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224화 (223/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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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게제라스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살길을 찾았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 정도로 드낙의 말에는 뼈가 있었고, 날카로웠다.

‘꿇어야 하나? 그게 살 길인가?’

변명 하나 없었기에 그저 무릎을 꿇어 사죄해야지만 〈문인(文人)〉으로서의 자존심, 아니. 게제라스 본인의 자존심이 굽혀지지 않았다.

‘꿇어도 소용이 없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여기에 온 것이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행동할 수 없다. 내가 드낙을 잘 안다.’

게제라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통증이 일어났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드낙을 잘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난관을 벗어나려면···’

고민하는 것도 잠시였다. 불가능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구걸해도 소용이 없어 보였다. 강력한 함정이었다. 결국 명분은 드낙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래〉에 대해서 알게 된 이상 무엇도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후회의 감정이 게제라스에게 들어와서 마음을 헤집었다.

‘내가 어찌하여 드낙님의 믿음을 스스로 저버리게 만들었나.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지?’

미칠 노릇이었다.

일이 잘못되고 나서야 게제라스는 후회했다. 그전에 탐하려 했던 탐욕 따위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가 잃을 것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데 그런 것이 보일 리 없었다.

‘어리석은 것은 나였구나.’

그저 어리석기에 자신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지만, 드낙의 어리석음에 눈이 먼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천지를 모르고 뛰어다닌 것이다. 그의 머리 위에 올라설 수 있다고 착각했다.

‘이런 행동도 할 수 있는 사람의 머리 위에 올려 서려고 한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이었던가.’

하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쳐온 드낙의 앞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게 지금 자신의 처지였고, 그와 드낙이 가진 격차였다. 또한 드낙이 괜히 성공한 것이 아님을 게제라스가 깨달았다.

‘······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후회도 잠시 게제라스의 똑똑한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인간관계나 정치에 대해서는 학을 떼는 그였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맹탕이었지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아···!’

그가 탄식했다.

이것은 사형선고다.

그게 아니라면 드낙이 이렇게 다가올 리가 없는 것이다. 드낙은 그에게 〈내정관〉으로서 〈행정관〉으로서 살아갈 날을 오늘 정해주러 온 것이다.

‘아···’

절망감이 게제라스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끔찍한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호수 마을〉을 비롯한 몇 개의 마을을 세워올리고 소리 없이 가라는 소리다.’

내정관이니, 행정관이니 운운한 이유는 겁을 준 것이 아니었다. 드낙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가기 전에 목 대신에 놓고 가야 할 것임을 말한 것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서론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행정관으로서의 역량. 내정관으로서의 약속. 〈영지〉에 대한 소리들··· 모두 게제라스의 재능을 높이 쳐주었지만 그 뒤에 이어져온 것은 그의 괘씸함에 대한 것들이었다.

‘적당히 때가 되면 알아서 사라지라고 언질을 주는 것이다.’

절망이 그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그 과정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다면 빌미로 삼아 죽이거나 내쫓아버리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던 것. 따뜻하고 웃음기를 띈 드낙이 방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전과 달랐다.

‘이미 단단히 마음을 잡고 왔구나. 그는 각오를 하고 나를 찾아왔고, 나는··· 제대로 당해버린 것이다.’

칼부리를 들고 집에 들어올 줄 몰랐는가? 몰랐다. 드낙은 그저 무력만 가진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존력과 행동력은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쿡 찌르면 저만치 멀리 도망칠 정도로 빠른 것이 드낙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구나.’

드낙은 이미 모든 판단을 끝냈음을 게제라스는 알 수 있었다. 깊은 절망감이 눈까지 스며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분노로 바뀌었다.

‘내가 이대로 당할 것 같아?! 이렇게 날 곱게 말로, 그렇게 사라져 버리게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냐고! 내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개자식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런 분노는 일시적에 불과했다. 고개를 떨군 게제라스가 침을 삼켰다.

“······”

‘멍청한 놈은 나다. 드낙님의 탓이 아니다.’

