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1 <-- 쌍둥이 성채 -->
검은 연기가 드낙을 덮쳤다.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바닥에 있는 팔은 언제나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드낙은 연기를 손으로 흩어지게 만들며 바닥의 밑을 내려보았다. 끝없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깊이가 있는 어둠 속에서 드낙에게 이 검은 꿈을 준 존재는 언제고 나타날 것이다.
‘나에게 이득을 주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를 통해서 업을 쌓고 있어. 이 팔의 주인이 나에게 〈검은 꿈〉의 능력을 준 존재야.’
드낙은 그 존재와의 만남을 이제는 기다리고 있었다. 겁을 먹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하지 않았다. 힘을 갖춘 드낙은 이제 웬만한 위험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존재〉는 드낙의 성장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주춤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그런 장치조차도 드낙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는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겁을 먹게 하고, 의심을 하게 하고, 웅크리게 만들어 드낙의 발걸음이 느리게 만들어 안전성을 도모했지만 그런 〈존재〉의 목적과는 다르게 드낙은 칼춤을 추기 바빴다.
인간의 탐욕은 마음이 심란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현대인은 유례없는 인류의 황금기를 지내며 온갖 부를 손에 쥔 인류였다. 그들의 욕심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
‘어떤 검은 꿈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드낙보다 확실히 신체적으로 우월했던 〈샌드 라바〉들은 드낙에게 검은 꿈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드낙은 웃음을 머금은 채 연기를 뿜어내며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문들을 마주했다.
‘제법 많네?’
하나하나 드낙이 맛을 느끼듯이 문 앞에 서서 환상을 맞이했다.
인간의 체온보다 높은 뜨거움이 몸 안에서 느껴졌다. 그것은 장기가 보다 높은 체온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었다. 물론 그것은 항시 체온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경우에만 높아졌다. 그리고 쉽게 높은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인체가 버틸 수 있는 체온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 상한선이 높아지는 셈이었다.
시답잖은 능력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신체의 체온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해준다. 열량은 많이 소모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친 활동으로 높아진 체온 때문에 불편함과 피곤함 그리고 피로를 느끼는 상황 속에서 드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나쁜 세균을 죽이는 데에도 신체의 열을 높이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었다. 보통 사람보다 30% 정도 높은 50도의 체온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과열 신체〉의 힘이었다.
병이 침투해도 단번에 나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세균은 저온에서는 대단히 끈질기게 살아남지만 고온에는 매우 취약했다.
몸을 데워서 땀을 쫙 빼야 감기에 낫는 것처럼 세균 죽이는데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다른 사람보다 지구력이 더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남들은 땀을 뻘뻘 흘리는 상황이지만 드낙은 신체 체온이 50도가 넘어가야 땀을 흘릴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보다 엔진의 과열점이 다른 것이다.
‘쩌는데.’
뜨거운 체온은 생각과 상황 그리고 본능에 따라서 변하였기에 열량 소모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 환상은 장기들에 갑각류의 표피가 생성되는 환상이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한 내부 장기들의 내구력 증가를 주는 능력이었다.
〈갑옷 장기〉
‘이것도 좋다.’
수련을 해도 칼침을 맞으면 그대로 잘리는 것이 인간의 장기였다. 달리기로 심장을 단련해도 기능만 높아질 뿐이다. 이 능력은 그것을 뛰어넘어 단단한 표피를 두르게 해주었다.
‘나쁘지 않아.’
라바의 경우 공격 수단이 조악해서 충격이 전신갑주를 뚫지 못했지만 다른 중대형 몬스터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맞아도 버틸 수 있는 방호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음은···’
치이이익!
위액에 녹아내리는 강철!
무엇이든지 먹어서 에너지로 삼을 수 있는 〈쇳물 위액〉이 세 번째 검은 문의 능력이었다. 드낙은 큰 메리트를 못 느꼈다. 심지어 모래, 진흙, 돌까지 소화시킬 수 있어서 굶어죽을 일이 없었다.
‘별로.’
먹을 것 걱정이 없어진 드낙이다. 다른 것을 포기하고 이것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느껴졌다.
