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9 <-- 시체의 산, 검은 진액의 강 -->
경우의 수라는 것이 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짚어보면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의 처리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을 서서히 뛰어넘게 되는 것처럼 1만 가지의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다면 바둑에서 패배할 수가 없는 것이다.
0.007%의 확률을 뚫고 신의 한 수를 짚어내지 않는 이상,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컴퓨터를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연히 드낙은 제풀에 지쳐버렸다. 양피지가 아니라 바닥에 여럿 썼지만 골머리가 아팠다. 크게 줄기를 놓는다고 해도 상상일 뿐이었다. 정보 조직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그런 것을 굴리면 도리어 뒤통수 맞기에 좋았다.
정보라는 것은 자신이 가져야지 유용한데, 그 정보를 다른 이들도 가지게 되는 〈정보 조직〉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집단이었다.
자신을 죽일 칼 또한 결국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장치를 마련하려도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터였다.
드낙은 모든 것을 지우고, 딱 세 가지의 경우의 수만 머릿속에 정리하여 넣었다. 이미 밤도 늦었고, 그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파이룬 가문이 몽펠리에를 조지려고 생각했을 때.’
가장 희박한 확률이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드낙은 덤덤하게 넘어갈 것이다. 그러려니~하고 말 것이다. 몽펠리에와 협력? 되려 상황이 되면 몽펠리에도 자신을 칠지도 모른다.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때린 놈을 가만히 놔둘 자들도 아니었다.
또 서로 원만하게 되어버리면 파이룬 가문이 드낙을 친다고 도와줄 몽펠리에 가문도 아니었다. 그렇게 맹신하면 코가 베일 것이다.
당장 이권 하나를 두고 도로마저 새로 개통했다는 것만 들어도 귀족들이 명예만 높이 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문에도 눈이 밝고, 귀가 열려있었다.
‘보통내기가 아니지.’
결국 드낙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옳았다. 괜히 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외눈 다크 트롤〉만 후려치고 자신의 토지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두 가문의 싸움은 두 가문의 것이었다.
‘둘은 순수하게 파이룬 가문이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현실성이 없었다. 하지만 가능했는데, 세파리아스가 하도 무식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능히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파이룬 백작 가문이 겁을 먹었다면, 깔끔한 이해관계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드낙은 그럴 수 없다는 것에 좀 더 고개가 기울었다. 이유는 그렇게 싸워도 결국 인간은 인간이었다.
〈액체 치료봉〉을 단시간에 여러 번, 과도하게 짜내어서 순식간에 내구력이 달아버린 것처럼,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줬고, 상대는 처참하게 뭉개졌지만 조금만 틀어져도 다른 광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몽펠리에 남작 가문이 나에게 줄을 놓고 있다. 잘만 되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어.’
낙관론이었다. 하지만 능히 그럴 수 있었다.
‘셋은 나와 적당히 관계를 쌓아올려 몽펠리에와 균형을 맞추려는 것.’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특별히 크게 화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까불면 부수고, 일이 틀어지면 박살 내고 짓밟는다. 하지만 그것도 약자를 상대로나 그렇게 할 뿐이다. 서로 급이 비슷하면 웬만해서는 전면전에 빠져들지 않는다.
결국 서로가 손해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야망이 없다면 서로 타협과 협력을 통해서 좋게 좋게 가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가장 현실적이었다.
물론 누가 더 이득을 보기 시작하면 깨어질 관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당이 가능했다. 그렇게 끝내려고 했지만 드낙의 걱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일이 틀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몽펠리에 아니면 파이룬.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매우 극단적인 생각이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그럴 리는 없지. 아!’
웃으며 넘기려던 드낙이 이내 벼락처럼 뭔가가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하나의 가설이 폭풍처럼 상상돼갔다. 비틀어진 상상력, 유연하게 변형되어가는 장면들. 하나의 스토리.
두 가문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드낙이야 당연히 균형이었다. 어느 쪽과도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몽펠리에 남작 가문〉을 두둔하는 꼴이었다.