불러일으킨 분노만큼이나 자괴감이 컸다.

잘못을 따진다면 게제라스, 자신의 탓이 컸다. 드낙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지만, 자신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주기만 했고, 빼앗지는 않았다. 하지만 게제라스는 단 한 번도! 드낙에게 무엇을 주지 않았다. 믿음도, 충성도,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참은 것이 용한 것이다. 그 침착함. 다양한 것을 생각하는 것은 굼벵이와 같았지만 때가 오면 빛살처럼 움직이는 것이 드낙이었다. 세파리아스의 조언을 받고 반나절은커녕 동이 트자마자 바로 움직인 것이 드낙이었다.

‘굴러들어온 호박의 얼굴이 울퉁불퉁하고, 거칠어서 만족하지 못한 내가 등신이다.’

게제라스는 이어서 아쉬움에 몸서리쳤다. 너무나도 아쉬웠다.

‘만약 다른 길을 걸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임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이실레아가 왜 그렇게 드낙을 겉으로든 속으로든 위하는 마음을 짓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를 주면 두 개를 건네주는 것이 드낙이었다. 척을 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싸울 각을 보이지 않고 물러서고, 양보하는 면도 가진 것이 드낙이었다.

항상 결정에 있어서도 남에게 물어보기를 즐겼다. 사실 자신의 주관이 없는 부분도 있었고, 그렇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맡기고 그 공로 또한 거침없이 내어줄 사람이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그렇다면, 그 거래에 응하는 게 옳았고, 아예 그런 거래를 박살 내고 더 크게 보답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게제라스의 잘못이었다.

그것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서 그의 목을 겨누게 되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드낙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드낙이 얼마나 그를 위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이 드낙과의 독대가 마지막임을 알았기에 더욱 그러한 마음이 들었다.

‘두 번이나 골방에 처박힌 나를 찾아와주었는데, 나란 놈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제야 깨닫다니···’

많은 문인을 찾아다니면서 문전박대를 당해서 그래서 자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저 드낙에게 뭔가를 주기 싫어해서 변명한 것에 불과했다.

이기심이었다. 자유기사의 위에 서고 싶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 두 번이나 찾아왔을 때, 드낙님이 가졌던 마음은 어땠을까.’

지독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첫인상이 일그러졌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얻은 문인이 지금까지 행한 것은 모두 재수 없는 것뿐이었다.

드낙이 호언장담했던 약속을 거짓으로 여기고, 하나라도 더 쥐려고 발악을 하는 모습은 흡사 버러지와 같았을 것이다. 그런 행동을 하면서 속으로 드낙을 욕하기 바빴다.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더러운 생각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나를 올려세우는구나.’

많은 이들이 노력한 〈호수 마을〉에 대한 초안(草案). 그 계획에 있어서 게제라스가 빠지면 안 되었다.

‘그렇기에 나를 찾아온 것이겠지.’

담판을 짓기 위함이다. 그 모습은 흡사 고블린 군세에게 홀로 뛰어드는 모습과 비슷했다. 나서야 할 때에 나선 드낙의 모습은 전혀 어리석어 보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누가 나를 한 번이라도 믿어준 적이 있는가?’

급진적인 정책들,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하고 쓴소리를 내뱉던 나날들. 아버지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해 쫓겨났다. 내청(內淸)에서도 분란을 일으켜서 쫓겨났다. 흘러들어간 외청(外淸)에서도 적응하지 못해서 골방에 틀어박혔다.

모두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했고, 비웃었다.

때때로 제국의 앞잡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선진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제국의 시스템이었지만 남부 왕국에 있어서는 그저 매국노에 불과했다.

그의 일생은 오르막길 하나 없는 내리막길이었다.

그 일생 속에서 유일하게 오르막길이 있다면 드낙을 만나고 나서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오르막길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기에 일어난 실수였지만, 그것은 되돌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라는 것은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나에게 손을 건네준 사람에게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그의 머리 위에 서려고 했고, 득(得)과 해(害)를 가렸고, 거래 관계 내지는 계약 관계를 소리 없이 외쳐대었다. 신뢰를 준 것은 드낙이었지만 그것을 결국 뿌리친 것은 자신인 것이다.

