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8 <-- 시체의 산, 검은 진액의 강 -->
“흥읍!”
드낙이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렸다. 새벽의 스트레칭 이후에 무식한 짓거리도 해야 근육이 더 많이 붙었다.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여성스럽기보다는 머리카락이 매우 거칠고, 사람 머리카락 같지 않게 굵기까지 해서 사자의 갈기를 장식처럼 부착한 것처럼 느껴졌다.
수련을 하면서도 드낙은 딴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이순신 대장군, 이성계, 유비? 제갈량···’
그 사람의 생애도 잘 모르고, 임팩트 있는 부분만 기억하고 있는 평범한 현대인이었지만 그래도 수많은 위인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장점이었다. 자신만의 울타리가 아니라 그 너머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낙은 몰랐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재능이기도 했다. 사고를 자신에게만 가두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하기에 비로소 다른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법이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낙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다른 곳에서 답을 찾는 습관이 있었다.
‘모르겠다. 애초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큰 그림! 그것을 훑기에는 드낙의 역량이 좋지 않았다.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무엇을 짚고 넘어가는지를 몰랐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스핀과 아침을 같이 먹었다. 순찰자 2명은 망루 위에서 식사를 해결한다고 했다. 그것은 나무 하나를 뼈대로 삼아 올려놓아진 판자나 다름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도 감사해야 했다.
게실리안은 그들을 드낙의 개인 사병으로 알고 있었다.
새고기를 뜯으며 드낙이 이스핀이 느낀 이번 전투에 대해 물었다. 이스핀은 별 의심 없이 이야기했다. 그것을 들으면서 드낙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 세계관이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애초에 무식한 공성추로도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는 것이 전신갑주였다. 그것이 아주 개박살나는 전투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것을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기한 드낙이 그제서야 이마를 짚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뭔가가 X됐다.’
이번 일의 후폭풍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세파리아스의 무위는 실로 두려웠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변명거리는 있었다.
‘누군 못해서 그러는 줄 아나.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네.’
자신은 적어도 전신갑주가 부서지는 싸움을 하는 목숨 내놓은 놈은 아니었다. 세파리아스의 싸움은 목숨을 도외시한 전투였고, 그렇기 때문에 가슴을 흔드는 전투이기도 했다.
드낙 또한 체급이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나는 놈에게 돌격해놓고서는 세파리아스를 욕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도긴개긴이었고, 서로 똑같은 기질을 지닌 놈들이었다.
“어? 내 반지.”
드낙이 밥을 먹다가 헐렁한 손을 보며 사색이 되었다. 〈충격 흡수 반지(Body Absorber Ring)〉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세한 마법 반지였기에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기도 한 반지였다.
그가 서둘러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행히 악마의 힘에 저항하는 〈사악멸(邪惡滅) 목걸이〉는 그대로 있었다.
“흐흐. 그나저나 전신갑주를 안 입고 계시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짧았지만 용병 시절 말입니다.”
서로 추억 이야기를 하다가 식사를 마무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스핀이 어디로 가지 않고 자신과 함께하자 드낙이 물었다.
“내가 다른 일을 안 시켰던가?”
‘그럴 리가.’
세파리아스는 빈틈도 없어 보이는 놈이었다. 분명 이스핀에게 미리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스핀이 함께 있자 드낙은 가볍게 떠보았다.
“예? 드낙님이 앞으로 저보고 〈호위 기사〉를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서야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잠을 안 잤더니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
“그럴 만도 하죠. 정말 초인적인 정신력이었습니다.”
이스핀이 설탕 달달한 말을 꺼내며 리액션을 취했다. 드낙은 이스핀을 다른 일에 투입하고 싶었지만 세파리아스가 결정한 일이었다. 당분간은 두고 봐도 나쁘지 않았다. 바로 말을 바꾼다면 변덕스러움이 잘 드러날 것이다.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좋은 것인지.
드낙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자신의 변덕은 남에게 가려야 할 부분이었다. 그는 게실리안 지휘관을 찾았다. 상황을 듣고,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보다 현재 상황에 대한 그림을 잘 그리고 있었기에 스스로 찾아간 것이었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지 않소? 아무튼 이렇게 직접 찾아와주셔서 고맙소.”
