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3 <-- 시체의 산, 검은 진액의 강 -->
책임론을 쥐고 달려들자 드낙이 깨갱했다. 뭔지 몰라도 네가 책임질 거냐라는 소리를 들으면 외면해버리기 쉬웠다. 아주 강력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제법 겪어본 것이 드낙이었다.
능숙하게 회피하고는 바루익을 대신 추궁하기 시작했다. 게실리안의 전략이 그대로 휘말린 바루익을 그를 대신해서 추궁하여 게실리안 지휘관이 최후의 일격을 날리지 않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게실리안이 칼로 벨 생각을 했다면, 드낙은 검면으로 후려치는 정도로 그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바루익 경, 그대도 사과를 크게 했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소? 또 이번 일에 대해서 충분치 못한 상태로 억지로 이 자리에 온 것도 그대의 죄이니. 이번 일을 함구하는 것을 약조한다면 괜찮은 것 아니오?”
만약 몽펠리에 가문의 작업이 들어온다면, 그가 명예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루익은 그것이 자신의 모든 커리어가 박살 나는 일임을 잘 알았다.
‘버팔로 나이트의 선택이 잘못된 결과로 남게 된다면 나의 실패는 곧 그분의 평가가 절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는 안 돼!’
제대로 된 전략 없이 한 두 개 정도의 방침만 가져온 그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게실리안 지휘관이 놓은 덫을 빠져나오는데 급급했다. 당황하면 더욱 실수를 하는 법이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도 당황하면 고꾸라지기 쉬웠다.
“그럴 수는 없소. 어떻게 몽펠리에 가문의 일원이 자신의 가문을 속이는 약속을 하겠소?”
그놈의 명성 탓을 하는 모습을 보자 드낙이 열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실익을 위해서라면 사실 자존심도 그냥 팔아버리는 것이 드낙이었다. 그는 화가 났기에 바루익이 주는 눈치를 확인하지 못했다.
‘한 번 더 찔러주시오. 그럼 내 다시 한 번 사과하겠소.’
한 번 사과해서 안 되는 일이라면 두 번, 세 번 사과하면 되는 일이었다. 거듭되는 사과에 게실리안 또한 부담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드낙은 인내심보다는 빠른 태세 변환을 좋아했다.
이쪽으로 뚫어서 안 되면 순식간에 반대쪽을 뚫는 것이 드낙이었다. 남한테는 우직함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인내심보다는 방법의 전환을 통해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그였다.
‘개 같은 자식이 쓴 것은 자기 목구멍에 안 넣겠다는 거야, 뭐야?’
드낙은 바루익을 욕하면서 그대로 손을 떼며 말했다.
“그럼 대체 어쩌겠다는 건가? 시원하게 몽펠리에의 중요한 정보라도 내어주게. 그래야 파이룬 가문 쪽에서도 이번 일을 덮어가는 것 아닌가?”
곧바로 바루익을 챙겨주다가도 그대로 게실리안에게 붙어버리는 모습에 바루익이 눈을 크게 떴다. 벼락처럼 날뛰는 언변이었다. 몇몇 이들은 변덕이 심하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의 태세 전환이었다.
바루익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바로 딴 길을 찾는 모습은 이런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이런 빌어먹을.’
그나마 보였던 희망이 사라지자 바루익은 결국 굴복했다.
“용서를 해주십시오. 이 이야기는 무덤까지 들고 가겠습니다.”
“흐헛.”
게실리안은 당장 일어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어졌다. 드낙이 알아서 판을 깔아주었기 때문이다. 서로 사인이 맞지 않았고, 바루익은 드낙을 깊게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였다.
“안 하겠다고 하다가 갑자기 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내가 어찌 믿겠소?”
“그것은···!”
바루익이 피를 토하듯이 말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다시 안으로 힘겹게 집어넣었다. 완전히 이번 자리에서 그는 망가져버렸기 때문이다. 총을 쥐지 않고 전쟁터로 뛰어든 격이었다.
“개인 인장은 있소?”
게실리안의 말에 바루익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같았다.
“개인인장도 아직 받지 않은 이를 어찌 믿어야 하나··· 계약서라도 써야겠소. 물론 몽펠리에의 이름을 적어야겠지.”
바루익이 손을 떨었다. 승패가 완전히 결정 난 순간이었다.
몽펠리에는 선수를 빼앗기게 될 것이고, 방해조차 못할 것이다. 질주하는 파이룬 가문을 걸고 넘어간다면, 계약서를 들먹이며 드낙과 추진하는 다른 이권에 파이룬 가문이 직접적으로 끼어들 수 있었다.
