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7 <-- 시체의 산, 검은 진액의 강 -->
“그에에에!!”
마치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듯이 시체의 구더기 속에서 언데드 하나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기도 전에 머리에 화살이 박혔다. 화살촉이라는 것도 없었고, 무식한 돌멩이가 묶여진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충격량은 두개골을 부수기에는 충분했다.
천천히 걸으며 세파리아스가 돌화살을 회수했다. 벌써 3일째였다. 이제 나타나도 될 법했지만 들리는 것은 없었다. 해가 중천에 뜨고, 물을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을 무렵 바람을 타고,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우!
그것만 들었음에도 세파리아스는 컨디션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힘을 다하여 곳곳을 뛰어다니며 살아나는 언데드를 죽여나갔다.
〈왕국 야영지〉에서의 지원군은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1기의 중기병과 30기의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부대였다.
“흩어져서 언데드를 박살 내고, 서쪽의 끝에 다시 모인다!”
“예!”
게실리안 지휘관의 명령에 모두가 흩어졌다. 게실리안 지휘관은 중앙을 뚫고 들어가 걸거치는 것들을 박살 내고, 시체의 산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는 드낙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선명하게 내려오고, 거칠기 짝이 없는 적발(赤髮)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 괜찮소?”
태연함을 가장한 채 게실리안 지휘관이 세파리아스에게 다가갔다.
“때맞춰서 잘 와주었소. 그대를 믿은 것이 이렇게 큰 행운인 것도 없을 것이오.”
잠을 한숨도 못 잔 세파리아스는 인수인계를 빠르게 했다. 목소리가 잠겨있어서 크게 가까이 가서 경청을 해야 했다.
“허··· 어떻게 3일을 잠을 안 자고···”
“언데드 하나가 도망치면 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지 않겠소?”
그렇게 대꾸한 세파리아스는 서둘러 휴식을 취하러 향했다. 게실리안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이스핀이 눈치 좋게 따라와서는 그를 부축해주었다. 세파리아스는 막지 않았다. 자신을 생각해주었는데, 내치기에는 모양새가 안 좋다는 것을 잘 알았다.
무엇보다 드낙이 애지중지하는 놈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받아줘야 했다.
“내가 잠을 자는 동안 절대 사고 치지 마라.”
“걱정 붙들어매십시오. 드낙 님.”
드낙이 그대로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잠에 빠져들었다. 낮과 밤을 구분해야 했기에 〈파이룬 가문〉의 기수들 30명 중에 15명은 빠르게 잠잘 곳을 만들고 잠을 청했다. 나머지 15명은 피곤한 기색을 하면서도 드낙을 대신하여 시체로 가득한 이 땅에서 언데드가 도망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케이슨 성기사라고 합니다.”
“허, 소문이 자자한 어린 성기사가 당신이 맞습니까?”
“말씀을 낮추십시오.”
게실리안은 케이슨과 인사를 나누었다. 척 봐도 새하얀 가죽 방어구를 입고 있는 것이 케이슨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1년을 활동했기에 가죽 갑옷이 그에게 전부였다.
흰색 갑옷도 달팽이의 집을 숯불로 태워서 새하얀 것을 물에 적혀서 묻혀 말리기를 수십 번 반복한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가죽 갑옷이기도 했다. 조금 회색인 물결도 보였지만 이 정도면 산골 마을에서 제작한 것치고는 훌륭했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게실리안이 인사를 한 것인데, 이름을 듣고 나서야 〈소문〉의 성기사임을 알게 된 것이다.
“드낙 경과 함께하고 계시다니, 놀랍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도 홀로 바쁘게 언데드를 잡고 다녀서 좀 쉬고 오겠습니다.”
“예.”
케이슨까지 잠시 쪽잠이라도 자러 가자 게실리안 지휘관이 이스핀 부대장을 불렀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추후로 오는 병사들이 있으니, 구덩이를 파는 것은 그만하면 되었네.”
“하지만···”
“지휘권은 이제 나에게 넘어오지 않았나? 자네가 드낙 경을 진정으로 믿고 따른다면 그가 믿어준 나의 말도 믿는 것이 좋겠지.”
그 말에 이스핀이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은 말인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난 신경 쓰지 않으니 고개를 들게. 그것보다 여기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듣고 싶은데··· 물론 몽펠리에의 기수들과 케이슨 성기사에게도 들을 것이네.”
