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2 <-- 조용한 계곡 성채 -->
똑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에 드낙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불렀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을 통해서 불렀다.
“들어와.”
“예. 부르셨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이스핀 부대장이었다. 어젯밤의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홀대 당했다. 방계도 아니기 때문이었기에 신경 쓰는 이들이 없었고, 중히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드낙은 탐욕에 눈이 멀어 생각지도 못했다.
‘실망하지는 않았겠지?’
마음이 조심스러워지는 드낙이었다. 하지만 이스핀은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더욱 노력하여 드낙이 자신에게 성을 내려줄 그때를 위해서 뼈를 깎고 매일처럼 새벽 수련을 할 뿐이었다.
다른 기사들은 매일 밥 먹는 것처럼 하는 것이 새벽 수련이었지만 이스핀에게는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이놈의 검은문이 사람을 망치는구나. 서둘러 이스핀에게 사정을 말해야 한다.’
사람보다는 검은 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테두리는 결국 큰 상황 속에서는 자신밖에 생각 못 하기 때문이었다. 엘리트 몬스터, 전신갑주가 앞에 있는데 이스핀을 생각할 리가 없었다.
드낙은 그것을 후회했다. 처음으로 검은 문이 가지는 탐욕이 안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젯밤에 3명이 갑작스럽게 내 방에 들어왔다.”
1명, 2명 순차적으로 온 것이 순식간에 3명으로 둔갑했다. 또한 정중한 방문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변했다. 사람의 세 치 혀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가문의 장남과 차녀 그리고 바루익까지 와서 이곳의 일을 도와달라고 한 것. 그리고 드낙은 전신갑주를 받게 된 것과 먼저 쌍둥이 성채로 향한 뒤에 나중에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다.
“북부가 온갖 몬스터의 준동에 대처하고 있다고 하니 그럴 시간은 충분히 있습니다.”
이스핀은 이미 끝난 일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게 드낙이 자신을 부른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은 실제로도 그러했다.
“너에게 말해야 하기도 하고, 네 생각도 들어볼 것도 있고.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지?”
“예. 하지만 조금 드낙 님께서 보여주신 방향과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예 받을 것을 더 내놓으라고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고 말하다면 알아들을 것입니다.”
드낙의 처지를 들어서 더 뜯어내자는 소리였다. 뒷골목 깡패 다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치도 빠르고, 횃불 성채에서 지낸 것답게 귀족의 생태에서도 그럴듯한 방법이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극적인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다.
〈몽펠리에 남작 가문〉과 〈파이룬 백작 가문〉 사이에 끼인 것이 드낙의 형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몽펠리에 쪽에서도 배려를 해야 했다.
“아예 거래 관계로 깔끔하게 매듭을 짓자는 것입니다. 합당한 거래의 흔적이 있었다면, 파이룬 가문도 쉬이 태클을 걸지 못할 것입니다. 몽펠리에 가문이 아니라 그 방계와 거래한 것 아닙니까?”
그게 그거라고 할 수 있었지만 대놓고 찍어누를 명분이 되지는 못했다. 되려 합리적인 판단으로 두 가문 모두와 거래로 관계를 이어나가겠다고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강하게 중립 포지션을 쥐겠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행동이었다.
드낙 또한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핀을 못 믿었기 때문에 그 또한 머리를 팽팽 돌렸다.
“알겠다. 별일은 없지?”
“예.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점심 전에 전신갑주의 빈 마력을 채워주기로 했으니, 같이 가자.”
“예!”
이스핀이 대차게 대답했다.
대저택에 딸린 창고에 도착한 드낙은 미리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성주부터 시작해서 부인을 제외한 장남과 차녀였다. 모두 일선에서 싸울 수 있는 자들로 영향력이 있다고 봐야 했다.
“아니, 무슨 일로 이렇게 다 오셨소?”
드낙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대충 인사를 하고 급히 말하자 도리어 성주가 드낙의 손을 잡았다. 자존심에 말하지 않았는데, 일이 잘 풀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소? 〈종군 마법사(從軍 魔法師)〉의 임명이 치일 피일 미루어지면서 기약 없이 기다리며 한숨으로 덮어가던 나날이었는데, 드낙 경이 마력을 운용할 줄 아셨다니!”
성주가 펄쩍 뛰었다. 견부(犬父) 밑에 호자(虎子)가 있는 것 같은 양상이나 다름없었다. 〈혈통〉이 미미해서 눈동자에 검은 점들이 다닥 안 박혀있는 것이 〈발그 에드윈(Bulg Edwin)〉이었다.
태세 변환이 극명했기에 드낙은 오히려 안심했다. 가장 두려운 것이 대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기에 의심을 접기 좋았다.
