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7 <-- 몽펠리에 령 -->
갈색의 길쭉한 작은 목함 속에 있는 작은 유리병 속에는 꿈틀거리는 온갖 색상이 섞여있는 슬라임이 있었다. 때때로 원색이기도 했다. 마치 실패작처럼 느껴졌다.
“〈마력의 슬라임 유리병〉이라는 것이오. 15병이 들어있고, 보다시피 집게 손톱만 하지.”
“효과는 무엇이오?”
드낙이 매우 흥미롭게 보았다. 확실히 마법 상점에서 민간에 파는 것과 격이 달랐다. 그곳이 낙후된 마법 세계였다면 이곳은 진짜 마법 세계 같았다. 그리고 그 힘의 격차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시민혁명이니 그딴 말이 쏙 들어갈 정도의 발전의 차이, 그 손에 쥔 것이 달랐다.
〈남부 왕국〉의 부유한 가문이 이럴진대, 제국은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거기에 대륙의 7할을 드워프와 양분한 것이 엘프였다. 까마득한 강함의 차이가 느껴졌다.
“파이룬 가문의 역사적인 개발 물약이오. 일반적인 물약이 아니라, 마력을 액체화시킨 물건이기에 마법 아이템이라고 해도 무방하오.”
게실리안이 그 효과를 줄줄이 나열했는데, 왜 최근의 전신갑주에 수리마법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갑옷의 내부 피로도를 치유하기 때문에 큰 전투를 몇 번 겪은 전신갑주를 의심하여 다시 녹여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소. 못해도 큰 전투 두 번에 한 번꼴로 갑옷의 내부나 외부에 발라주면 끝이오. 알아서 흡수되어 사방으로 뻗어나가니 여러 개 쓸 필요도 없소.”
“이건 오직 파이룬 가문만의 것이오?”
“우리 가문만의 것도 있고, 다른 가문도 비슷한 것을 쓰기도 하오.”
그 말을 들은 드낙은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특별히 희소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파이룬 가문의 슬라임 유리병의 특징은 마력회로 또한 수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오. 물론 크게 망가지면 불가능하오. 너무 맹신하지는 않는 게 좋소.”
‘와우.’
드낙이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은박 독수리 목함(Silver foil Eagle Crate)〉를 다시 잠갔다. 상자만 팔아도 큰돈이 될 터였다. 물론 팔기 어려운 물품이라 다 쓰면 관상용으로나 쓸 법했다.
“이제 저녁 식사를 하러 가면 되오.”
세 사람이 밖으로 향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드낙의 거친 머리카락을 지나갔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무슨 호랑이 털처럼 굵었다.
‘자를 수도 없고.’
머리카락에 깃든 〈마력저항〉은 머리카락이 길면 길수록 좋았다. 자르는 것은 효과를 크게 낮추는 결과를 남길 수 있었다.
“이제 쌍둥이 성채로 가시겠구려.”
〈리오넬 파이룬(Lionel Faerun)〉의 말에 드낙이 수긍하며 대답했다.
“그렇소. 〈외눈 다크 트롤〉이 아직도 날뛰고 있지 않소? 빨리 토벌을 해야 하지 않겠소.”
“못해도 겨울이나 되어서야 토벌이 끝날 것이오.”
“겨, 겨울?! 그렇게나 오래 걸린단 말이오?”
그 말에 드낙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무슨 그렇게 오래 걸린단 말인가? 그 표정에 리오넬이 부연 설명을 재빨리 하였다. 드낙이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토성까지 무너뜨린 놈이오. 기사도 하나 죽였다고 소문이 퍼졌던데, 만약 그렇다면 장기전을 노리는 것이 보통이오. 장기전이라도 막아줄 기사가 〈버팔로 나이트(Buffalo Knight)〉 혼자서는 힘들기에 다른 기사를 모집한 것이오.”
“그렇게 기사가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소만···”
드낙은 토벌전의 기사들이 자신의 영지나 토지 혹은 장원의 보호를 위해 떠나갔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그런 말을 내뱉었다. 말실수였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책하지 않았다.
“믿음직한 자유기사가 장원에 있으니, 드낙 경은 걱정이 없겠소만 다른 곳은 아니지 않소? 마을의 숫자에 비해서 기사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소. 그래서 몽펠리에 가문의 토벌도 지금 한 번 고꾸라지지 않았소?”
