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2 <-- 시체의 산, 검은 진액의 강 -->
바루익 블라인스가 거침없이 야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게실리안 지휘관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가장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술을 누구보다 먼저 권하였기에 의심스러웠다.
“드낙 경, 구울 묘지기를 홀로 토벌한 그 명예로운 전투는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서 전율이 타고 흐르고 있소.”
“과찬이오.”
상투적인 말을 하며 술이 세 사람을 한 바퀴 더 돌았다. 게실리안 지휘관은 〈백금 왕가〉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했다.
“언젠가 한 번 백금 왕가가 북부로도 올 것이오. 적당한 빌미를 세우고 말이오. 그때가 중요한 것 아니겠소?”
듣기에 따라서는 흉악한 말이기도 했다. 전후 사정 없이 그 말만 들은 바루익은 이미 이야기가 크게 진행되었음을 느끼고 위기감에 휩싸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불파겐과 파이룬 사이에 〈백금 왕가〉를 통한 협약이 생긴 듯했다. 강력한 적은 내부의 결실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했다. 딱 그짝으로 쓴 것처럼 뉘앙스를 풍겼다.
“그때가 가봐야지 알지 않겠소?”
드낙은 확답을 회피했다. 게제라스 총관도 없이 확언을 주는 것은 좋지 않았다. 특히나 드낙은 진정으로 불파겐 가문의 사람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백금 왕가의 힘이 높다면 거기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아무리 왕권이 강화되어도 영지를 가지고 있으면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왕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게제라스가 들으면 기가 찰 생각이었지만, 드낙은 정말로 그러했다.
아주 위험한 생각이었지만, 드낙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답을 회피했다.
‘휴.’
바루익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냥 게실리안의 헛스윙이었다. 겁을 준 게실리안이 눈웃음을 지었다가 금방 표정을 평범하게 만들었다. 바루익은 눈치도 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헌데, 두 분은 백금 왕가 말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소?”
“부서진 전신갑주를 대신해서 파이룬 가문에서 새로이 전신갑주를 보내주겠다고 했소. 그 외에는 가문끼리 이것저것 있소.”
드낙은 게실리안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말을 줄였다. 자신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고, 파이룬 가문이 섞여있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일순간이지만 노련함마저 가지고 있었다.
‘음.’
바루익의 고개가 게실리안에게로 옮겨졌다.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와야 할 말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구울 묘지기를 홀로 토벌했는데, 전신갑주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안 그렇소?”
그는 이야기를 주도해나가며 바루익에게 반문했다. 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맞는 말이오. 응당 받아야 할 것이오만, 너무 약한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는구려.”
자연스럽게 말을 받자 게실리안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다른 면으로 받쳐주려고 하고 있소.”
“어떤 것을 말이오?”
“이를테면, 상단이나 도로가 아니겠소? 드낙 경, 저희 영지와 연결이 되면 큰 재미를 보실 것이오.”
드낙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로 그랬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재미는 당연히 몽펠리에 가문의 덕 때문이었다. 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파이룬 가문의 자원을 일정 부분 나누어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 도로라니? 그렇게 쉽게 말을 해도 되는 것이오?”
바루익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언데드 건축물〉을 토벌한 것은 분명 보통 상황보다 더 높게 쳐주는 것이 옳았다. 허나 그래도 못해도 5년을 보고 해야 하는 것이 도로의 건설이었다.
바루익의 관심이 그대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의 관계를 위해서라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있소?”
게실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바루익이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적어도 파이룬 가문은 5년 이상 불파겐과 짝짜꿍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벌이는 사업이 있는데 불파겐이 파이룬 가문의 손을 저버릴까? 전혀 아니었다.
드낙 또한 수박 겉핥기 수준의 지식은 있어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도로 건설에 대한 기간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지 못했다. 그냥 파이룬 가문과 앞으로 거래를 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북부의 상업 중심지니까 도로가 놓이면 더 좋겠지.’
도로가 중요한지는 알았지만 얼마나 중요한지는 몰랐다. 얕은 지식의 한계였다. 대충 보고 넘어가야 하는 현대인의 단점이기도 했다. 세파리아스는 도로에 대한 것보다는 드낙의 처세를 자신의 처세로 개조시키려고 공을 들였기에 〈제왕학〉과 비슷한 면이 강했다.
방향을 걸어놓고, 강력한 힘을 쥐면 알아서 끌려오는 것이 세상이라 생각하는 것이 세파리아스의 처세였다.
보통이라면 대영주로 황금빛을 내며 살았겠지만, 시대가 좋지 않았다.
“헌데, 몽펠리에 가문도 앞으로 〈외눈 다크 트롤 토벌〉에 있어서 드낙 경의 힘을 쓸 텐데, 뭐라도 준비한 것이 있소?”
게실리안의 말에 바루익이 입을 다물었다. 방계인 주제에 가문의 앞길을 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하. 설마 감추려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보오.”
게실리안이 웃으면서 바루익을 압박했다. 한 번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런···’
말하면 나중에 가문에 누가 될 수 있었다. 그로서는 선택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주제로 돌아갈 것이 없다.’
말을 하지 않으면 파이룬 가문의 정보만 얻어 가게 되는 것이 된다. 주제를 돌려도 게실리안은 다시 돌릴 것이다.
그에 반박하지 않고 사과를 한다면 쪽도 이런 쪽이 없었다. 바루익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귀족들이 서로가 서로를 대우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했다.
