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7 <-- 구불 계곡을 지나 -->
축제가 벌어졌다. 흥을 돋우기 위해서 음식이 먼저 제공됐고, 술도 곁들어졌다. 일단 배가 불러야 놀기도 좋았다.
마을의 지역 유지들은 드낙이 이번에 얻은 것을 더 탐냈지만 다른 사람들은 박쥐 고기에 눈이 팔려있었다. 그것만 해도 겨울은 쉬이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핀 부대장과 성기사 케이슨이 직접 배분에 동참할 것이었기에 벌써 놀자판이었다.
참고로 〈성기사 케이슨〉은 이번 전투에 공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피난민들과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없는 사람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성기사〉다운 행동이었다. 그 덕에 드낙은 더욱더 케이슨을 신뢰했다. 그의 행동을 짚어내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의 목걸이에 새겨진 것처럼 그의 행동은 실로 읽기 쉬웠다.
“라일라이라~ 조용한 계곡에~ 흐르는 계곡물에~.”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자 서로 어울려 춤을 췄다. 이스핀은 당연히 찜을 찍어놓은 여성이 있었다. 저번에 함께 살을 부대낀 여성이었다. 각진 사각 턱에 강렬한 이목구비를 가져서 눈매가 아주 예쁜 여성이었다.
이스핀은 바짝 붙어서는 그녀의 귀를 핥았다. 벌써부터 침대에 뒹굴뒹굴할 생각밖에 없었다. 드낙은 고개를 돌렸다. 괜히 봤자 질투만 날 뿐이다.
‘적어도 영지에 마탑을 세우고, 마법사 집단을 만들고 나서 즐겨야지.’
지금은 달릴 때였다.
“잔 받으십시오.”
바루익과 술을 조금 걸쳤다. 그는 이번 결정에 있어서 드낙과 반대되는 입장이었지만 크게 반대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드낙의 발언권을 반박해도 조언에 가까운 위치에서 해야 할 정도로 드낙이 가지는 영향력은 거대했다.
결코 크게 반대할 수가 없었다.
“내일에 마을을 떠나면 조용한 성채까지 며칠이오?"
“짧으면 2일에서 길면 4일 정도요. 계곡이라 이동거리가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오.”
오르막, 내리막, 거친 길 등등 이동 시간이 거리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 계곡이었다. 바루익은 이어서 말했다.
“조용한 계곡 성채에서 〈쌍둥이 성채〉까지는 불과 3일 거리에 있소. 서로 봉화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라서 계곡 성채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아크온 경에 대한 정보를 가장 빠른 것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오.”
“그건 다행이오.”
이곳 마을의 술은 드낙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드낙은 맛있게 먹는 척을 해야 했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먹는 것을 정면에 대고 맛없다고 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
보상이라고 해도 받은 것이고, 선물이었다.
“드낙 님! 하하하!”
드낙은 곳곳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어도 찾아오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핀 또한 거사(?)를 치르기 전에 드낙에게 왔다. 혼자서 왔는데, 당연히 드낙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다.
“녀석, 재미나게 보내고 있더구나. 그 여자랑은 아예 끝까지 갈 생각이냐?”
“허락만 해주신다면, 데리고 〈호수 마을〉로 가고 싶습니다. 결혼식은 여기서 올리고요.”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드낙이 놀라서 헛기침을 했다.
“쿨럭! 저, 정말로 결혼할 생각이냐?”
“예. 속궁합은 두말할 것도 없고, 동생들도 여럿 키워서 살림도 잘합니다. 어제는 저녁을 그곳 집에서 먹고 잠도 잤습니다.”
미칠듯한 스피드였다. 이스핀의 갑작스러운 발표에 드낙은 놀란 것도 잠시 이내 크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부하의 결혼식이 코앞인데, 해줄 것이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의 가족들에게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팔꿈치를 접으면 끌어안아지는 것이 이스핀이었다. 그는 드낙의 부하였고, 가신이었다.
자신의 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크게 여비를 가져올 것을 그랬다. 너의 상관이고, 주군인데 선물 하나 못 주겠구나.”