“하나의 거짓도 없이 제가 본 것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게실리안 지휘관은 목함을 꺼내어 동그랗고 납작한 도기(陶器)를 꺼냈다. 그곳에는 새하얀 가루가 있었는데, 그것을 검지와 엄지로 조금 집어서 허공에 뿌렸다.
바람을 타면서도 빠르게 낙하한 하얀 가루는 이 근처의 곳곳으로 향했다.
〈전염병〉을 억제하고, 흡입한 대상에게 질병 저항력을 높여주는 〈연금술사 불타레스의 가루〉였다. 당연히 민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가루는 전쟁용 가루였다.
기수들이 한차례 휘몰아치고 게실리안 지휘관의 말대로 서쪽에 합류하자 그가 가루를 허공에 뿌리던 것을 멈추고 흡입하게 하였다. 모두 소중하게 받아 입으로 받아먹었다. 아주 비싼 것이었지만, 게실리안 지휘관은 거침없이 사용했다.
이미 자신이 통제하고 있었기에 그 책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몽펠리에의 기수들이 있었음에도 〈왕국 야영지〉로 왔다는 것 자체가 드낙이 자신에게 공을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루, 이틀이 더 걸려도 자신에게 토벌에 대한 초청을 보낸 아크온 몽펠리에를 불러야 정상인데, 진정으로 참된 자군.’
파벌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것은 곧 아직 아크온이 드낙을 손에 넣지 못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게실리안 지휘관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서둘러 전투마의 안장의 옆에 있는 가죽 배낭에서 양피지와 펜, 잉크를 꺼냈다. 돌로 양피지의 네 곳을 단단히 고정해두고, 거침없이 펜을 써 내려갔다.
‘아차.’
그리고는 서둘러 인장도 꺼냈다. 일말의 작업을 끝낸 게실리안 지휘관은 잠에 든 자들 중에 가장 충성심이 높은 기수를 다섯을 가려내어 깨웠다. 그리고 단단히 봉해진 양피지 두루마리를 건네주었다.
“본가(本家)로 막힘없이 가야 할 것이다.”
“예!”
몽펠리에 가문과 인접해있는 것이 파이룬 가문이었다. 그들은 〈남부 황금 평야〉와도 연결되어있었는데, 북부로 향하는 곡물들의 유통이 파이룬 가문의 땅을 경유하고 있어서 중개무역이 매우 활성화되어있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도로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기수 다섯이 다시 떠났다.
*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곳에서 드낙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는데, 검은 꿈이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서야 잠에서 깼군. 어리석은 놈아.”
드낙이 뒤를 돌아보자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기는, 네가 싼 똥을 내가 치웠다는 것이지.”
“뭐?”
그 반문에 세파리아스는 답해주지 않았다. 〈대리 기사〉가 된 것만으로도 열불이 났기 때문이었다. 드낙의 얼굴에 주먹을 꽂고 싶은 충동마저 가졌다.
“나는 불명예를 짊어지고서라도 위기를 타파했다. 그 대가는 조만간 말해주마.”
“젠장.”
드낙이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는 진짜 분노를 세파리아스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느끼게 되었다.
“무, 뭐? 전신갑주가 대파(大破) 되었다고?”
“완파(完破) 당했다고도 할 수 있겠군. 하지만 이건 네 잘못이 크다. 그딴 썩어빠진 전신갑주를 입고 있다니. 나,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매우 실망했다.”
드낙이 그 오만한 소리를 듣고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미친 자식이 자기가 부숴놓고 뭐? 나한테 왜 실망을 해.’
“그게 말이 돼? 전신갑주가 어떤 물건인데, 그걸 어떻게 부순 거야?”
“〈언데드 건축물〉하고 싸웠으니, 안 부서지는 것이 용하지.”
크기는 깡패였다. 하지만 그런 놈과 격돌을 했기에 부서진 것이기도 했다. 회피하지 않고, 상남자다운 맞다이를 떠버렸으니 부서져버렸다.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이런 제기랄! 그걸 얻으려고 내가 얼마나 발악을 했는데!!”
드낙이 울화통에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뭐라도 부수고 싶었지만 이곳에 부술만한 것은 없었다.
세파리아스? 검은 꿈에서 그와 대련한 드낙의 승률은 3할에 불과했다. 모든 것이 수치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현실 세계였기에 3할이라도 한 것이다. 운은 제법 드낙에게 따라주었다.
