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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227화 (226/1,239)

0227 <-- 마적 돌산 -->

〈검은 꿈〉에 들어선 드낙이 〈세파리아스 불파겐〉을 찾았다. 해골 기사가 뻥 뚫린 눈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드낙은 익숙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을 붙일 수 있었기에 저 모습을 취하는 것은 의도적이었다.

“살 좀 붙여라. 보기 흉하게.”

[흥. 어리석은 놈이 이래라저래라 입은 잘만 나불거리는군.]

드낙에게 한 소리 툭 뱉기 위한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시체도 안 남은 놈이, 건방지게.’

콧소리를 내며 빈정거린 세파리아스가 생전의 모습을 갖추었다. 꾹 다문 입은 절로 고집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문인 발세렌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시민들에게는 제법 유명한 놈이었다. 귀족들에게는 배척받았었지. 지금의 시대에서는 귀족들에게도 인기가 있을지 모르겠군. 그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명분과 명예보다는 이권을 손에 쥐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시대상에 달라지는 문인이라는 소리였다.

딱히 크게 흥미가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드낙은 다른 조언을 기대했다.

“또 다른 거 말해줄 것은 없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곳에서 하늘색 머리카락에 바다색 눈동자를 지닌 놈들이 있다면 손속을 봐주어라.]

“왜?”

[불파겐 가문의 방계니까, 그렇지. 당장은 무리겠지만, 오우거를 잡으면 그때 네 밑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들이다.]

드낙은 인상을 찡그렸다.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몰락했는데, 또 불파겐의 밑으로 들어온다고?”

[설마 대귀족을 상대로 왕가가 검을 뽑을 줄은 몰랐고, 남부 귀족들이 그 편을 들지 몰랐기에 생긴 일이다. 내 잘못이 아니지. 그리고 그때 이후로 수백 년이 흐르며 부흥 한 번 하지 못한 채 〈버려진 영지〉는 그대로 이어졌다. 불파겐의 이름을 그리워할 때가 되었지.]

마지막 말만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래서 그 방계의 가문명은 뭔데?”

[그냥 하늘색 머리카락에 바다색이나 심해색 눈동자만 확인해라. 없으면 그걸로 잊고.]

그 말에 드낙이 성을 냈다.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꼭 이런 말 하다가 일이 틀어진다니까!’

영화든 드라마든 뭐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사지로 내몰거나 작전에 투입시켜서 더 망하는 경우나 다름없었다.

“거만하기는! 좀 더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힘들어? 어디서 분위기 잡고 있어! 그러다가 일이 틀어지면, 아~ 이걸 수습을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을 하겠지. 또 내 탓을 하고 그걸 못 알아보냐고. 바보 아니냐고.”

[아니···]

세파리아스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필이 받은 드낙은 속사포처럼 그를 갈구었다.

“그리고 야습이나 쳐죽이러 가는데 뭐라도 아는 척이라도 해야 나한테 호의적이고, 조금이라도 의심을 거둘 것 아니야? 마적 두목이 그런 색깔을 지니고 있으면 어쩌려고? 엉? 하늘색 머리카락만 찾으면 된다아아아~ 이러면, 일이 다 잘 풀리냐?”

[크흠.]

세파리아스가 헛기침을 했다.

“제대로 말해봐. 좀! 괜히 거만해서는 뭐라도 하나 제대로···”

[알았다! 알았어!]

그가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드낙이 입을 다물었다.

[〈엘라한〉의 가문이다. 혈통을 주는데 〈불파겐 가문〉이 큰 역할을 해주었지. 그 뒤로 믿음 하나로 가문명을 따로 내어주고, 독립을 시켜 성을 하나 내어주었다. 지금 있는 돌산이 바로 그 위치다.]

“근데 왜 돌산만 하나 있대?”

[불파겐으로 향한 파괴는 수십 년에 걸쳐서 이어져왔다. 뭐라도 하나 남기지 않으려고 했지. 그리고 세월도 그렇게 흘러버렸으니. 이상할 것은 아니다.]

그 무서운 이름만큼이나 한 번 칼을 빼어들었으면 말 그대로 끝장을 봐야 했다. 삼대를 멸한다는 것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복수를 다짐할 건더기 하나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불파겐〉의 위세를 느낄 수 있었다.

“무슨 혈통인데?”

[〈옹골찬 물의 정령〉의 가호(加護)를 받은 혈통이다. 보통은 〈엘라한의 가호〉라 불리지.]

드낙이 눈을 반짝였다가 이내 실망한 눈치를 했다.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눈에 너무 잘 보이는 것이라 죽여서 얻어도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효과는?”