“하하하. 그런 것 바라지도 않습니다.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웃어서 말하지만 이스핀도 그냥 막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혼식이 가져올 온갖 일들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냥 여자가 하고 싶다고 했고, 별생각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인 정도였다.
“진지하게 정말로 할 마음을 먹은 것이냐?”
“전 항상 진지합니다. 가정을 꾸리려면 제이니만 한 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 나중에 소개해다오.”
드낙은 크게 캐묻지는 않았다. 연관되면 머리가 아플 것이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드낙 님. 이제 곧 트롤 토벌에 참가하지 않습니까?”
“그래.”
이스핀은 트롤 토벌에 대한 기대와 온갖 상상을 이야기했다. 드낙은 들어주면서 똑같이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토성(土城)까지 무너뜨린 존재였다.
‘아! 세파리아스에게 묻는 걸 깜빡했네. 오늘 물어봐야겠다.’
잊었던 것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드낙은 이스핀마저 그렇게 떠나가자 조용한 한때를 보냈다. 모두 즐기기 바빴지만 드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친하게 지내기 어려운 존재였다. 결국 드낙이 몸을 일으켜서 마찬가지로 혼자 있는 케이슨에게 다가갔다.
“아! 드낙 경.”
그가 일어나서 드낙을 맞이했다.
“성기사도 술을 마십니까?”
“사람의 손으로 빚은 것인데, 가리면 되겠습니까?”
케이슨이 거침없이 말했다. 그 말에 드낙은 들고 온 술병을 테이블에 놓았다. 성기사는 뭔가 금욕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케이슨에게 여자를 권하는 사람도 없었고, 술을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
있으면 다 나눠주었기에 술 마시는 모습을 보지 못한 탓도 컸다.
“드낙 경의 결정에 모두가 이렇게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렘린 토벌이 드낙 경에게 준 것은 없지 않습니까? 여긴 그대의 토지도 아니고, 몽펠리에의 영토입니다. 세금도, 토지도, 건물도, 사람도 모두 몽펠리에 가문의 것입니다.”
기사가 얻은 것은 고작 부산물뿐이었다.
〈기사〉이기에 희귀한 부산물도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케이슨은 이번 일로 드낙에게 큰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익이 크지 않아도,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이었다. 귀족답지 않은 행보였다.
큰 것이 보이면 그것부터 쥐는 것이 귀족이었다. 〈불파겐의 몰락〉 이전에는 이권이 1순위였고, 〈백금 왕가의 시대〉부터는 명예가 1순위였다. 그리고 이 마을의 일은 둘 모두 잡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마을의 문제를 위해서 거의 3일을 투자한 행보는 케이슨의 마음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보통 귀족과는 다르다. 저 붉은 머리카락은 불파겐의 후예인데, 피의 역사 속에서 깨우친 것이 있다는 것이겠지.’
성기사에게조차 있었던 불파겐에 대한 편협한 시선 또한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들에게 부산물은 내어주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케이슨은 한 발 더 나서서 물어보았다. 〈그렘린의 부산물〉에 대한 것이었다. 드낙은 능숙하게 이를 받아쳤다.
“〈버려진 영지〉에 있는 제 영지민들이 생각나서 그것만은 양보를 못하겠더군요. 마음 같아서는 고기조차 말려서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케이슨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이내 납득했다. 드낙이 계속해서 자신의 토지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이다.
두런두런, 술 취한 것처럼 이야기를 가늘게 이어나갔다.
“개척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마을을. 온갖 문제들이 득실거리죠. 척박한 석지(石地)가 가득한 곳입니다. 개간도 해야 하고, 내년 봄이 되어도 농사는 꿈에도 못 꾸겠죠.”
사교도에 대한 것은 언급을 피했다.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신 개척 마을에 대한 몇몇 이야기를 곁들어주었다. 케이슨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케이슨은 크게 반응하지 않고, 꾸준히 들어주기만 했다.
그렇게 그날의 잔치는 끝이 났다.
드낙은 큰 의미를 가지는 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의 일로 얻은 것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검은 연기가 그를 덮쳤다.
〈검은 꿈〉에 들어선 드낙은 트롤에 대해서 묻기 위해 세파리아스를 찾았다.