드낙과 함께할 수 있는 몇몇 사업에 대해서 파이룬이 7할 이상을 먹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은 드낙이 조율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업이 혼자서 결정하려면 대기업과 하청 관계쯤은 되어야 했다.
단가를 후려치거나 계약 전에 해지 통보를 해서 하청 기업의 사장조차도 박살을 내버릴 정도의 관계가 아니면 비즈니스 관계는 양쪽 모두의 의견이 조율되어야 했다.
물론 드낙은 거기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저 두 가문이 자신을 빌미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파이룬 가문은 지금 이 기회에 몽펠리에를 찍어누른다고 간단하게 생각할 뿐이지, 그 뒤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멀리 내다본다면 대부분 쉐도우 복싱을 하는 것이 드낙이기 때문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지금 이 싸움을 구경하기 바빴다.
‘근데 이상하네. 왜 바루익을 안 조지고, 몽펠리에를 조지는 거지?’
무례를 범한 것은 바루익이었는데, 정작 주먹을 맞게 될 것은 몽펠리에였다. 드낙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하자 속으로 감탄하며 게실리안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이런 무시무시한 작자를 보았나? 나중을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포석을 깔고 있다니!’
양쪽에서 이득을 보아야 하는 드낙에게 있어서 파이룬 가문이 크게 주도권을 가져가면 안 되었다.
단순히 몽펠리에를 짓눌러 선수를 안치기 위해서인 줄 알았는데, 간단하게 정리를 마음속에서 하고, 그 결과가 바루익 블라인스가 아닌 몽펠리에 가문으로 계약서를 통해서 다리가 놓아지자 순식간에 견적을 낼 수 있었다.
수학 문제를 못 풀다가 답안지를 보면 바로 풀어낼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드낙의 이해력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결과를 보고 전후 관계를 읽을 정도는 되었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겠다.’
답이 나오기 전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아니, 잘못은 바루익 경이 했는데, 왜 그것이 몽펠리에의 이름으로 작성을 해야 하오? 이해가 안 되어서···”
드낙이 궁색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적당히 이 상황을 타파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바루익의 눈이 흔들렸다. 게실리안 또한 예상치 못한 물음인 듯 주저했다.
‘나보고 이 자리에서 책임을 그대로 받아 죽으라는 소리가 아닌가···’
몽펠리에 가문에게 누를 주지 않고 그냥 깔끔하게 목숨을 버리라는 소리였다. 말 그대로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라는 소리를 드낙이 한 것이다.
‘지, 지독하군.’
게실리안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드낙의 발언이었다. 아주 적극적으로 두 가문의 싸움을 유도하는 말이었다. 너무 노골적이라서 오히려 주저하게 만들었다.
칼 쥔 상대에게 배 째라며 배를 들어내며 들이대는 꼴이었다.
일순 침묵이 내려앉았다.
게실리안으로서는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짜로 방계를 죽여서 전면전으로 갈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가문 내에서 의견을 적당히 통합하고 행해야 할 중대 사안이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독자적으로는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선택을 할 명분은 아니었다.
바루익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문을 위해서 스스로 죽는다는 것은 물론 명예로운 일이었지만 정보 하나 때문에 죽는 것은 부족한 면이 있었다.
드낙은 기류가 변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냥 이참에 몽펠리에에게 대장장이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할까? 그럼 좀 쌤쌤이 같은데. 퉁치자고 하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조용한 침묵 속에서 세 사람이 서로 입을 열지 못하자, 게실리안이 운을 뗐다.
“이거 기분 좋은 저녁 식사가 갑자기 활활 타오른 듯하오. 술이나 한 잔 나누는 것이 좋겠소.”
그 말을 바루익이 넙죽 받았다. 드낙의 말대로 아예 끝장을 본다면 서로가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정말로 바루익이 목숨을 가져가라고 하면 게실리안은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바루익 또한 게실리안과 끝장을 본다면 결과적으로 두 가문은 영지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계가 정보 하나 잘못 들었다고 죽임을 당했다.
아크온 몽펠리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특히나 고위 기사 중에서도 가장 고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버팔로 나이트였다. 먼저 칼을 뽑으면 뽑았을 터였다.
쪼르륵.
술을 따르며 게실리안이 웃었다.
“내가 말을 심하게 한 듯하오.”
“아니오. 이해하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오. 오늘의 일을 잘 전하여 몽펠리에 가문이 파이룬 가문을 견제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잘 풀리기를 기대하겠소.”
순식간에 화해 무드가 나돌았다. 드낙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술을 받았다.
‘나 몰래 이 두 놈들이 미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구나.’
