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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284화 (283/1,239)

0284 <-- 쌍둥이 성채 -->

토벌이 길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말에 드낙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못해도 봄이 오기 전까지는 돌아가야겠지. 너무 오래 영지를 비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안 그래도 서로 제각각 생각하고 있는 게 다르잖아?”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게제라스와 이실레아의 무력 차이. 무력이 낮은 쪽은 날 믿고 있고, 이실레아는 나에게 충성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사건 해결을 무력으로 해결하면서 게제라스의 입지는 점점 낮아지겠지. 그 때가 되면 딴생각을 해도 이상하지 않아.”

불파겐은 그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게제라스라면 더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겠지. 네가 아니라 이실레아의 편을 들지도 모르고.”

드낙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울면서 그간 잘못했던 것을 사죄해도 현실은 현실이다. 언제까지 오지도 않는 사람을 믿으며 자신의 입지가 점점 내려가는데 가만히 있을까? 최소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실레아에게 줄을 놓을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저축할 때 은행 하나만 쓰는 것보다는 여러 은행에 분산해서 저금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항상 여러 개의 살 방도를 도모해야 했다.

“어때? 그럴듯하지?”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비웃었다.

“멍청한 놈. 그게 네 편견이다. 너의 그 어리석음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안 변하지만,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지금은 변해야 한다고.”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힘이 없을 때나 그렇지.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다. 이실레아가 등을 돌려? 에라이, 이 멍청아!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도 1년은 눈치를 볼 사람이 된 것이 그녀고, 게제라스다.”

세파리아스가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너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는 것은 예전부터 네 습관이다. 최악의 수를 피하겠다는 그 은연중의 소심함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소심함이라는 소리에 드낙이 발끈했다.

“그런 소심한 사람이 구울 묘지기에 달려들고 일각수 곰탱이한테 덤벼드냐?”

“흥. 전신갑주도 부숴 먹을까 봐, 조심하는 놈이···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세파리아스는 콧소리를 내며 쏘아붙이자 드낙은 볼을 긁적거렸다. 하지만 전신갑주를 부술 정도의 충격량을 보여주는 개짓거리를 하는 세파리아스에게 들으니 기분이 상했다.

‘목적지에 빨리 가겠다고 자동차로 다 박으면서 가는 놈이, 나한테 뭐?!’

“그럼, 무인이 되어서 몇 대 맞아주면 좋냐?”

“전신갑주가 막아주잖아.”

“그래서 다 부셔먹었어? 대단하네. 성도 하나 없는 기사 전신갑주도 개박살내고. 대~단하십니다.”

세파리아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드낙의 도발은 속을 북북 긁는 것이 있었다.

“시끄럽다. 그런 형편없는 전신갑주를 받아놓고 희희덕거린 네놈부터 글러먹었어.”

서로 티격태격 거리다가 둘 모두 지쳐서는 사이좋게 주제를 다시 돌렸다.

“트롤 토벌이 몇 년이 되었든 완수하고 돌아가야 한다. 보상 하나 없이 돌아오면 네 입지가 내려갈 것이다. 시작하면 무조건 〈결과〉를 내야 한다.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정하기 힘든 말이었다.

“큰일이 엎어지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지. 보통 먼저 일을 벌인 놈이 진다. 안 그러냐?”

세파리아스의 말에 드낙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 프로젝트가 엎어지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현대조차도 그러한데 중세는 더 심한 경우가 있었다. 드낙은 적은 자원으로 원정을 나왔지만, 그 결과를 목을 빼고 기다리는 자들이 많았다.

“좁쌀만 한 균열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게, 그런 작은 것으로도 고꾸라지는 경우가 많아. 특히 못 가진 놈들이 더 그래. 가진 놈은 몇 번 넘어지고, 대가리 깨져도 벌떡 일어나는데, 아무것도 없는 놈은 그게 끝이지.”

