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3 <-- 쌍둥이 성채 -->
몽펠리에의 노기사는 술을 마셨고, 파이룬의 노기사는 차를 마셨다. 극명하게 서로 취향이 달랐다. 하지만 두 명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주 마주친 사람들이었다. 한 시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젝팔론 몽펠리에와 질베이런 파이룬의 만남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낮도깨비인 불파겐의 후예가 확실한 적통의 증거를 내세우며 세상에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언데드 건축물〉을 단신으로 토벌했으니, 그 전투력은 이미 물에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개화한 꽃을 꺾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것은 절로 탐욕을 불러일으켰다.
남부 귀족의 몰락과 맞물렸기에 더욱 불파겐의 유혹은 강렬했다.
‘나만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인접했기 때문에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몽펠리에와 파이룬 가문이었다. 그것이 일선에서 은퇴한 직계의 엉덩이를 떼게 만들었다. 손자들을 교육하고, 황혼으로 향하는 저물어가는 태양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만큼 서로간의 〈약속〉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드낙을 두고 피 튀기며 싸우면 두 가문의 역량만 떨어질 뿐이었다.
그것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일이다. 뒤에서는 백금 왕가가 슬금슬금 수백 년에 걸쳐서 귀족들의 역량을 전쟁 없이 갉아먹고 있었고, 앞으로는 외눈 다크 트롤이 패악질을 벌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소모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피차 고생이다. 늙어서까지 가업을 위해서 몸을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가주 놈이 어찌나 사정을 하던지.”
“허허, 그래서 나보다 일찍 왔나 보군.”
“그러는 너는 아주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빌빌 기었겠고만."
하하하.
웃음소리가 퍼졌다. 처음에 언제 눈싸움을 했느냐는 듯 훈훈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기싸움이 조금 있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으니, 빨리빨리 하자.”
“전신갑주를 오랜만에 입으니 어깨가 뻐근하군.”
하지만 누구도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아니, 초청한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야지.”
“무슨 소리를? 찾아온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야지.”
몽펠리에 령으로 들어온 파이룬이 해야 한다는 소리를 했고, 반대로 주최자인 만큼 먼저 말하라고 뻐팅기기도 했다.
“선후가 뭐가 중요하나?”
젝팔론 몽펠리에의 말에 결국 질베이런 파이룬이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한바탕 홍역을 겪고 나면 다시 트롤 토벌이 시작될 것인데, 북쪽은 너무 멀어. 우리 가문은 손을 넣기도 바빠.”
파이룬 가문이 먼저 외눈 다크 트롤에 대한 토벌에 있어서 손을 떼겠다고 말하자 순식간에 젝팔론이 말을 받았다.
“흐흐. 그거 아쉬워서 어쩌나? 나중에 북부 귀족들을 한데 모아서 위로주라도 줘야겠는걸.”
다시 한 번 완전한 북부 귀족으로서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몽펠리에가 안내자 노릇을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확실하다면 언제를 생각하고 있나?”
“백금 왕가 녀석들의 얼굴도 봐야 하니, 트롤 토벌 직후 큰 파티를 벌여야겠지. 그때, 직접 몽펠리에의 이름을 쓰는 사람을 붙여주겠네. 발이 넓은 사람으로.”
빙긋 웃는 질베이런에게 젝팔론이 검지를 하나 들어 올리며 고개를 살짝 놀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파이룬 가문이 곧 뛰어들 〈도로 사업〉에 있어서 우리도 끼워주게.”
“아니, 벌써 이야기가 들어갔나? 그런 카드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흐흐, 돈 굴리니 사람 간수 잘 못하는 거지. 내 잘못은 아니네.”
질색하는 질베이런은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 사업은 돈 드는 일이었기에 사실 분담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드낙을 위해서 확 하겠다고 했지만 큰돈 드는 일이었다.
몽펠리에가 알아서 끼워달라고 하니 어깨춤까지 추고 싶을 정도였다.
“아, 하지만 도로사업에 너무 전력을 다하지 말게. 그것은 〈목줄〉이기도 하니까.”
“아무렴. 그걸 모를까?”
젝팔론이 술병을 들어 올리며 자신감 있게 말하며 술을 마셨다.
“정실이든 첩이든 결국 불파겐의 피를 받아먹는 것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인상을 안 썼으면 좋겠는데.”