잘 마련된 쇼라고 생각했다.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뭉칠 수 있다고 드낙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
파이룬 가문의 전신갑주가 도착할 때까지 드낙은 〈시체의 산, 검은 진액의 강〉에서 지내게 되었다. 별다른 임무는 없었다. 대단한 언데드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병사들만 바쁘게 움직였다.
“심심하지 않습니까? 불침번 전에 나무 세 개가 절묘하게 시야를 가리는 곳에서 도박판이 벌어지는데, 한 번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이스핀 부대장의 말에 드낙이 눈을 좁혔다.
“얼마나 잃었어?”
“예? 하하. 따면 땄지 잃지는 않았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벌써 동화 300닢이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져버렸다. 〈삼나무 도박장〉에서 이스핀은 VIP 중에서도 VVIP가 되어있었다. 깡패짓은 잘 했지 도박은 맹탕이었다.
그냥 도박장의 그 기분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이스핀이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실력이나 한 번 볼까?”
그리고 이스핀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악!”
겨드랑이에 그대로 둔탁한 철검이 찔러들어갔고, 이스핀이 전기가 전신으로 흐르듯이 경직된 채 바로 쓰러졌다. 드낙은 그것을 보며 혀를 찼다.
“어째 실력이 더 낮아졌네.”
“드낙 님의 실력이 더 높아지신 겁니다!”
이스핀의 변명을 드낙은 듣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천재나 수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 드낙이었다.
‘살면서 1등은커녕 10등도 못해봤는데, 날 걸고넘어지네. 오냐, 한 번 해보자.’
노력하면 그래도 자신과 비슷해지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드낙은 이스핀에게 불파겐 비전 중 칠주(七主) 중에 두 가지를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었다.
불파겐과의 약속이 있었지만, 〈호위 기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세파리아스 또한 방계로 나중에 삼는다면 두 가지 정도는 가르쳐도 괜찮다고 말하였다.
서로 죽이 잘 맞았기에 두 가지를 공부하면 서로 영향을 받아 다르게 깨달아도 같이 성장하게 될 것이다.
중(重): 무거움의 묘리 상단
변(變): 변화의 묘리 중단
상단세와 중단세의 극명하게 갈리는 묘리였다. 물론 무조건 상단을 취해야만 〈무거움의 묘리〉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똑같은 체중, 똑같은 신장이 같이 정권을 내질러도 파괴력이 달랐다. 최고점을 타격하는 몸의 움직임은 육체보다는 팔의 휘두름이나 발을 틀면서 생기는 작은 원심력에도 영향을 받았다.
무거움의 묘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체중에 대한 공부였다.
반면 〈변화의 묘리〉는 검을 잡는 손의 위치만으로도 검 끝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묘리였다. 〈손의 위치〉, 〈손목의 움직임〉, 〈팔관절에 따른 꺾임〉, 〈어깨의 위치〉.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검의 다양한 궤도를 공부하는 것이 변화의 묘리였다.
두 가지는 매우 다를 것 같았지만 〈시작점〉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결국 큰 힘으로 이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어깨를 움직인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이스핀이 과도하게 어깨를 위아래로 끄떡끄떡 거리자 드낙이 주먹을 가볍게 휘둘렀다. 이스핀이 몸을 뒤로 뺏기에 코앞에서 멈추었지만 드낙이 어깨를 옆으로 틀자 그대로 맞았다.
“어깨만 이렇게 옆으로 움직여도 타격점이 달라진다. 실전과 수련을 극도로 행한 기사는 보이지 않아도 적이 최대한의 힘을 낼 수 있는 타격점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타격점이 변화무쌍하다면 어찌 되겠느냐?”
그 말에 이스핀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말 그대로 적은 스스로 자충수를 두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적이 상대방의 타격점을 고려해서 미리 막아둔 공간을 최고 타격점으로 만든다···는 말씀이십니까?”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 싸움에서 애초에 그 싸움 자체를 터트리는 것이 칠주 중 변의 묘리였다. 미리 자세를 점한 상대는 스스로 샌드백이 되는 꼴이었다.
“그렇다면 무거움의 묘리는 무엇입니까?”
“똑같이 후려쳐도 서로 타격량이 다르면 이길 수 있는 법이지.”
심플 이즈 베스트였다. 힘이 나오지 않는 곳에서도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거움의 묘리〉였다.
이야기를 들어본 이스핀은 두 묘리가 절묘하게 서로에게 장점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6035자
평쿠초! 다양한 의견 감사합니다!
귀족이 왜 욕을 하냐고 깬다는 분이 계시는데 세종대오아님도 욕을 그렇게 잘 하셨습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