“시끄럽다, 이 답답한 녀석아. 당연히 보상을 해주겠지. 뭘 그렇게 그런 쓸데 없는 것에 신경을 쓰느냐? 너는 앞으로에 대해서만 생각해라. 네가 할 일은 다 내가 끝냈으니.”
그 말에 드낙이 이죽거렸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시팔. 다른건 부수지 않으셨습니까? 세파리아스 나리.”
“액체 치료봉도 내구력이 다해서 없어졌지.”
드낙이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깊은 한숨이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액체 치료봉은 왜 부서진 거야?”
“자주 쓰니까 그냥 없어지던데? 그것도 수준이 낮아. 쯧쯧.”
‘이런 시발.’
드낙이 입술까지 부르르 떨었다. 하는 말마다 그의 분노 게이지를 높이고 있었다. 부글부글 화가 올랐지만 별 수가 있나? 그냥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가지만 범인의 복수는 하루가 지나면 말끔하게 사라지고, 굴복하는 법이었다. 아직 세파리아스에게서 받아내야 할 것도 많았다.
“고작 높은 곳에 있다고 기절을 해? 한심하다, 한심해. 담력이 어찌 그렇게 없을 수가 있지? 쪽팔리는 줄 알아라!! 그러고도 불파겐의 이름을 논하려 하다니. 네 녀석의 나약함은 대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속을 박박 긁는 세파리아스의 독설은 팩트리어트 미사일처럼 날아와서 드낙의 마음을 찢어발겼다.
대영웅으로 태어난 세파리아스는 태생부터 남들과 달랐다. 하지만 드낙은 그냥 박호훈일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달려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여겨도 되었다.
“알았어. 앞으로는 안 그럴 테니까,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나 좀 해봐.”
드낙이 재촉했지만 세파리아스는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무용담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것이 없었다.
“구울 묘지기는 나 홀로 토벌했다. 지금은 게실리안 지휘관이 병력을 이끌고 와서 사후 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시, 실수를 하지는 않았겠지?”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대차게 웃었다. 실로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그는 정말로 드낙의 말이 재밌다고 느꼈다.
“고개를 숙인다면 그가 숙여야 하는 것이 옳다. 너는 그리고 하대하는 법을 좀 배워야겠다.”
“그게 쉽나.”
나이 차이가 나도 존댓말이 편한 것이 박호훈이었다. 서로 간 지킬 것은 지키겠다는 암묵적인 태도가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것마저 〈의미〉를 담기도 했다.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어려울 뿐이었다.
한 번의 생애에 있어서 버러지처럼 고개만 숙이고 다녔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고개를 숙인다는 것을 결코 세파리아스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는 죽음을 선택할 자였으니까.
서로 걸어온 길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기에 드낙은 긴 변명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불파겐의 이름을 숨길 필요도 없다. 살성(殺星)의 보조로 혈통의 힘이 개화되었다. 네가 쌓은 업도 제법 되었겠지.”
“그 말은···?”
“머리가 붉어졌다, 이 말이다.”
드낙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지금 그것을 얻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자연스럽게 여기에 대한 것을 세파리아스에게 물었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답을 주지 않았다. 드낙은 앞으로 더욱 성장을 해야 했다. 그것은 정신적인 의미로의 성장이기도 했다.
“너는 지금까지 줄곧 〈검은 문〉만 쫓아다녔다. 실질적으로 보이는 힘만을 보고 달렸지.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 달려온 길을 생각하면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몇 번이나 들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드낙. 달라져라. 예전의 네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상황에 맞게 너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 연기라도 좋다. 그러려고 노력이라도 해라. 결과가 어찌 되었든 트롤 토벌이 끝날 때까지 모든 선택은 너 홀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럼 수업은?”
“그것도 해야지. 하지만 직접적인 해결책은 주지 않을 것이다.”
드낙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개돼지 같은 놈이 사람으로 돌변하는 것이 드낙이었다. 이 정도의 일이 아니면, 그를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드낙은 또 요령을 피우려고 했다. 언제 화를 냈는지 세파리아스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힌트 좀 주라. 서로 같은 배를 탄 사이인데···”
“일 없다.”
========== 작품 후기 ==========
5920자
평추코! 감사합니다. 달팽이 구워구워 염료의 경우에는 원시 테크놀로지인가? 유튜브를 통해서 본 것을 각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