“우···”

매일을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렸던 게제라스는 오늘에서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자신에게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에게 버림받는 일이 남아있었다.

“크흐흑.”

게제라스가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다. 평생을 자존심 하나로 살아오며 눈물 하나 흘리지 않으며 살아왔지만 29년 동안 누구의 인정도 못 받고 살아온 자신의 인생 속에 들어온 유일한 빛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이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다.

“아, 아니. 왜 갑자기 그러십니까?”

드낙이 허둥거리더니 존댓말을 해버렸다.

반말보다 편한 것이 존댓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 큰 남자가 우는 것을 본 것은 전생까지 통틀어서 처음이었기에,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마음이 덜컥거릴 정도였다.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을 했나? 그냥 경고 하나 해주고, 앞으로 최대한 잘 지내보자고 말한 것뿐인데?’

드낙의 손이 게제라스의 어깨를 잡자 그가 목소리를 냈다.

“죄송! 그흐흑. 죄송합니다. 이 짐승 같은 놈이···!”

그의 얼굴이 시뻘게 쳤다. 목까지 붉어져서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꾹 다물었다. 목소리를 내려고 했는데 고함소리나 다름없었다. 엉망진창으로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누가 써주겠는가? 드낙 밖에 없었다.

그 귀중함은 떠날 때가 되어서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죄송하면 됐다.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은 안 했는데···”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드낙이 품에서 천을 꺼내 건넸다. 하지만 게제라스는 그것을 거부했다. 몸을 휙 돌려서는 눈물을 참으려고 해도 참아지지가 않았다.

29년 동안 세월에 치이고, 사람에 밟히고, 아버지에게조차 차였다. 그 앙금은 쌓이고, 썩고, 문드러져 있었는데, 오늘 그것이 터진 것이다.

‘이런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인데, 나는 왜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갑의 입장에서 쉽게 받았다고 생각해서일까? 드낙이 어리숙해 보여서일까? 어찌 되었든 오늘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라고 게제라스는 생각했다.

“으··· 죄송합니다.”

“아니, 나는 괜찮은데. 괜찮은가? 싸, 쌓인 게 많은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못된 놈은 아닌데···”

“제가 짐승 같은 놈이었습니다.”

게제라스가 콧물을 훔치며 몸을 다시 돌렸다. 그리고는 드낙의 엉거주춤하고 당황한 표정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이런 사람에게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드낙만큼 좋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풀썩!

그가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이마를 땅에 찍었다. 어찌나 세게 찍었는지 피가 튀었다.

“다시 한 번만 저를 믿어주십시오! 드낙 님이 주신 은혜를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누가 저 같은 놈을 써주겠습니까? 도와준 이의 심장을 도려내려 하는 이기적인 놈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모습에 드낙이 난감해했다. 이런 격한 반응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성에서도 내청은커녕 외청에서도 쫓겨난 놈이 접니다.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는 놈입니다.”

드낙은 조용히 그것을 들었다. 사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쇼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아무것도 없는 놈이 오늘에서야 드낙 님이 저를 생각해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피를 줄줄 흘리며 게제라스가 말을 했다. 드낙은 그 모습에 게제라스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아주며 일으켜 세웠다.

‘아주 제대로 반성하네. 하긴 말 그대로 진짜 아무것도 없는 게 게제라스니까.’

“앞으로 잘 부탁한다.”

드낙의 말에 게제라스가 결연한 의지로 허리를 굽혔다. 다시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릴리언트 가문〉을 들어오게 만드는 것은 조금 더 미루십시오. 드낙님에게 안 좋습니다.”

“자네가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하니, 미루지.”

드낙은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수 마을〉이 안정되면 그때 장원을 내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게제라스의 말에 드낙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드낙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게제라스가 대단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뒤로 미뤄버리기도 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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