[물의 힘을 사용 가능하다. 수압으로 상대를 저지할 수 있고, 다양하게 운용이 가능하지. 또 치료와 정화에도 한가락 할 수 있다. 가뭄이 닥쳐도 어느 정도 상쇄할 수도 있지.]

“대단하잖아?”

기사라기보다는 〈물의 정령사〉에 가까웠다.

[개개인마다 힘의 차이가 커서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또 신전의 조력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기도 하고.]

“어째서?”

드낙의 물음에 세파리아스가 거침없이 말했다. 그것에는 사람의 감정 하나 들어가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뭘 들었느냐? 피로서 이루어지는 〈물의 정령〉과의 계약이다. 당연히 다른 피가 섞여서는 안 되지.]

그 말에 드낙이 거북함을 느꼈다. 근친상간(近親相姦)을 해야지만 그 힘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소리였다.

[몇 대까지는 부작용이 없겠지만, 지금까지 그 힘이 내려오고 있다면 보통 모습은 아닐 것이다.]

드낙이 눈을 절로 찌푸렸다. 그들 가문이 지닌 열성 유전자가 몸의 안팎으로 거침없이 검버섯처럼 피워났을 것이다. 그 모습에 불파겐이 그를 비웃었다.

[네녀석은 그런 하찮은 감정을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다. 그런 수단이 없으면 위로 올라가는 것은 까마득해. 지금 이 세상을 보라, 자유 기사들이 넘쳐남에도 누구 하나 올바르게 가문을 세운 자가 없다.]

현실은 그렇게 잔혹한 것이다.

드낙은 긍정하면서도 세파리아스처럼 냉혈한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

“그렇게 큰 힘을 가졌다면 마적 두목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모르지. 세상 일이라는 건 그저 힘이 강하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

세파리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암구호 같은 것을 말해주었다.

[〈푸른 고래가 뛰어놀던 곳은 아직도 옹골찬가?〉라고 물어라. 그리한다면 〈계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널 적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중한 정보였다. 또 〈마적 돌산〉이 아예 엘라한 가문이 접수하고 있기를 기대했다.

“손쉽게 기병들을 손에 쥐었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혀를 찼다.

“왜?”

[제대로 된 군벌(軍閥)도 되지 않은 채 그저 돌산에서 남의 것을 약탈하며 사치를 부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마적 돌산〉이다. 그들이 엘라한의 가문이라면 적당히 어린놈 하나 빼고 모조리 죽이는 것이 낫다. 썩은 물 중의 썩은 물이다.]

그제서야 드낙은 세파리아스의 노림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멍청하다니.’

대화의 끝에 가서 겨우 세파리아스의 본 목적을 알게 된 드낙은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다.

“〈혈통〉을 이은 놈들 빼고 다 죽이라는 소리야?”

[그래.]

“하지만 왜? 인구는 매우 중요하잖아. 얻으면 얻을수록 이득이 아닌가? 노예로 삼아도···”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경우가 다르다고 말하였다.

[돌산 주위로 농지 하나 없는 것이 〈마적 돌산〉이다. 오직 약탈로만 살아가는 진성 마적이라고 할 수 있지. 반면 바세안 토성은 어떠냐.]

[노예를 함부로 대하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몇몇은 대장장이기도 하지. 조잡하지만 토성을 건축하면서 집도 그럴싸하게 지을 놈도 몇 있다. 마적은 부업이고, 주업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고.]

[또 사교에 직접적으로 신도나 사도가 된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피를 내어주기는 했지만 악신을 이득으로 대했을 뿐이다.]

“그와는 반대로 마적 돌산은 그저 마적에 불과하다는 소리야?”

[돌산에 들어간다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놈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혈을 빨며 편하게 지내고 있겠지. 〈책임〉 하나 없이.]

세파리아스의 말에도 드낙은 다르게 생각했다.

“너는 죽음이 가장 가혹한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난 달라. 죽을 때까지 노예로 부리는 것이 더 가혹해.”

[마음대로 해라.]

세파리아스는 그에 대해 별말 하지 않았다.

일단 〈보름〉을 두고 준비기간이 이루어졌다. 급했기에 많은 이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게제라스님! 〈두달 보급 계획서〉를 고쳐서 가져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틀을 잡은 것은 게제라스였다. 그는 〈한 달 보급 계획서〉를 뚝딱 만들고 도렌에게는 〈두 달 보급 계획서〉를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기본을 안 지켰구나. 병사에 대한 보급만 중요시하다니. 이건 반쪽짜리 계획서다.”