그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면 그들의 충성심, 기대심이 부서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균열에 스며드는 것은 실망감이라는 것이었다. 수틀리면 나도 찌를 수 있다는 최소한의 음험함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나지만, 한 번 고꾸라지면 다시는 지금과도 같은 위상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로구나.’

멀리 내다보는 세파리아스의 생각을 깨달은 드낙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넌 가진 놈이었는데, 왜 그렇게 잘 알아?”

“보는 놈들이 다 못 가진 놈들이니까. 겁도 모르고 주제도 모르고 덤비는 것들은 죄다 흙 묻은 손이니까.”

앞뒤 간격을 재어보고 덤벼들 형편조차 안 되는 것들. 그 말에 드낙은 기사에게 강도짓을 하려고 했던 노인이 생각났다.

아들도 행방불명.

딸과 아기를 홀로 짊어진 그 노인은 앞으로 가도 절벽이고, 뒤로 가도 절벽이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상황에 가보지 못한 드낙은 오히려 세파리아스의 말을 듣고 그 노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에는 결과란 소리야?”

“과정을 버려서는 안 되지만, 결국 평가는 결과가 결정한다. 잘 싸워도 패군지장은 패장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도 결과 하나 남기지 못하고 도망치는 일은 결코 하지 마라.”

그 말에 드낙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세파리아스의 말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명절마다 친척들의 샌드백이 되어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던 32살의 사촌 형은 한 방에 5급 공무원에 합격했고, 다음 명절에 말 그대로 가장 사촌 형을 걱정하며 말로 두들겨 팬 고모부가 덩실덩실 춤을 췄다.

모든 것은 결국 결과인 것이다.

과정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아도 실패하면 잊힐 뿐이었다. 결국에는 잘 되어야 한다. 잘 되면 못하던 사람도 얼굴색을 바꾼다. 치졸하고 역겨운 짓이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그 누구도 노숙자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다하지 않는다.

세파리아스는 굳어진 드낙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충고가 제대로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노인이나 돕는 하찮은 정 따위를 지키기보다는 눈앞의 성과에 집중할 것이다. 버러지 같은 아랫것들을 돕기 위해서 눈앞의 이득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족했다.

“결국에는 힘이다. 드낙, 네가 검은 꿈을 좇는 것도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지면 결국 성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힘은 자잘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더욱 기사로서의 힘을 단련하고, 수련해야 한다.”

드낙은 그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작은 능력이라도 쌓이다 보면 태산이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세파리아스의 말대로 비전에 몰두하고, 완전히 깨우치지 못한 비전들의 숙련도를 더욱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파리아스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는 게 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린 드낙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검은 꿈〉이 지닌 능력은 크고 작든 상관없었다. 쌓다 보면 결국 크게 될 것임을 드낙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엘프조차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임 좀 해봤다는 사람은 작은 수치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드낙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금리 0.2%의 차이라도 3년, 5년을 보면 크게 차이 나는 법이다. 세파리아스는 좁쌀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산을 이룰 터였다.

〈쌍둥이 성채〉는 평야에 세워진 요새였다. 사방이 탁 트여져 있었고, 언덕도 하나 없었다. 적이 주둔하기 좋고, 공성하기 좋아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두 개의 거대한 성채가 첨탑처럼 높게 솟아있었고, 곳곳에 거대한 공성 병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흉악함은 멀리서 보면 볼수록 뛰어났고,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무서웠다.

거리가 1km 내외로 줄어들자 서문(西門)이 열리며 경기병 수십이 빠져나와 드낙에게로 다가왔다. 서로 충분히 거리를 두고, 대장인 자가 나와서 소리쳤다.

말은 큰 원형 방패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말 양쪽으로 물이 든 가죽 주머니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모든 경기병들이 그것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눈에 띨 수밖에 없었다.

식수 용도는 절대로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분을 밝히시오!”

아무리 몽펠리에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다고 해도 신분을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공증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특히 아크온 몽펠리에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쌍둥이 성채는 치안이 매우 삼엄했다.