몽펠리에에게 이득인 말이었다. 명예가 높고, 〈버려진 영지〉에서 파이룬보다 멀리 있는 몽펠리에는 외척으로서 용이하게 써먹을 여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도 이미 의견을 정한 듯 질베이런이 단숨에 대답했다.
“대신 트롤 토벌 직후 결혼에 대해서 결정하도록 불파겐을 압박하는 것은 몽펠리에 쪽에서 해주게.”
“허허, 이거 나쁜 역할은 몽펠리에가 맺게 되었군.”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웃음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벌써부터 자신의 가문이 정실로 올라선다고 여기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이야기는 척척 진행되었다.
“파티를 크게 벌이면 백금 왕가도 급박하게 움직이기보다는 사절단을 보낼 것이다. 그때 북부 귀족은 하나 되어서 북부의 뜻을 왕족에게 전해야 한다.”
“그 시건방진 〈메디오 영주〉를 쫓아버리지 않으면 공국으로서의 독립을 불파겐의 이름을 중심으로 외친다면 왕가 또한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큰 부분에 있어서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 그것보다 덜 중요한 것은 서로 쉽게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었다.
“북부를 위해.”
“메디오인을 위해.”
“오랜만에 가문의 이름보다 북부와 메디오인을 위하는 행동을 하니까 기분이 좋군.”
두 사람은 계약서 하나 쓰지 않았다. 그랬기에 잡담을 나누며 자신들이 한 약속을 두 번, 세 번 자세하게 다루어서 서로에 대한 생각을 확실하게 바로잡았다.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문헌으로서도 남길 수 없었다.
불파겐을 은연중에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두 가문의 만남은 누구도 모른 채 그렇게 이루어지고 헤어지게 되었다.
*
결혼은 황혼이다.
그런 명언을 남긴 위인이 분명 있었다. 드낙은 그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런 명언을 들은 기억은 있었다. 바닥이 얕고 넓이는 넓은 현대인의 전형적인 지식의 양이었다.
‘결혼을 하면 외척이 유입된다.’
세파리아스와의 대화로 중요한 것을 획득했다. 그것은 결혼은 곧 외척의 유입이라는 것이었다. 드낙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결국 하면 X밥 되는 것은 나다.’
감당이 불감당이기 때문이다.
세파리아스처럼 힘으로 다스릴 정도로 폭압적인 행동을 일삼는 것은 드낙의 성격이 아니었다. 주기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식량을 일부 나눠주는 것이 드낙이었다. 또한 누구를 챙겨주고, 누구를 밀어내고,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X같네.’
욕을 내뱉은 드낙은 머리를 팽팽 돌렸다.
‘세파리아스가 간과한 것은 놈들은 똑똑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몽펠리에든 파이룬이든 결혼을 하려고 아주 작정을 한 상태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안 하는 것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드낙이 몽펠리에와 파이룬 가문의 영향력을 원하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세파리아스는 뛰어난 성장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드낙은 아니었다.
‘그럼 시발, 안 해. 감당이 안 되는 것인데 내가 왜 집어먹어? 안 하면 되는 거잖아.’
그냥 10년이고 30년이고 가난한 영지로 남은 채 여행을 떠나서 마법사든 뭐든 죽여서 마탑을 번듯하게 성 바깥쪽에 붙여서 짓고, 에어컨을 만들어내면 그만 아닌가?
‘근데 백금 왕가를 나 혼자 못 막으니까, 북부가 필요해. 북부의 가호를 받기 위해서는 몽펠리에와 파이룬이 필요하지. 그들은 나와의 결혼동맹을 원하고.’
“킥킥.”
드낙이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상황이 굴러가도 이렇게 굴러가버리냐?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자기들끼리 싸우면 되는 걸 왜 내가 총대 메고 전면에 서야 하냐고.’
그놈의 적발(赤髮)이 각성한 것이 모든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격이 되어버렸다.
“후우.”
드낙은 한숨을 쉬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것은 그가 살고 죽고의 문제였다. 잘못하면 모든 것을 잃고, 제국으로 망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제국에서의 새 시작은 바닥부터 시작함을 의미했다.
‘일단 난 세파리아스처럼 압도적인 성장을 원하지 않아. 백금 왕가만 저지하면 괜찮다고 생각해.’