마지막은 〈펄떡대는 사지(四肢)〉였는데, 벌레의 특성이기도 했다.
대형 검에 잘린 팔이 펄떡거리면서 그대로 상대의 목을 취하는 환상을 경험했다. 가장 확실하게 운용한다면 나올 수 있는 모습이었다. 혹은 바닥에 떨어져 기어가서 발목을 잡거나 다양한 기믹으로 쓸 수 있었다.
‘단점이 명확해.’
팔다리가 잘려도 펄떡거린다니, 괴악했다. 무엇보다 혈액이 줄어들면 잘린 팔의 움직임도 급격하게 느려졌다. 그 단점을 다른 능력으로 커버하는 것이 아니라면 선택은 불가능했다.
‘강자(强者)의 허를 찌를 수는 있겠지만···’
큰 부상을 당해야만 빛을 발하는 능력이었기에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드낙은 전신갑주를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끼기기긱!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에 드낙의 시선이 여과기로 향했다. 그곳에는 큰 통에 검은 찌꺼기가 바닥나 있었고, 어느새 하얀물이 그릇에 담겨있었다.
‘하얀물도 주네?’
아무래도 라바를 대량으로 잡은 것과 샌드 라바를 잡아 검은 문을 만든 것, 두 가지로 나누어진 듯했다.
드낙이 그릇을 건드리자 환상이 그를 덮쳤다. 하지만 생각했던 라바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땀을 흘리고 있는 고블린의 환상이었다.
수많은 고블린이 수많은 경우의 수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은 작은 새를 조련하는 것이기도 했고.
큰 곰에게 먹을 것을 바치면서 함께 살아가기도 했으며.
늑대 무리에게서 인정을 받아 소리를 크게 지르며 환희에 물든 고블린이기도 했다.
성과가 없이 야지에서 굶어죽어 쓰러진 고블린이 있기도 했고.
자신이 키운 매의 부리에 눈이 찍히기도 했다. 애꾸눈이 된 고블린은 순식간에 지팡이를 땅에 찍으며 늙은 고블린이 되었는데, 그 옆에 사람보다 큰 매가 부리로 깃털 깃을 정리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콥 고블린을 눈앞에서 죽여 라바에게 먹이를 주는 큰 덩치를 지닌 고블린이 섬뜩하게 웃었다.
그 끝없는 고블린들의 조련술에 대한 노력이 드낙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에 가서는 그 모든 고블린의 목이 잘리며 피를 뿜으며 드낙에게 잔뜩 묻으며 환상이 끝이 났다.
“헉!”
아찔함을 느끼며 드낙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 정도로 세월의 아득함이 체감되면서 뇌에 충격을 준 것이다.
〈조련술의 업(業)〉
고블린들을 죽여서 그들이 세대를 거치고 거쳐서 쌓아올린 조련술의 기술, 지식을 업으로 변환시켜서 하나의 〈혈통〉으로 기능하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이런 게 왜 〈검은 여과기〉로?’
너무나도 큰 힘이었다. 드낙은 검은 여과기가 물량에 대한 능력 배출기로 여겨졌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혈통〉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불파겐 가문이 세대를 거치고, 시대를 지나며 오우거 토벌을 여러 번 하여 만든 마법 저항의 적발(赤髮)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조련술의 지식이나 노하우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련술의 대가(大家)라고 불릴 정도의 노하우와 지식을 그저 업으로 쌓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카리스마로 상대를 휘어잡는 것과 비슷했다. 물론 단점 또한 존재했다.
지성(知性)과 이성(理性)이 어느 정도 있는 상대에게는 효과가 크게 반감된다는 것이었다. 본능이 대단한 것들에게 가장 확실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블린을 계속 죽여서 업을 크게 쌓는다면 나중에는 중대형 몬스터도 내 수족처럼 제어할 수 있다.’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드낙은 거침없이 하얀물을 받아마셨다. 〈고블린 죽이기〉라는 퀘스트가 발생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얀물을 통해서 〈조련술의 업〉을 획득한 드낙은 검은 문의 능력들을 살폈다.
