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0 <-- 몽펠리에 령 -->
뱀파이어에게 물렸지만 뱀파이어가 되지 못하고 열등한 혈력을 지닌 저열한 흡혈귀가 바로 뱀피(Bampi)들이었다.
그들은 뱀파이어 클랜에 들지도 못하고, 버려졌다. 그렇기에 살기 위해서 뭉쳤지만 드낙을 만나고 서로 살기 위해서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도망치던 뱀피들을 모조리 죽였다. 몇 놈은 도망갔을 테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시체를 모아라!”
횃불을 들고, 시체를 수거하기 시작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언제든지 언데드가 될 수 있는 것이 뱀피들이었다. 반쯤 살아있는 놈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드낙은 돈 욕심을 냈다.
〈뱀피의 심장〉이 마법사들이 제법 좋아하는 마법 재료라는 것이었다. 하나에 은화 수십 닢은 너끈하다고 말했다. 보기 힘든 몬스터였기 때문이고, 그들이 제어가 불가능한 혈력이 담가진 심장은 내구력이 대단했다.
마법적으로 쓰기에 아주 독특한 재료인 것이다.
쩌적!
드낙이 직접 심장을 적출했다. 57마리 중 온전한 심장을 지닌 뱀피는 42마리였다. 시체가 하나씩 얹어졌다. 또한 〈뱀피의 골검〉도 뜯어냈다. 몬스터의 뼈로 된 날카롭게 길쭉한 골검은 다양한 곳에 쓰일 수 있었다.
가볍고 내구력이 단단하기에 건축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물론 부정한 것이었기에 신성력으로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의 건축 기술로는 건설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건축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었다.
114개의 골검이 사람들의 손에 뽑혔다.
몸을 대충 씻고, 피를 걷어내고 난 뒤에 휴식에 취했다. 드낙은 피 냄새에 혹여나 이끌릴 것들을 잡기 위해 철야를 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교대를 했다.
“내일 점심이 지나서야 출발을 하겠군.”
“예. 미리 준비해놓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드낙은 서둘러 잠에 빠져들었다. 피곤한 것은 덜했지만 〈검은 꿈〉에 검은 문이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초전(初戰)에 박살을 냈기에 짧은 전투였지, 놈들의 움직임은 기민했고, 특성 또한 좋았다. 능히 드낙에게 능력을 줄 만했다.
검은 연기가 그를 덮쳤다.
“에이.”
하지만 기대했던 검은 문은 나타나지 않았다.
끼기기기긱!
기계음이 들려왔다. 〈검은 여과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잔뜩 모여져 있는 검은 덩어리들이 든 큰 통이 관을 따라 흰 물을 짜냈다. 대량으로 죽이면 생기는 능력을 주는 것이 검은 꿈의 새로운 시스템인 〈검은 여과기〉였다.
드낙의 기대에 세파리아스가 쏘아붙였다. 뭐든지 쉽게 먹으려고 하는 것 때문이었다.
“네 수준을 생각해라.”
세파리아스의 말에 드낙은 코웃음쳤다. 칼로 베이면 잘리는 피부를 지닌 것이 드낙이었다. 전신갑주가 아니면 언제든지 목이 따일 수 있고, 마법 투구가 아니면 눈먼 화살에도 죽을 수 있었다.
인간의 탈을 쓴 채 내부가 개조당하듯이 강해지고 있어도 다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책임회피의 대가인 드낙은 변명도 잘 지어낼 수 있었다.
번듯한 외모로 해골기사의 모습이 아닌 채로 세파리아스가 성대를 움직여 육성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뱀피니 뭐니, 지랄병 하지 말고 빨리 쌍둥이 성채로 가기나 해라.”
“내가 뱀피를 찾은 거냐? 뱀피가 가는 길에 날 만난 거지.”
티격태격 거리면서 드낙은 하얀 물이 든 그릇을 건드렸다. 환상이 그를 겹쳤다.
‘대량으로 죽여서 얻어도 어차피 이득.’
일정 수준 이상의 내출혈은 막아내지 못하는 불사혈관도 이름만 대단할 뿐이지, 중상 이상의 치료는 긴 시간을 따져야 했다.
이번 능력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 여겼다.
쏴아아!
바닷속에서 흐르는 거대한 물의 흐름을 듣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피의 흐름이었다. 보통 피는 아니었다.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오.’
호흡을 함에 있어서 전과는 다르게 더 적게 숨을 쉬어도 효율이 좋게 되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미약한 혈력(血力)이 몸 안을 피와 함께 타고 흐르며 신체능력이 강화됐다.
