잃었다. 아들의 중태가 그를 고꾸라뜨린 것이다.
“끔찍한 나날만 계속될 뿐이오.”
드낙이 그 모습을 보더니 원탁을 주먹으로 쿵하고 후려쳤다. 어찌나 노후되었는지 원탁이 그대로 두쪽으로 박살나서 쩍 갈라졌다.
쾅!
‘어우씨. 뭐야? 왜 이렇게 약해?’
하지만 말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입을 떡 벌린 발그에게 드낙이 외쳤다.
“왜 고개를 숙이고 계시오! 아직 제대로 한 판 싸워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그런 표정을 짓는다면 성주를 믿고 있는 병사들은 무슨 마음을 가지겠소!”
발그는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놈들이 병사 다섯의 목숨으로 기고만장해졌다면, 오히려 큰 기회가 아니오? 내가 왔으니. 놈들이 성벽을 넘을 생각을 한다면 그 목을 추수하듯이 따버리겠소.”
“드낙 경만 믿겠소.”
발그는 드낙이 두려워서 원탁에 대한 값을 지불하라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드낙은 가죽 주머니에서 은화를 다섯 닢 꺼냈다. 크기가 큰 원탁이라 못해도 그 정도의 값어치는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흥분해서 미안하오. 이것은 내가 부순 원탁의 값이오.”
그는 은화를 발그의 손에 쥐여주지는 않고, 자신이 앉은 의자에 놓고 목례를 하며 방을 나갔다. 복도에는 발그의 둘째 딸인 〈안젤리카 에드윈(Angelica Edwin)〉이 무장을 갖춘 채 드낙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젤리카가 고개를 숙였다. 드낙 또한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오. 랄프 경에 대한 소식을 들었소.”
“전 괜찮습니다. 드낙 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랄프가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않자 안젤리카 또한 드낙을 대하는 말투와 태도가 극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매우 정중한 말에 드낙은 흔쾌히 안젤리카를 따라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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