“별말씀을 하시오. 몬스터 앞에 인간은 모두 서로가 아군이지 않소?”
병사가 창고 문을 열자 성주가 앞서 안내했다. 그 짝이 마치 드낙의 가신처럼 보여서 보는 이들이 눈을 찌푸렸지만 성주의 시선은 드낙에게 꽂혀있을 뿐이었다.
‘이런 자가 성주라니? 항상 대단한 자들만 봐서 그런지 적응이 안 되네.’
소인배 같은 모습에 드낙이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성주는 드낙이 같은 계급에 있었고, 몽펠리에 가문의 가주처럼 대우받는 버팔로 나이트와의 친분과 더불어 지금 상황에 가장 중요한 인력이라 대우해주는 것뿐이었다.
다소 오버하는 감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척박한 곳에 배정되었음에도 충성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 〈조용한 계곡 성채〉의 성주 가문, 에드윈 가문이었다.
파아앗!
푸른 마력이 전신갑주를 훑고, 본격적으로 마력이 스며들어갔다. 총 3벌을 하루에 충전을 해버렸다. 높은 수준의 전신갑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전신갑주였다.
“고맙소.”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기에 괜찮습니다.”
직접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단박에 원하는 것이 있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성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드낙이 전신갑주를 탐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버려진 영지〉에 토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루익이 함부로 입을 놀린 것이라기보다는 드낙의 물욕을 설명하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 남부 왕국의 상태는 명분과 명예가 1순위였기 때문이다.
“몽펠리에 가문과 직접적이지 않기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소? 그들 또한 납득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매듭을 짓고 싶은데···”
드낙이 말 끝을 흐렸다. 없는 살림에 더 얹으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성주도 보통이 아니었다.
“오히려 크게 준다면 더욱 의심하고 경계할 것이오. 이곳은 몽펠리에 령 중에서도 가장 척박한 곳. 그들 또한 이해해 줄 것이오. 애초에 신경 쓰는 이들도 적을 것이고, 큰 문제가 일어났을 때나 거론될 것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되오.”
‘와. 제법이네.’
드낙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리되면 논쟁이 될 것 같아 참았다. 드낙은 자존심이 적었다. 귀족들의 체계적인 언변술은 현대인보다 뛰어난 면이 있었다.
이스핀의 말도 맞았지만 그 반대의 말도 맞았다. 더 주나 덜 주나 결국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더 확실한 변명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성주는 말하고 있었고, 드낙 또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척박한 곳이니 변명하기 쉬운 것은 적게 주는 것이었던 것이다.
‘전신갑주 이상으로 더 받고 싶었는데, 게제라스 총관이 있었다면 뭔가 더 바뀌었을까?’
분명 바뀌었을 것이다. 짧은 대화였지만 공방처럼 느껴져서 게제라스 생각이 더 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비계를 통해 절벽 위로 올라가서 봉화대에서 쌍둥이 성채를 보시는 게 어떻소?”
이상한 기류에 장남인 〈랄프 에드윈(Ralph Edwin)〉이 성주와 드낙 사이에 끼어들었다. 성주는 웃으면서 부추겼고, 드낙이 이를 받아들였다. 아직 2벌의 마력을 충전하지 못했기에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하므로 그렇게라도 시간을 보내며 에드윈 가문과 얼굴을 마주하는 내일까지는 기분 좋게 서로 지내야 했다.
후우우웅!
거친 바람이 드낙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계가 들썩거렸다. 생각보다 대단히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봉화대였다.
“몬스터들은 절대로 못 올라올 것이오! 안 그렇소!”
드낙이 크게 대답하자 랄프 에드윈이 크게 수긍했다.
“봉화대는 지금 이 난리에도 한 번도 공격당한 적이 없소!”
네발 달린 짐승보다는 사람 같은 손과 도구가 중요한 것이 봉화대로 향하는 길이었다. 물론 성채에서 놓인 비계를 올라가는 것은 그 정도로 힘들고 험하지는 않았다. 대신 거칠게 휘청거리는 바닥을 보며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와!”
드낙이 크게 감탄했다. 대단히 높은 봉화대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 비교적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은 언덕이나 숲을 관통했고, 그 끝에는 〈쌍둥이 성채〉가 보였다.
3일 거리에 있음에도 보일 정도로 〈쌍둥이 성채〉는 몽펠리에의 북쪽 경계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요새였다.
“대단하지 않소?”
봉화대 주위로는 벽이 있었기에 바람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 덕에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벽에서 몸을 낮춘 드낙은 그 소리를 들으며 수긍했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위에서 내려보는 감각은 살면서 단 한 번은 겪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여진 한국에서는 그런 경치를 보는 게 힘들었다.
마치 〈육지의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면 〈쌍둥이 성채〉는 건재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가끔은 걱정되기도 하오.”