사실 성 하나와 마을 몇 개만 있으면 족한 것이 드낙이었다. 그 이상은 원하지 않는데, 그놈의 백금 왕가와 불파겐 가문의 피의 역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거기에 맞물려서 북부 가문이라는 기름 덩어리가 불난 곳에 쏟아진 상황이 바로 지금이었다.
막고 싶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 하나만 어찌 먹고, 수많은 몰락 가문을 대거 유입해서 봉신으로 두고, 대가문 두 개를 외척으로 둔다면 버려진 영지는 아주 개판이 되겠지. 하지만 그 관리에 실패해도 난 내가 확실하게 잡을 성과 마을만 확실하게 잡아두면 되는 거 아닌가?’
허수아비 영주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존버하면 자신의 승리였다. 검은 꿈을 통해서 수많은 능력을 손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놈들은 놈들끼리 치고받게 하기 위해서 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지. 그게 〈버려진 영지〉가 되는 거야.’
드낙은 벌떡 일어났다.
‘북부와 백금 왕가의 여력이 소모되는 검투장이 바로 〈버려진 영지〉로 할 수 있으면 괜찮은 해결 방법 같은데. 근데 백금 왕가는 어떻게 끌어들이지?’
놈들은 지금까지 쥐새끼처럼 갉아먹으며 불파겐과의 전쟁 이후로 자신들의 역량을 소모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무시무시한 힘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었고. 북부의 귀족들이 대거 몰려 하나가 될 정도로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
‘서로 치고받게 싸운다. 그 장소는 버려진 영지. 왜냐하면 난 성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만족하니까. 하지만 백금 왕가가 버려진 영지로 뛰어들게 할 방법이 없다.’
“아니! 왜 없어? 백금 왕가랑도 결혼하면 되잖아.”
생각을 하느라 머리에서 열이 차올라 땀이 흐르는 드낙을 스치고 지나가며 바람이 들어왔다. 드낙이 창틀에 양손을 얹었다. 달도 지고, 해가 뜨기 전의 어스름한 밖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달빛도 햇빛도 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너네들이 원하는 결혼. 아주 제대로 해주마.’
드낙이 몸을 돌려 양피지를 서둘러 꺼내어 펜을 집었다.
망설임 없이 써 내려갔다.
[1. 내가 원하는 것은 성과 마을 다섯. 욕심을 버리고, 풍족한 삶을 위해서 또 관리를 용이하기 위해서 적당한 숫자.
2. 몽펠리에와도 결혼한다. 파이룬과도 결혼한다. 백금 왕가와도 결혼한다. 그리고 수많은 몰락 가문을 끌어안는다. 백금 왕가와 척을 진 남부 귀족들과 연결고리를 만든다. 필요하다면 남부 귀족 가문을 데려와서 또 세력을 하나 만들게 해준다. 버려진 영지는 넓다.
3. 버려진 영지는 검투장. 그 싸움터의 승자가 빨리 나올 수 없도록 많은 세력을 유입하는 것이 중요 포인트.
4. 검은 꿈으로 존버하자. 승자는 결국 나. 아니, 승자도 없다. 더울 때, 시원하게 지내고 추울 때, 따뜻하게 지내며 여유롭게 사는 것이 진정한 승자다.
5. 제국으로 향해서 불파겐의 생존자와의 접촉.]
드낙이 끝을 맺고 미소를 지었다.
‘적의 적은 적. 아군의 적은 아군. 서로의 원한은 불파겐 영지의 주인이 누구냐를 가리는 목표를 거머쥔 놈이 승리.’
그 승리자가 나올 때까지는 드낙에게 시간이 있었다.
‘이것 이상으로 한다면, 결국 내가 잡아먹힌다.’
드낙은 세파리아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북부와 백금 왕가의 전면전을 지연시킨다는 면에서도 백금 왕가와 결혼한다는 선택지도 훌륭했다. 특히 항상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백금 왕가는 오히려 환영할지도 몰랐다.
‘이걸로 가자.’
버려진 영지, 불파겐의 피. 그것을 미끼로 한 작전이었다. 성공한다면 드낙은 시간을 충분히 벌고, 자신의 영지를 발전시킴과 동시에 다른 기득권층이 보기에는 허수아비 혹은 나약한 기반을 지닌 영주겠지만 드낙에게 있어서는 적당한 수준의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세파리아스가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다 X까. 서로 뒤엉켜봐라.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보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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