“바루익 블라인스다! 아크온 몽펠리에님의 서신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고, 드낙 불파겐 경을 호위하고 있다!”

바루익 경이 홀로 나서서 경기병들과 조우했다. 기수들 중에 바루익을 알아보는 있어서 단번에 통과될 수 있었다. 인맥이 이렇게 중요했다. 특히나 기득권층에서 인맥은 프리패스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버팔로 나이트가 있는 곳이었기에 진짜로 프리패스를 하지는 못했다.

분위기만 훈훈하게 변했다.

물론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증은 해야 했다. 다른 기수들 또한 인증을 마쳤다. 하지만 드낙은 투구를 벗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간 같지 않은 거친 머리카락은 사자의 갈기털이나 다름없었다.

사자의 갈기털보다 더욱 굵은 것이 드낙의 적발(赤髮)이었다.

“불파겐 가문의 후예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수의 대장은 드낙에게 그런 말까지 할 정도였다. 이미 아크온 몽펠리에의 언질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기병 조장〉을 맡고 있으며 〈말리안 베세닉(Malian Vesenik)〉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드낙은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아라!!”

덜그럭, 덜그럭, 터더더덕!

물레방아가 공회전하더니, 물이 쏟아지며 밑에서 긴 통나무처럼 큰 것을 미는 병사들에게 튀었다. 병사들은 시원함을 느끼며 더욱 힘을 냈다. 거대한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물이 많나 보네.’

기술자적인 눈썰미가 없는 드낙은 그렇게 알고 넘어갔다.

외성지역 곳곳에는 거대한 통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의 창문에는 병이 몇 개나 밧줄에 걸려있었는데, 바람이 불어도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물이 담아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붕 위에도 대야가 놓여 있었고, 물을 잔뜩 실은 짐수레를 옮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대로의 바로 옆에 뚫려진 우물에는 병사들이 웃통을 벗은 채 물을 퍼올리고 있었다.

“왜 저렇게 물을 모으는 것이오?”

드낙의 물음에 〈기병 조장〉인 말리안 베세닉이 대답했다.

“〈라바(Larva)〉 때문이오. 아주 극성이오. 밤낮없이 튀어나오고 있고, 밖에는 고블린이 결집하고 있어서 제대로 된 퇴치조차 힘든 상황이오.”

내성문을 지나서는 더 가관이었다. 내성지역에 땅에 돌을 박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내성으로 들어가서야 소란이 줄어들었다.

내성은 전투 요새답게 전투적이었다. 드낙이 도착한 내성은 두 개의 첨탑 같은 성 중에서도 오른쪽에 있는 곳이었다. 마당 같은 곳도 없고, 연병장이 있는 것이 전부였다.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올라갔다.

계단은 전방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모두 적의 동선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계단이었다. 적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측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통로를 거치면서 관통을 하는데, 천장에는 함정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놓아져 있었다.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몰랐지만, 드낙은 그 구멍이 결코 좋은 용도는 아닐 것으로 생각됐다.

“정말 오랜만이군! 하하하!!”

아크온 몽펠리에는 미리 내달린 경기병 소수를 통해서 거대한 첨탑으로 오르는 곳의 입구에서 드낙을 맞이했다. 그의 눈은 절로 드낙의 붉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꽂혔다.

‘불파겐의 피가 이어져있군.’

이것으로 더욱 확실해진 것이다.

‘그는 이용할 만하다. 이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휘어잡아야 한다.’

황소처럼 큰 손이 드낙의 손을 잡았다. 드낙 또한 오늘의 재회는 특별했다. 전에는 알게 모르게 아크온의 카리스마에 휘둘렸다면 지금은 정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우리 사이에 무슨? 말 편하게 하게. 아니, 하자.”

아크온은 거침없이 말부터 깠다. 어렸을 때, 화가 나서 황소를 짊어지고 대로를 걸었던 사람이었다. 호탕함 하나는 가문이 들썩거려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드낙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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