“연락이 끊긴지 얼마나 되었소?”
“봉화는 주기적으로 연기를 내기 때문에 연락이 끊긴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지원이 오지 않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오.”
랄프가 드낙의 말을 정정했다. 이에 드낙이 웃었다. 버팔로 나이트가 있는 곳이었다. 함락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 드낙은 자신의 영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랄프 또한 드낙이 이야기하는 만큼 똑같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계곡에서의 귀족 삶은 드낙의 생각과는 크게 달랐다.
모든 것이 척박했기 때문에 내정과 다스림에 있어서 통하는 것이 많았다. 물론 매우 깊은 것에 대해서는 서로 조심했다. 서로 얼마든지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에드윈 가문은 몽펠리에 남작 가문의 방계였고, 드낙은 독립된 불파겐이라는 가문의 가주였다.
저녁식사까지 초청되었지만 큰일은 없었다. 다음 날에 드낙은 마저 전신갑주 2벌을 더 충전해주고, 〈쌍둥이 성채〉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보급은 넉넉하게 주어졌다. 적어도 보름 내에 드낙이 이곳을 다시 방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몽펠리에의 지원 또한 있겠지.’
그런 판단도 가지고 있는 것이 성주였다.
“밀어!”
“히히힝!”
일직선으로 된 길이었지만 높낮이는 천지차이였다. 특히 가파른 언덕을 마주했는데, 짐마차를 뒤에서 밀고, 기수들의 말까지도 짐마차를 밀어야 했다. 드낙은 힘깨나 쓰는 장정처럼 가장 힘을 주기 좋은 곳에서 밀어야 했다.
“지금!”
힘이 후달리면 순식간에 날씬한 순찰자 두 명에 쇽쇽! 양쪽에 두툼한 돌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앞바퀴에도 놓아서 브레이크를 놓았다.
“앞으로 2번 더 하면 넘어갈 수 있겠어.”
드낙의 혼잣말에 모두 한 소리를 했다. 이 언덕을 파내지 않고 길을 낸 책임자를 찾아야 한다고 바루익이 성을 냈고, 이스핀은 분명 노름에 져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붙였다.
거기에 대해서 온갖 추측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금방 흘렀다.
2일째에는 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습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나약한 자들의 습격이었다. 또한 그들은 당장이라도 덤빌 것처럼 굴었지만, 무기를 쥔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머, 먹을 것을 주십시오. 기사 나리. 안 그러면 보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자들은 늙은 노인이었고, 그의 등 뒤에는 여자 하나와 아기가 지쳐서 잠자고 있었다. 아기는 눈물자국과 땟국물자국이 섞여있었다.
“어디서 무기를 세워올리는가!”
바루익이 큰소리를 치면서 무기를 뽑았다. 괘씸해도 정도가 있었다. 당장 목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드낙이 그 검을 손으로 잡아서 내렸다.
“드낙 경? 경우도 이런 경우가 없소. 저들의 행동을 보시오. 은혜를 갚을 것으로는 안 보이오.”
그 말에 드낙이 냉큼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 울리는 성량에 바로 옆에 있던 바루익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무릎을 꿇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허헉.”
노인이 드낙의 고함에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버렸다. 그리고 뒤에서 지켜보던 여자가 노인의 등에 손을 내며 누르자 노인 또한 무릎을 꿇고, 아예 머리를 땅에 박았다.
“이스핀! 남는 식량을 가져와라.”
“예.”
그 말을 한 드낙이 노인에게 다가갔다. 거친 철소리에 노인이 몸을 들썩했다. 보이지 않았기에 더욱 공포감을 느꼈다.
“코앞이 쌍둥이 성채인데 왜 그곳으로 가지 못했느냐?”
“수용인원이 다 되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계곡 성채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라 결국 이곳 언덕에서 굴을 파고 숨어지내고 있었습니다. 아들 놈은 난리통에 헤어져 버렸고, 마을은 몬스터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노인은 말을 하면서도 침을 삼키고, 말을 더듬으며 때로는 기침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낙은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예외가 있을 수 있겠소?”
드낙이 바루익을 보고 말하자 바루익은 고개를 저었다. 이에 드낙은 이스핀이 챙겨온 식량만을 건넸다.
“이걸로 만족하라.”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드낙은 자신의 이름이나, 명성조차 말하지 않고, 그대로 그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그저 기쁨에 젖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할 뿐, 드낙에 대해서 묻지도 않았다.
이스핀은 괜히 어깨를 쫙 폈다.
바루익을 비롯한 기수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는데, 귀족을 모독한 자를 살려두었기 때문이다. 귀족에게 민감한 것을 드낙이 너무 쉽게 넘어가자 이해하기 힘든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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