무호흡 상태에서의 근육에도 자연히 산소가 더 오래 머물렀다. 무호흡 상태에서의 근육의 컨디션이 더욱 오래 유지되는 것이다.
수많은 초월적인 힘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기사인 드낙에게 있어서는 좋은 능력이었다. 백병전 능력이 한 차원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피가 강화된다는 것은 수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아주 작은 주춧돌만큼이나 작게 보이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쌓여지는 수많은 탑과 건축물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발끝을 돌리면서 시작되는 작은 원심력이 거대한 바위도 부수는 법이었다.
그게 바로 무(武).
보잘것없이 태어난 인간이라는 종족이 남들보다 악착같이 싸움의 요령을 쌓는 이유이기도 했다.
〈타고난 혈액〉은 피 그 자체를 상향 시켜주는 능력이었다.
환상에서 깨어난 드낙은 거침없이 그것을 받아마셨다.
“후우! 뭔가 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세파리아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은 그와 꿈속에서 대련을 하는 날이었다. 물론 그전에 〈불파겐의 방계〉가 될 이스핀에 대해서 그가 물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이스핀은 어떠냐?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냐?”
“아주 피땀을 흘리고 있던걸. 아닌가?”
“맞다. 사람에게 강력한 보상만큼 먹음직스러운 것이 없지. 피를 토하더라도 계속 뛸 것이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추가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그릇은 커지지 않는다. 다른 중책을 맡기려 하지 말고, 곁에 두어 호위 기사로 계속 삼아라.”
“그걸 누가 결정해? 지가 알아서 잘하면 더 높은 자리에 서는 것이고, 기회를 받으면 노력하는 법이지.”
드낙은 그 말에 여지를 두었다. 실패한 사람도 그 실패를 곱씹어 감내한다면 훌륭한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세파리아스의 대련은 혹독했다. 하지만 드낙은 그 순간조차도 즐겁게 여겨졌다.
실력이 계속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스핀에게 불파겐의 비전을 조금 전해주면서 스스로도 깨달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흐름.’
세파리아스의 말이 맞았다.
삼류의 싸움은 육체의 싸움이다. 그것은 짐승과 짐승의 결투나 다름없었다. 그저 크기만 크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 바로 삼류의 싸움이다.
덩치가 크면 끝인 것이다.
카가가각!
드낙의 검이 세파리아스의 검을 흘리며 서로의 검이 교차했다. 또한 서로의 검이 휘어지더니 서로를 향해 뱀처럼 튀어 올라 검끼리 강하게 충돌했다.
“흐! 제법이군.”
“실력이 어째 더 무뎌진 것 같다?”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재차 달려들었다. 중단세로 어깨를 노리며 찌르며 사선으로 찍어눌렀으며 드낙이 두 번의 공격을 피하고 올려쳐 받아치자 상단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건 눈속임이었다.
발로 드낙의 발을 짓밟았다.
이류의 싸움이 기술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좋은 공간을 점유하는 싸움이기도 했다. 더 좋은 위치. 더 좋은 공간을 미리 선점하면 이기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아래보다는 위. 왼쪽보다는 오른쪽.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선점할수록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상단세를 취한 세파리아스의 내려치기는 쉽게 여길 수 없었다. 특히나 언제든지 탄력적으로 휘어지는 롱소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불똥이 튀듯이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드낙은 되려 품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쿵!
서로 몸이 부딪쳤다. 거친 충격 속에서 드낙이 먼저 발을 사타구니 쪽으로 집어넣어 그대로 세파리아스를 붕 뜨게 들어 올려 넘어뜨렸다.
“후, 후하하!”
세파리아스가 대자로 뻗어서는 웃었다.
“일곱 번을 패하더니 이걸 해보고 싶었던 거냐? 어째 자꾸만 파고들 생각을 하더니.”
8번째의 대련에 드낙이 드디어 1승을 챙긴 것이다.
“어때? 하늘 뒤집기라고. 새로운 비전.”
“네 덩치로는 어림도 없다. 하지만 계속 신체능력이 강화된다면 덩치 큰 놈들에게 허를 찌르게 만들기는 좋군.”
〈히멜 움키펜(Himmel umkippen, 하늘 뒤집기)〉은 상단세의 카운터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놈들을 상대할 비전이라는 것이 더 옳았다.
어느새 티격태격한 것도 잠시 세파리아스가 몇몇 상황 만들기에 대한 페이크를 전수해주었다. 골격을 잡는 것은 드낙의 상상력이었지만 그곳에 살을 붙이는 것이 세파리아스였다.