게제라스가 절반도 읽지 않고, 도렌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빠듯하긴 해도···”

“두 달 동안 보급이 진행되는데 불만 하나 없겠느냐? 전쟁이 시작되면 고통받는 것은 시민들이다. 지금은 노예지만 그래도 3년 뒤에는 시민이 될 것이다. 지금도 사유재산을 인정해주고 있어.”

게제라스가 혀를 찼다.

“보급에 있어서 제1원칙은 없다. 모든 것이 중요할 뿐이다. 치안이 어지럽히지 않도록 그들의 불만을 가라앉을 수단이 너에게는 없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병사들뿐이야.”

그 말에 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란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런 일도 생길 수 있었다. 총관의 말은 하나하나가 깊게 새겨들을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정석으로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게제라스였고, 새하얀 백지인 도렌 또한 게제라스의 철두철미한 행정론이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두 달 보급은 어렵습니다.”

“맞다.”

게제라스가 빙긋 웃었다. 그 말에 도렌이 허탈함을 느꼈다.

“애초에 못할 것을 저에게 지시하셨습니까?”

“그래야 공부가 되지. 그래도 단번에 깨닫는 것을 보니, 그간의 공부가 헛되지는 않았나 보구나.”

게제라스가 크게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할 것이 아닌데도 좋아하는 이유는 도렌, 이 녀석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기할 눈치〉를 단번에 말하였으니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자신의 생각보다 먼저 윗사람의 판단을 묻는 것도 아주 좋았다. 적어도 게제라스의 머리 위에 올라갈 생각 자체가 없다는 증명이었기 때문이었다.

“행정으로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 이실레아 경이나 드낙 님 혹은 너와 같은 감투를 쓰고 있는 이스핀 부대장에게도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들이 내어주는 해결책을 종합해서 네가 또 계획서를 만들면 된다.”

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가장 먼저 드낙을 찾아가는 것이 옳아 보였다.

“드낙 님은 밖에 나가계시다. 이실레아 경에게 먼저 가는 것이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그분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으신다.”

“예!”

도렌은 이실레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밖에서 병사들을 훈련하고 있었다.

대(對)기병용 전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늦다, 늦다!!!”

이실레아가 고함을 질렀는데, 어찌나 멀리 퍼지는지 도렌이 깜짝깜짝 놀랐다. 커도 너무 컸다. 발성이 실로 대단하였다. 도렌의 눈에 병사들이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한 명이 작은 짐수레를 끌었고, 뒤에서도 한 명이 밀어주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뛰고 있었다.

뒤에 있는 병사는 특히 앞의 병사가 달리는 속도를 가늠하고 도와줘야 했다.

해당 위치에 가자마자 짐수레에 쌓아놓은 돌을 가득 쥐고 사방에 퍼뜨렸다. 그리면서 뒤로 가서 본래 위치로 돌아오고 있었다.

또 그곳에서는 장애물을 설치하고, 땅에 장대를 박아 넣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판 곳을 또 파고, 다시 덮고를 반복하며 숙련하기 바빴다.

큰 항아리에는 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테이블이 함께 있었는데, 소금이 잔뜩 들어있었다.

“뒤로 한 보! 말의 돌격력을 생각하면 장애물에서 삼보 물러나 있어야 함을 모르는가!”

수천 번을 연습해도 1인칭 시점으로 진형을 살피기 힘들었기에 많은 병사가 이실레아의 검면으로 어깨를 살짝 맞아야 했다.

도렌이 오는 모습에 이실레아가 휴식을 명령했다. 병사들이 그대로 벌러덩 뒤집어졌다. 적어도 휴식 때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져도 군율을 잡지 않는 것이 이실레아였다. 투구에 물을 담아서 그대로 엎어 쓰는 병사들이 잔뜩 있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가?”

이실레아는 군권을 쥔 뒤로 부대장들에게 하대를 하였다.

도렌은 자신의 용무를 말하였다. 이실레아는 게제라스의 수업을 듣고 있는 도렌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하지만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서야 내가 무슨 소리를 할 수 있겠나?”

“아, 죄송합니다.”

“단기전을 보도록 노력하겠지만, 상대에게 〈한 수〉가 있다면 길어질 수밖에 없지. 현장 조달을 하면 병사들의 피로도도 높아지겠고. 그렇다고 후방의 시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도 우습지.”

이실레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군(軍)의 입장을 말하기 전에 먼저 도렌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보급을 줄이는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딨겠나? 그런 장군은 패군지장(敗軍之將)보다 못한 법이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욕심을 부렸다는 소리니까. 그렇기에 도렌 부대장이 원하는 답은 내가 줄 수는 없겠는걸.”

단기전이 실패하면 회군한다는 소리였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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