‘시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빠르게 확산돼 갔다. 〈두 가문의 힘싸움〉이라는 근거 속에서 잔뿌리가 잔뜩 부풀러 올라왔다. 다양한 간접 문화를 통해서 생겨난 온갖 막장 스토리가 뇌 속에서 펑펑 터져나갔다.
댕댕댕!
두 가문의 복서가 서로 가드를 올린 채 마주 보고 서있는 것마저 보일 정도였다.
‘나만큼 서로 역량을 투입하기 좋은 구실이 없다.’
드낙은 마치 권투 시합을 벌이는 경기장과도 같았다. 승리하면 돌아오는 트로피도 먹음직스러웠고, 남에게 빼앗기면 그렇게 분통이 터질 것이다.
‘내가 두 가문의 균형을 맞춘다고 한다면, 파이룬 가문은 나를 협박할 것이다. 더 강한 목줄을 채우려 하겠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분명,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협박은 매우 위험한 수단이지만, 그 행동에 대한 방어기제를 심을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파이룬 가문은 드낙을 협박하고 난 다음에 전신갑주 따위로 기분을 맞춰줄 터였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끝장낼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협박은 곧 누가 죽든 끝을 보자는 소리였다. 거부하면 드낙과 파이룬 가문은 적대 관계이며, 드낙은 반드시 죽여야 할 존재가 된다.
드낙을 죽이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행동력을 가지기에는 근거가 빈약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강력한 행동력을 게실리안 지휘관이 가지게 되는 이유는 드낙이 생각하기에 단 하나다.
‘몽펠리에 가문이 지금 여기에 없다.’
경기장에 선수도 입장하지 않았다. 〈구울 묘지기〉를 토벌한 것을 아는 것은 현재 그 혼자뿐이다.
지휘관인 그가 빠르게 행동하면 행동할수록 몽펠리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경기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외부. 〈밖〉.
아무리 언데드 건축물을 홀로 토벌했다고 해도 크게 보면 1:1의 상황이었다. 정규병 다수와 게실리안 파이룬을 상대로 드낙이 싸움을 걸지 않을 것으로 볼 것이 분명했다.
또한 드낙은 현재 전신갑주가 없었다.
죽이기에 딱 좋은 상황인 것이다.
‘아! 아앗···’
그의 표정이 황망(慌忙) 해져서 화덕의 불을 쬐다가 벌떡 일어났다. 잠이 확 깨서 천막에서 빠져나왔다. 남부 왕국 특유의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어둠 속에서 드낙은 이정표를 찾는 눈을 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속에 생성된 적은 점점 그 형태를 만들어나갔다. 비전조차 어레인지해서 여럿 보유할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것이 드낙이었다.
‘이거 큰일이다. 게실리안 지휘관에게 너무 치중되기에는 당장 내일에 저녁 약속이 잡혔으니.’
스스로 무기도 없이 호랑이 굴에 들어가 버렸다.
멘토니 뭐니, 자신이 연기해야 할 위인이 누구니, 지금 이 상황이 아니라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느니··· 그딴 것 모두 소용이 없었다.
시체가 산이 되고
검은 진액이 강이 되었다.
모든 것이 끝났고, 사후 처리만 남았다고 생각한 드낙의 큰 착각이었다. 게실리안 지휘관은 단기전을 노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싸움은 시작되었고, 드낙은 검도 들지 못한 채 묶여서 코앞에서 게실리안 지휘관을 마주하게 되었다.
‘애초에 저녁 식사를 받아들이면 안 되었어.’
모든 것이 그때 지나갔다.
그것을 못 알아차린 것이다. 몽펠리에가 없으니 파이룬을 막을 자는 없다. 드낙? 그는 결코 파이룬 가문과 척을 지지 못한다.
날카롭게 버려진 정치력이 드낙에게는 없었다. 기껏해야 오늘 보고서에 들어간 오탈자에 대한 변명거리를 생각하거나, 평생 쥐어본 적 없는 부장님 라인에 대한 소문들을 접하며 훈수를 둔 것뿐이다.
정작 바둑을 두는 사람은 못 보는 수를 손쉽게 보며 시시껄렁하게 인스턴트 커피나 마시면서 시시덕거린 것이 전부였다.