그의 노하우는 실로 대단했고, 현실감이 물씬 풍겨왔기에 무조건 도움이 되었다.
*
뱀피들의 부산물을 가지고, 드낙의 일행은 〈봄녘 마을〉에 도착했다.
댕딩덩덩!!
질 나쁜 종소리가 울렸다. 목책에서 문이 열렸는데, 척 봐도 사람들이었고, 전신갑주를 입은 기사뿐만 아니라 몽펠리에의 깃발을 휘날리는 기병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정규병사 다섯이었다. 몽펠리에 영지에서도 가장 외부인 봄녘 마을까지 정규병이 주둔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금을 내는 무수히 많은 마을 중에서 〈봄녘 마을〉에게 까지 정규군이 배치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도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정중하게 예를 올리는 병사였다.
“〈왕국 야영지〉에서 오는 길이다. 이곳에 기사는 있는가?”
드낙을 대신해서 바루익이 나서서 말하였다. 드낙의 카리스마와 기세가 대단하여 다른 이에게 시선을 두지 못한 정규병이 그제서야 바루익을 볼 수 있었다.
“아! 바루익 블라인스님! 이곳에는 〈다이로 에드가(Dario Edgar)〉경께서 계십니다.”
“안내하라.”
“예!”
초병을 제외하고 병사들 두 명이 그들을 안내했다.
다이로 에드가는 전신갑주를 입은 채 수련을 하고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그들을 맞이했다.
“바루익 경. 실로 오랜만이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좋아 보이오.”
서로 친분을 과시했다. 특히 다른 이들의 눈이 있었기에 없는 친분도 생길 정도였다. 두 사람은 근황을 나누었다. 당연히 바루익의 이야기가 주류였다. 더 풍부했기 때문에 다이로가 그 말에 크게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허. 〈청혈기사(Blue blood Knight)〉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구울 묘지기〉를 홀로 토벌하다니. 엄청나시오.”
고위 기사가 아닌 다이오가 혀를 내둘렀다. 변변찮은 명예가 없는 것이 그였다. 부러움과 존경심이 가득 찬 눈을 했다.
즐거운 이야기도 잠시, 드낙은 자신을 소개하고 난 다음에 본론을 꺼냈다.
“계곡을 경유해서 〈쌍둥이 성채〉로 갈려고 하는데, 괜찮다고 생각하시오?”
“그곳은 워낙 폐쇄적인 곳이라 소문이 들려오지 않소. 딱히 내가 말할 것은 없소. 허나 이미 고위 기사나 다름없는 드낙 경이 지나가지 못할 길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소.”
인구의 변동이 잘 없는 곳이 몽펠리에 령의 동북부 계곡 지역이었다. 거기서 사는 이들은 대체로 거기서 살다가 가기 때문이었다.
향하는 기사나 병사들이 텀을 두고 돌아오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외눈 다크 트롤〉에 대한 것은 어떻게 되고 있소?”
“북쪽에서 난리를 치면서 사방팔방 휘젓고 다니고 있습니다. 〈싸이클롭스〉의 악마의 기운 탓에···”
말을 하려던 차에 밖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커서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될 정도였다.
밖으로 나가자 우리에서 뛰쳐나온 돼지가 눈이 충혈이 된 채 날뛰고 있었다. 밧줄에 꽁꽁 묶여서 사방에서 사람들이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고통스러운지 소리를 꽥꽥 질러대었다.
“돼지가 왜 저러는 것이오?”
“악마의 기운 때문이오. 이성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치안이 그만큼 어지러워지고 골치가 아플 지경이오.”
검을 뽑은 다이로가 그대로 돼지의 멱을 땄다. 한 번 광분하면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 짐승이었다.
“피는 뽑아내고, 나중에 셈을 치를 테니 고기는 썩기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어라.”
“예!”
돼지를 잃어도 정가를 받게 될 사람은 불만이 없었고, 다른 이들은 기사의 덕으로 고기를 맛보게 되니 좋았다. 현명한 처사였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 듯한데?’
드낙은 생각보다 트롤 토벌이 힘들 것이라고 더 깊게 체감하게 되었다. 그저 악마인 〈싸이클롭스〉의 기운이 뻗쳐있다고 해서 가축이 광분하다니?
오싹함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5671자
평추코! 다양한 의견 감사합니다.
즐거운 추석 연휴입니다.
모두 좋은 연휴되시고,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추석 때 연재는···불투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