그 말에 드낙이 빠르게 납득하고 이해했다.
‘그랬었지, 참.’
“가장 빨리 쌍둥이 성채에 가려면 〈세 개의 강가〉를 거쳐서 몽펠리에 령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 초입의 〈봄녘 마을〉에서 북쪽에 있는 〈조용한 계곡 성채〉를 거쳐서 바로 몽펠리에 령의 가장 북쪽에 있는 〈쌍둥이 성채〉로 가는 것이 최고일 것이오.”
게실리안 지휘관은 드낙이 가야 할 길도 알려주었다. 최단기간으로 갈 수 있는 길이었다. 봄녘 마을을 거쳐 세 개의 강가를 경유하면 돌아서 가는 것처럼 되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리오넬이 인상을 찌푸렸다.
“계곡이 많은 곳이라 〈싸이클롭스〉의 기운에 날뛰는 야수와 몬스터가 많을 텐데···”
그 걱정에 게실리안이 웃었다.
“드낙 경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소?”
“그렇긴 하오.”
두 사람은 서로 반말을 하며 친하던 모습을 드낙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 드낙은 경유지를 새겨들었다.
“리오넬 경께서는 이후에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시체를 모두 소각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이 근방을 돌아다니며 도움을 줄 생각이오. 다른 곳보다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흑마법사도 그렇고 이 주변에 확실히 뭔가가 있는 듯하오.”
그는 다양한 수색작업을 생각할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온 김에 한 번 더 들쑤실 생각이었다. 그 행위를 통해서 치안도 높이고, 피난민들을 인솔할 생각을 가졌다.
“아하.”
드낙은 맞장구를 치면서 리오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특히나 민생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흉흉한 이야기뿐이었다.
야수에게 풍비박산이 난 화전민의 폐허에서 어른 없이 살아가던 삼 남매를 봤다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살기만 사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애초에 그런 자들을 챙기는 것을 행복해하는 성격인 듯했다. 그래서 셋째 아들인 게실리안이 파이룬 가문의 차기 가주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당연히 첫째 아들도 가업을 이어받을 자는 아닌 듯했다.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게실리안이 적당히 때를 보아서 주제를 돌리기 위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입술에 기름이 범벅된 세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이 자리에서 그들을 위해 잔을 부딪치는 것은 대단히 모순되어있었지만 모두 진지했다.
“드낙 경은 생각을 좀 해보셨소?”
“어떤 것 말이오?”
“하하하. 내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막둥이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자네와 나이 차이도 3살 밖에 차이가 안 나네. 이제 18살이지.”
“아··· 수도에서 공부를 하고 계신다는···”
게실리안의 말에 드낙이 생각이 나서 말했다. 하지만 어물쩍 거리는 것이 절로 보였다. 기반을 제대로 잡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드낙은 성욕이라는 것도 사실 검은 문의 쾌락으로 욕구가 해소되고 있어서 굶주림이 적었다.
지구의 현대인으로 살 때에는 자기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서 버둥거리기 바빠서 연애도 후순으로 미뤄두며 살았다. 애초에 잘 생기지도 않았기에 여자가 꼬인 적도 없었다.
해본 놈이 잘 안다고 그 말이 딱 그짝이었다. 또 괜히 불안감도 느끼고 있었다.
“푸하하핫!”
그 어물쩍거리는 태도를 본 리오넬이 입에 물고 있던 고기 조각을 토해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박살 난 전신갑주를 봤을 때는 호랑이 같았던 작자가 결혼이나 여자 이야기에 겁쟁이처럼 주저하는 것을 보니 너무나도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게실리안도 술을 질질 흘리며 기침하며 서둘러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아니, 아직 때가 아니오. 그래서 그런 것이오.”
드낙 또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아무렴. 불파겐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데, 빨리빨리 기반을 잡고 결혼을 성대하게 치러야 하지 않겠소?”
리오넬이 웃는 얼굴로 드낙을 변호해주었다. 하지만 드낙은 그것마저 놀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시오. 아직 그분의 이름도 모르는데,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소.”
하지만 드낙의 가치관은 두 사람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얼토당토않은 변명이라고 두 사람은 받아들였다.