과열 신체, 갑옷 장기, 쇳물 위액, 펄떡대는 사지.
‘질병은 무섭지.’
간의 해독과는 상관없는 것이 질병이었다. 그리고 병을 쉽게 보면 한순간에 목숨이 끊어질 수 있었다. 신성력만 믿었다가 큰 코 다칠 수 있었다.
드낙은 고민 끝에 〈과열 신체〉를 선택했다. 37도의 평균 체온을 지닌 인간의 체온이 자신의 생각, 본능, 상황에 따라서 최대 50도까지 높아지고도 신체의 구성 물질이 유지되는 능력이었다.
흙을 과열시켜서 모래로 만드는 〈샌드 리바〉의 능력이기도 했다. 그들의 체온은 가을밤에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높은 체온을 지닐 수 있었다.
“세파리아스!”
드낙이 그렇게 검은 문의 능력과 검은 여과기의 능력을 받아먹고 세파리아스를 불렀다. 불파겐 가문의 마지막 가주였던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세파리아스가 턱짓을 했다. 건방지고 오만했다. 하지만 드낙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이런 놈이다~라고 체념한지 오래였다.
“몽펠리에와 파이룬 가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잖아? 네 생각은 어때?”
드낙이 세파리아스의 의견을 듣는 것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 위해서 가 아니었다.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판단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정리하여 문제지로 내어주는 것이 세파리아스의 답변이었다. 답변을 역으로 짚어나가면 그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파이룬 가문은 귀족이지만 상인이기도 하다. 난 상인이 싫어. 그들의 판단 기준은 돈이거든. 물론 파이룬 가문이 명성이 있는 이유는 명예도 챙겨서 그렇지만, 결국 명예보다 위에 있는 것이 이권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러운 짓을 많이 할 것 같아.”
“무슨 근거로?”
“감이다. 척 보면 딱 안다. 용병 시절 너에게 마법 아이템을 준 것은 게실리안 지휘관이 아니라 버팔로 나이트였다. 아닌가?”
“그건 그렇지···”
“네가 전신갑주를 보유하고, 기사다운 짓을 하니까 크게 내어준 것이지. 크게 보이면 크게 투자하고, 적게 보이면 적게 투자한다. 파이룬 가문에게 있어서 너는 그저 투자의 가치가 있을 뿐인 것이다.”
드낙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파리아스의 말을 들어보니 게실리안 지휘관은 주식 투자자나 다름없었다. 투자할 가치가 있으니 투자하는 것뿐이었다.
“반면 아크온은 용병 때부터 깃털 투구 같은 것들을 내어주었지. 너의 시작을 보다 앞으로 당긴 것은 그의 도움이 컸다. 추천서까지 줬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넌 모를 거다. 횃불 성채의 수비대장이 열등감을 느끼고 널 질투했을 정도니까.”
“그가 날? 전혀 몰랐는데.”
“네놈의 눈썰미가 그 정도다. 사람의 갈대 같은 마음조차 잡지 못하는 눈이다.”
드낙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그럼 몽펠리에를 선택해야 하나?”
그 말에 세파리아스는 또 고개를 저었다.
“전형적인 귀족 가문이 몽펠리에다. 그들과 하나가 된다고 해도 큰 도움은 못 받아. 넌 결국 다른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드낙은 그 말에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몽펠리에가 도움이 안 된다니. 도움을 많이 줄 것 같은데?”
세파리아스가 그런 드낙을 비웃었다.
“물론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전폭적인 지원은 못 받는다. 네 녀석의 약점이 나약한 기반인데, 그 기반을 높여주면 널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드낙이 조금 입을 벌리자 세파리아스는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치에 사사로운 감정 따위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와 아크온의 우정은 정치적 문제를 빚지 않았기에 유지되고 있는 것뿐이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정치다.”
“아.”
드낙이 납득했다. 현대에서 살면서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웃음 지었다.
“당연히···”
========== 작품 후기 ==========
5596자
평추코! 다양한 의견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