게실리안 지휘관이 따뜻하게 드낙을 맞이했다. 이스핀의 말을 듣고 무서운 기세로 글을 써서 본가로 보낸 그였다. 드낙에 대한 태도가 또 달라져있었다. 드낙은 그것을 포착할 수 있었다.
‘태도가 유순하게 변했네. 하긴, 그것을 보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파이룬 가문에게서 전신갑주를 받을 수 있을지도 물어봐야 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왔소. 지휘관께서는 나보다 상황을 대처하는 안목을 크게 가지고 있으니, 내가 직접 찾아와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게실리안 지휘관이 웃음소리를 냈다.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낙의 진면목은 〈검 중의 검〉이다. 무엇이든 토벌할 수 있는 고위 기사가 자신의 안목을 높이 평가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분이 나쁠 수가 없었다.
“원료를 들고오는 병사들이 도착하면 소각장을 만들고, 시체를 천천히 남김없이 태울 것이오. 근처 사제와 성기사들에게 정화를 요청했으니, 그것 또한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될 일이오.”
“일단 드낙 경께서 데리고 온 궁수 두 명 덕분에 제법 일이 쉬워져 있어서 기수 몇을 돌려 울타리를 치고 있소. 도망치기 좋은 지형이 몇 곳 있어서 그곳을 보강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오.”
드낙은 게실리안 지휘관의 말을 대단히 주의 깊게 경청하였다. 매우 집중해있음을 느끼고 있는지 말하는 사람 또한 말하지 않아야 될 세심한 것도 말하기도 했다. 이스핀도 들으면서 자신의 깊이를 더 깊게 만들 수 있었다.
그만큼 깊은 내공이 깃든 생각이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드낙이 감탄했다. 당장 중요한 것을 짚어도 대여섯 가지는 되었고, 신경 써야 할 일은 20가지가 넘었다. 그것을 모두 능숙하게 행하고 있는 그는 실로 큰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할 일은 언데드를 죽이는 일 정도뿐이요?”
“그렇소.”
그 말에 게실리안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보도 벌목을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울타리를 만들라고 할 수도 없었다.
드낙이 기회를 살피기도 전에 게실리안이 운을 떼었다.
“내일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올 것이 왔구나.’
“저야 좋지요. 하하하.”
드낙이 웃으면서 악수를 나누며 그의 군막에서 빠져나왔다. 천막을 나온 드낙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파이룬 가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자신을 부를지 생각을 해야 했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생각을 짚어낼 근거가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데드를 한바탕 때려잡고, 땀을 한 번 쫙 빼고 나서 밥을 먹으면서 드낙은 새벽에 한 자신의 멍청한 실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멘토는 무슨 개뿔! 지금 현 상황부터 짚어내고, 게실리안 지휘관의 입장에서 선택할 근거가 무엇인지 고려해야지. 뭔 멘토야!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
제갈량이 되고 싶다고 제갈량이 된다고 중얼거리면 제갈량이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건 발등이 불이 떨어진 지금 해야 할 것도 아니었다. 괜히 시간만 날린 드낙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걸 본 이스핀은 눈을 돌렸다.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봐서였다. 드낙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자주 묻고 다녔기 때문에 이스핀은 자연히 겁을 먹었다.
돌대가리라면 자신도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자신 정도면 그래도 잔대가리를 잘 굴린다고 생각했지만 쟁쟁한 이들을 만나고 나서는 그냥 검만 믿게 되었다.
드낙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이디어로 성공한 작은 회사를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것과 비슷했다. 머리 좋은 게제라스 총관은 정말로 머리가 좋았다. 특히 그가 내세우는 육중론은 척박한 〈버려진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여섯 가지를 제시해주었다.
옆에 백과사전을 두면 드낙도 그럴싸한 것을 토해내겠지만 아쉽게도 현대의 백과사전은 그의 수중에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뭘까?’
드낙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횃불 성채에서 살면서 제법 귀족에 대한 소문을 접했을지도 모르는 이스핀에게 눈이 향했다. 그 눈길을 느낀 이스핀이 눈을 내리깔고 밥을 먹기 바빴다.