“〈외눈 다크 트롤〉이라. 악마, 싸이클롭스의 피를 각성한 트롤에 대해서 알고 싶다라···”
세파리아스가 입을 열면서 와인을 가늠하듯이 말을 굴렸다. 약간의 침묵이 있었다.
“싸이클롭스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게 뭐냐?”
“외눈. 거인. 강함. 악마. 이 정도?”
남들이 말하는 것을 대충 듣기만 한 드낙이었다. 가만히 보던 포낙서스가 말했다. 그는 악마를 숭배하는 흑마법사의 제자였다. 조각난 기억 중에서도 악마에 대한 것은 제법 높은 수준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제가 한 말씀해도 되겠습니까?”
“해봐.”
드낙의 거침없는 말에 세파리아스도 포낙서스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하찮은 미물을 보는 눈이었다. 포낙서스는 세파리아스 불파겐을 외면하고 드낙과 눈을 마주쳤다.
일그러진 육신을 지닌 〈변종 키메라〉의 모습이 포낙서스의 모습이었다. 그는 흉측한 모습으로 말을 시작했다.
“〈악마 싸이클롭스〉는 악마 중에서도 대형급의 존재입니다. 막강한 돌격대장이고 선봉대장이지만 실제로는 공성 병기나 다름없습니다.”
덩치가 크기 때문에 전방, 후방 어디서든 운용이 가능한 싸이클롭스였다. 악마의 대군에 반드시 섞여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악마들은 싸이클롭스를 얻기 위해서 큰 위험을 자처해서 걷기도 했다.
“돌팔매질을 매우 잘할뿐더러, 자신보다 3배는 큰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가죽은 용암으로 단단해진 바위보다 더 단단합니다.”
살아있는 공성병기였고, 숙련도를 높일 수 있기에 어쭙잖은 공성병기보다 명중률이 높았다. 매번 무게가 달라져도 그에 따라서 던질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바위 공성 악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드낙은 〈토성〉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었으며, 〈외눈 다크 트롤〉의 무서움 또한 알아차렸다.
무식한 바위를 던지는 놈인데, 기사라고 해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대형 버스를 쾅쾅 던져대는 놈에게 달려드는 미친놈이 있을까? 〈검은 꿈〉을 몇 번이나 겪은 드낙이 아니고서는 선두를 자처하기도 힘들 것이다.
‘물론 이 세계 기사는 명예욕이 실로 대단해서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정상적이지 않은 자들이 기사였고, 기득권층이었다. 그들의 모순된 모습을 드낙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또 외눈이라고 해서 시야가 좁은 것도 아닙니다. 악마의 눈이기 때문에 전투 때마다 눈이 뒤통수까지 찢어져서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매우 기괴해서 글로 설명할 수 없고, 눈으로 보아도 다른 이에게 말하기 어렵다고 전해집니다.”
신기한 이야기도 있었다. 눈이 쭉 찢어져서는 뒤통수까지 찢어져서 시야를 보기도 한다는 소리는 듣기에 따라 여러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드낙은 가장 무식한 상상을 했다.
뼈, 피부, 살을 밀어내고 눈이 X맨처럼 일자형으로 되는 것이었다. 눈동자의 크기 또한 납작하게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판타지 세상이기 때문이다. 〈악마의 힘〉으로 능히 그런 변모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단히 유용한 정보인데.”
“다른 것도 많습니다. 어떤 싸이클롭스는 입에서 소악마(小惡魔)를 토해내기도 하고, 눈에서 농축된 〈악마의 힘〉을 쏘아보내어 대규모 마법을 무력화한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위 투척〉
〈3배의 힘〉
〈넓게 찢긴 전투 시야〉
〈소악마 토악질〉
〈무효화의 안광〉
하나하나 대단한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드낙은 〈혼혈〉인 트롤이 그 모든 것을 가졌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물론 싸이클롭스의 모든 능력을 이어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놈은 트롤이기 때문입니다.”
〈변종 키메라 포낙서스〉의 말을 들은 드낙이 세파리아스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뭐, 더 추가해서 말할 거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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