“무슨 그런 소리를? 첩을 들이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니, 이름이니 알아서 뭣하오? 가문이 잘 맞으면 결혼하는 것인데. 이름이야 지금 말하면 되고, 〈아샤 파이룬(Asha Faerun)〉이오. 아샤, 우리는 악아라고 부르오.”
리오넬이 웃으면서 말하며 술잔을 마셨다. 실로 재미나서 술이 당겼다.
“악아요? 그게 무슨 별명이오?”
“뭐만 봐도 깜짝, 깜짝 놀라서 악아요. 하하하.”
리오넬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막둥이 중의 막둥이가 아샤 파이룬이었다. 둘째인 리오넬과는 17살 차이나 났다.
“잘 생각하시오. 버려진 영지에서 남부의 부를 얻으려면 파이룬 가문을 거쳐가거나 새로운 길을 완전히 뚫어야 하지 않소?”
게실리안은 웃음기를 싹 지운 채 진지하게 말했다. 서로 방어기제를 아예 없애고 진짜로 어깨동무하면서 으쌰 으쌰 하기에는 결혼이 최고였다.
드낙 또한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말했다.
“적어도 가문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을 때까지는 어떤 곳과도 결혼은 생각 없소.”
“허어··· 그러면 너무 늦을 텐데···”
게실리안이 크게 걱정했다. 왜냐하면 드낙의 나이는 개뿔이고, 자신의 가문이 아닌 다른 가문과 엮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오넬은 아예 파이룬 가문의 막둥이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했다.
“누가 보면 리오넬 경이 아샤··· 님을 키운 줄 알겠소.”
드낙이 그녀에 대한 호칭을 대충 님이라고 말하자 양쪽에서 난리를 쳤다.
“아내 될 사람인데 님은 무슨! 벌주를 받아야겠소.”
리오넬은 벌써 취해있었다. 혼자서 술병을 두 병이나 비운 것이 드낙의 눈에 들어왔다. 게실리안은 오늘 아예 확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북부 가문은 백금 왕가와 부딪칠 운명이었다.
남부들의 영주들처럼 토지를 잃고 후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밤이 깊어졌다.
*
〈형 도네투스〉는 조용하게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마지막 전투만 남았다.’
그의 강함은 오크답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직 쌍둥이 동생을 위해서 싸워온 그 투쟁의 시간은 평범한 오크와는 달랐고, 운이 적용되었지만 히드라를 잡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전사(大戰士) 수브락키(Souvlacki, 단단한 발)〉를 잡기 위해서 수많은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모든 전통을 믿는 오크 전사들이 호기롭게 달려들었지만 〈히드라의 타투(Hydra's Tattoo)〉를 보유한 도네투스를 이기리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의 오른팔에 있던 히드라의 문신은 어깨를 지나 옆구리까지 뻗쳐있었고, 심장에는 붉은색의 도끼 타투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크들끼리의 투쟁 속에서 수많은 오크 전사를 핏물로 만들어버린 〈형 도네투스〉였다.
〈오크 도끼의 타투(The Tattoo of the orc Ax)〉.
도끼술이 월등히 좋아지고, 덩치가 커지는 타투였다. 100명의 오크 전사를 투쟁으로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까다로운 타투이기도 했고, 대부분 투쟁 속에 뛰어든 오크 전사는 그것을 갖추지 못하고 죽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백설산맥(白雪山脈)〉은 온갖 야수들과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혼란무도(混亂無道)의 타투(Tattoo)〉 또한 등짝에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오크들이 길들이고 조련한 온갖 짐승들이 그의 손에 죽으면서 등판에 거대한 타투의 그림자가 생긴 것이다.
위로는 와이번이 날며 불을 뿜고 있었으며, 그리폰이 그 불을 피하며 달려들고 있었다.
아래로는 온갖 들짐승들이 날뛰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 타투의 존재를 몰랐다. 〈형 도네투스〉는 서둘러 등의 땀을 씻어내고는 다시 등을 가렸다.
‘이 타투가 완성되면, 어떤 타투인지 알 수 있겠지.’
야수와 관련된 것이었고, 무엇보다 성체(成體)가 되면 일각수를 가볍게 이기는 것이 와이번(Wyvern)이었다. 괜히 아룡(亞龍)이 아니었다. 드래곤과 비견된다고 여겨지는 것이 와이번이었다.
그런 존재가 타투의 그림자에 있으니 가슴이 뛸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5557자
평추코! 다양한 의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