서로 간의 위치가 말로서 잡혀있었다면 바루익은 깔끔하게 자존심을 접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자존심을 접는 것이 느렸다. 또한 두 가문의 싸움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왔기에 적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적에게 고개를 숙일 바에는 핏물이 되어서 하나라도 데려가는 것이 이 세상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바루익의 생각이 길어지자 드낙이 되려 눈살을 찌푸렸다. 행동력하면 드낙이었다. 그는 세파리아스와 기질이 비슷한 면도 있었다. 수틀리면 빤스런을 치거나, 구울 묘지기를 향해 대충 각을 보고 그대로 진입한 것 등.
빠른 판단이 드낙의 장점이었다.
못 먹는 감도 일단 찔러본다는 마인드도 있었다.
‘사과할 거면 빨리 사과하던가.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있네.’
드낙이었다면 그냥 빠르게 사과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정보를 내어주던가. 물론 그는 게실리안 지휘관의 입장에서도 생각했다.
‘나였다면 아주 크게 화를 냈을 텐데.’
뭐라도 받아내기 위해서 박이 터지도록 박박 긁었을 터였다.
“이거 참··· 아무 말도 안 하니, 순식간에 나를 호구로 만들다니, 너무한 것 아니오?”
파이룬과 드낙에 대한 것은 들어놓고, 몽펠리에와 드낙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꼴이 된 것이다. 게실리안의 덫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봐준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기에 되려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어법이었다.
“아직 정해진 것이 없소.”
사과 대신에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루익의 발이 덫에 확실하게 걸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실리안이 크게 화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럼 왜 이 자리에 온 것이오?”
게실리안 지휘관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오?”
바루익이 그 의미를 자세히 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시오. 바루익 블라인스, 그대는 그것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를 치면서 온 것 아니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듣기만 듣겠다는 것 아니오?”
그렇게 물으며 게실리안 지휘관이 노려보며 말했다.
“날 어떻게 보면 그렇게 가벼운 생각으로 올 수가 있소? 하나도 쥐고 있지 않은 채 왔다는 뜻은 날 개호구로 안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으로 보았겠지. 아닌가?”
“겨, 결코 아니오.”
“허면, 직계들이 모인 자리에 난입해서 와놓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을 어찌 설명하겠소.”
“나, 나는···”
강력한 신분의 벽이 그를 마주했다. 평생 깨닫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아크온 몽펠리에는 호탕함 또한 실로 대단했다. 몇몇 방계는 오직 그의 중용을 받아서 중요한 직책에 등용됐다.
직계와 방계를 아우르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차기 가주의 등장이었다. 그가 괜히 버팔로 나이트가 아니었다. 전투에서 보여주는 것을 본다면 능히 범(虎)이라 부르기에 좋았지만, 아크온은 자신의 울타리에 있는 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한 체온을 내어주는 자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듬직한 큰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차기 가주가 그럴진대, 건방진 직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놈팡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단두대에 올라가 만인(萬人)의 앞에서 처형 당하는 것이 귀족의 삶이었다.
바루익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런 가문의 배경 속에서 자랐기에 깨닫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는 결코 이 자리에 와서는 안 되었다. 정치적이든 무엇이로든 게실리안 지휘관을 이길 수가 없었다. 또한 드낙이라고 파이룬 가문과 각을 세우지 않았다.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꿀을 빤다? 드낙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괜히 초를 쳐서 파이룬 가문과의 이후 거래를 파토 내기는 싫었다. 그리고 파이룬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의 방어도 못하는데 왜 찾아온 거야? 난 또 크게 난입하길래 뭐라도 대단한 거 가지고 온 줄 알았네.’
아군이 혼자서 적을 향해 다이브 했는데, 그냥 죽어버린 격이었다.
“말해보라. 어서!”
게실리안 지휘관이 소리를 질렀다. 바루익 블라인스는 결국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감정적으로는 모멸감을 느꼈는지 치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두 가문의 거래에 대해서 함부로 물었던 것도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저의 얕은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과로 일이 끝나면 세상 참 편한 것 아닌가?”
“······”
바루익이 말을 잊지 못했다. 지독했다. 하지만 그만큼 그가 저지른 죄는 컸다. 파이룬 가문과 드낙의 향후 거래에 대해서 알게 된 이상 몽펠리에 가문은 다양한 방법으로 훼방을 놓을 수 있었다.
아주 강력한 정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물 흐르듯이 흘린 것은 다름 아닌 게실리안 지휘관이었다.
‘도저히 무인(武人)으로 보이지 않네.’
드낙은 그 과정을 모두 보며 혀를 내둘렀다. 또한 그런 게실리안이 드낙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떡밥을 마련하고 그를 마중 나온 것을 상기했다. 자신의 위치는 그만큼 격상한 것이다.
‘세파리아스처럼 보여주는 전투를 해야 하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효율성 따위 개에게 던져버리고 자신의 것도 다 박살내버리는 세파리아스의 전투 스타일을 드낙은 선호하지 않았다. 또 낮게 보는 면도 있었다. 어린애 같은 질투라기보다는 직접 보지 않고 말로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실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루익을 보며 일이 너무 쉽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아크온 경이 직접 보냈다고 해서 제법 제대로 된 놈인 줄 알았더니, 중책(重責)을 맡길 자는 아니군. 왜 이런 자를 선택한 것이지? 생각보다 버팔로 나이트의 명성이 크군.’
드낙이란 흰고래 떡밥이 만들어낸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롯이 자신의 덫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마무리 일격을 먹이려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드낙이 이를 막았다. 두 가문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또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그만하시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소.”
게실리안의 혀가 이번에는 드낙을 노렸다.
“드낙 경,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요. 나중에 오늘의 일로 크게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는데, 그냥 넘기라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소?”
날카로운 말이었다. 한 마디로 네가 책임질 수 있겠냐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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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추코! 다양한 의견 감사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