드낙의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었다. 게실리안 지휘관의 역량이 무서울 정도로 높을 뿐이었다.
‘게실리안 지휘관은 내일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게 맞아!’
자신은 〈외눈 다크 트롤〉을 토벌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일에 있어서 몽펠리에의 사정을 봐주면 토벌 이후 파이룬 가문의 상황이 결과적으로 낮아진다. 드낙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크온의 비중이 커지고, 파이룬은 차순이 된다.
‘소름···’
홀로 거기까지 순식간에 짚어내고 그것도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저녁 식사를 권했던 게실리안이었다. 그것도 〈단기전〉이라는 생각을 버리도록 〈내일〉로 넉넉하게 잡는 모습 또한 보여주었다.
‘무시무시하다. 정말··· 난 도저히 이 바닥에서 이길 수가 없다.’
눈앞에서 코가 베였다. 하지만 그것을 다음 날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당장 내일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걱정이었다.
내년을 생각? 드낙에게는 탁상공론처럼 들릴 정도였다.
드낙은 게실리안의 그 소리를 듣고는 전신갑주의 획득을 비롯한 〈구울 묘지기 토벌〉에 대한 사안만 생각하고 끝냈다.
하지만 게실리안은 그에 대한 준비를 함과 동시에 비수도 하나 준비했다. 그게 드낙을 찌를지 안 찌를지는 드낙이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비수는 언제든지 피맛을 볼 것이다.
오른손에는 찬란한 명예를 쥐고 있지만 왼손에는 수많은 이권을 쥐고 있는 것이 귀족이었다. 그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면 귀족에게 당할 뿐이다. 겉으로 확실하게 책임까지 지고 가족까지 죽여버리는 것이 〈남부왕국의 귀족〉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안 되었다. 물론 알아도 드낙처럼 코가 베일 수 있었다. 〈내일 저녁 식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멈추려 하지 않겠지.’
이것은 귀족 개개인의 명예가 달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문과 가문의 이득에 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드낙 불파겐〉과의 관계에 있어서 순위를 정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충성 경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버려진 영지〉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무덤을 파헤치고 등장한 망령이다. 그 망령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모를 리가 없었으므로 그들도 능히 잔혹하게 나올 것이다.
살인자는 살인자의 법대로 다루는 법이다. 연쇄 살인마의 패턴을 모르면 영영 잡지 못한다. 드낙을 충분히 찌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드낙 불파겐〉이었으니까.
드낙은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두 가문의 쟁점이 될 수 있다는 것만은 인지했다.
‘약하게 나가면 몽펠리에와의 관계가 무너지고.’
‘균형을 맞추려 한다면 지금 당장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강하게 나가기에는 파이룬 백작 가문의 위상이 두렵다.’
드낙은 굵은 짐승의 털처럼 변해버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거칠기 짝이 없었다. 이 거친 적발(赤髮)만 봐도 불파겐이 걸어온 길을 알 수 있었다.
‘세파리아스가 만들어낸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하지만 이스핀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 자격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무공을 세운 것이다. 물론 듣기만 했기에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납득했을 뿐이다.
‘확! 씨, 나도 그냥 그렇게 나가?’
이리 생각해도, 저리 생각해도 낭떠러지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게실리안 지휘관의 서슬 퍼런 덫에 한 번 걸려보니 저게 사람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내일이 처형식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방침을 정해야 했다.
드낙은 머리를 들어 올렸다. 자신을 위해서 빛을 내고 있는 붉은색의 별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좁쌀보다도 작았지만 흉흉함이 느껴졌다.
‘강압적으로 나가도 난 세파리아스처럼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매듭을 지을 수는 있겠지.’
드낙이 기세를 다지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편히 잠들지 못했다. 몇 번이나 뒤척거렸다.
‘이판사판! 개사판이다! 나도 모르겠다!’
정공법으로는 그를 압도할 수 없게 생각되어졌다.
========== 작품 후기 ==========
5682자
평추코! 감사합니다. 늦은 이유는 힘에 부쳐서···머리가 띵해서 내일 휴재를 해야할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