고기가 입에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왜 내 눈을 피해?”
“예? 제, 제가 말입니까? 저는 전혀···”
“그러지 말고 네 생각 좀 들어보자.”
“드낙 님. 저 돌대가리인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배운 것도 쥐뿔도 없습니다. 글을 배우려다가 화통에 도망간 것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설레발을 치는 이스핀을 보며 드낙이 눈을 부라렸다.
“누가 네 머리를 쓰고 싶대? 내가 그 정도야?”
“아. 아닙니까?”
드낙이 화를 내려다 참았다. 이스핀 따위가 자신과 머리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다니?
‘절대 아니지. 난 현대인인데. 어디서 판타지 중세인이 나랑 비교를 하려고.’
고대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현재에도 철학의 근본임을 생각한다면 현대인 부심은 접어두는 것이 좋았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파이룬 가문에 대한 것을 좀 알아? 내가 산골마을에서 수련만 해서 잘 모르겠네.”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강해진 드낙이었다. 부끄럼 하나 느끼지 않았다. 용병 시절에는 두려움에 묻고 다니지 못했었다.
“상인들이 말하기로는 식량의 중개무역으로 재미를 많이 보는 가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스핀이 파이룬 가문에 대한 것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파이룬 백작 가문〉은 귀족 중에서도 자산의 균형이 좋았다. 이스핀은 거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드낙은 잘 알 수 있었다.
〈실물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 건물, 도로 등 공공의 자원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이 땅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대부분의 가문이 지역(영지)에 한정된 화폐를 굴리며 그것에 대한 유통량을 가늠하며 스스로 조율한다.
한 지역에 은화가 너무 많이 풀리면 은화의 가치가 폭락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실물 자산이 많은 귀족은 가만히 있어도 화폐를 다시 수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를 손에 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양은 영지에 풀린 화폐의 양과 같았다. 상업이 크게 발달한 영지와 그렇지 않은 영지의 차이가 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중개무역으로 재미를 보는 파이룬 백작가는 화폐의 보유량도 많았다.
〈현물 자산〉 또한 많은 것이다.
고로 드낙이 생각하기에 파이룬 가문의 재력은 대단히 뛰어날 것으로 보았다. 농업과 상업으로 부흥한 가문이었기에 돈이 부족하지는 않아 보였다.
“또.”
생각을 정리하자 드낙이 또 물었다. 이스핀이 짱돌을 굴렀다.
“어디서 들은 것인데··· 몽펠리에 남작 가문과 자주 충돌한답니다. 서로 붙어있기도 붙어있고, 파이룬 백작 가문이 자주 식량으로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해서 몽펠리에 가문이 아예 도로까지 수도로 향하는 길을 다르게 팔 정도로 극성인 적이 있었답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드낙만 몰랐다. 제법 오래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매우 중요한 소문이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없었다. 그런 정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렇다고 여겨도 되었다.
‘그렇다면 파이룬 가문은 나에게 줄을 데려고 할 것이다. 생각보다 보상을 쉽게 받을 수 있겠어.’
드낙이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가불기에 걸린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젠장? 그게 아니잖아. 이거 잘 못하면···’
버팔로 나이트, 아크온 몽펠리에와 게실리안 지휘관. 두 가문의 역량이 드낙에게 집중되어서 박이 터질지도 몰랐다. 그 박은 드낙이 될 것이다.
아무리 고위 기사라고 해도 이제 변방에 토지를 지닌 것이 드낙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싸늘하기 싸늘한 현실보다 더 지독한 곳이었다.
현실은 그래도 멍청한 놈이 고위직을 겸하기도 하는데, 여기는 알짤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더라도 가는 방향이 다르거나 아군으로 가지지 못한다면 죽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드낙을 당장에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군자의 복수는 10년이고 30년이고 가는 법이다. 사사건건 영지의 발전에 도움을 안 줄 수도 있었다.
‘어쩌지?’
========== 작품 후기 ==========
5957자
평추코! 다양한 의견 추천!
현물이랑 실물이랑 헤깔렸네요. 근데 어느편인지 기억이 안나네요. ㅠㅠ현금이라서 현물이라니. 실제로 돈이 있어서 현금이 실물이라고 불리는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