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2 <-- 이리의 무리 -->
[크게 봐라. 드낙. 널 위해서 보다 극단적으로 말해주마.]
[지금 너의 상황은 자식을 겁탈하고, 비리를 저지르고 친인척과 놀아나고 사람을 죽이더라도 게제라스를 중책에 일임해야 한다. 민심을 생각해서 한 달 정도 쉬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물론 다른 문인들이 너도나도 찾아올 정도로 세력이 커진다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런 각오로 이리 같은 놈들을 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소리다.]
“···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드낙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또한 자연히 속이 거북해졌다. 세파리아스의 처세는 평범한 사람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든 면이 강했다.
온갖 참혹한 죄를 저질러도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복직시킨다는 말속에 있는 잔혹함. 냉혈함이 드낙의 심장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그런 드낙의 표정에도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지, 정말로 그렇게 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써먹을 수 있는 인재를 위해서라면 마을 하나를 모조리 도륙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여겨야 한다는 소리다.]
“명분은?”
[명분은 귀족을 위한 것. 시민이라고 추켜세우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 몰살당하면 누가 소리 내어 말하겠느냐? 말하면 바로 들키고 그리되면 화가 덮쳐질 것인데.]
소문이 난 곳을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정보가 흘러지는 게 적은 것이 이 바닥이다.
“그럼 귀족과 문인을 택하라고 할 때는?”
[그런 선택지를 주는 놈이 지금 있나? 없지, 이 현실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네놈이 지금까지 한 대로 닥치는 대로 세력을 끌어모아야 한다. 게제라스를 중용(重用)하기만해도 그는 산증인으로 활약할 수 있다.]
“결국 게제라스를 높이 써야 한다고?”
드낙이 인상을 찡그렸다. 딴생각을 하는 게제라스는 이미 드낙의 마음에서 떠났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너는 너무 인재에 대해서 각박하게 굴고 있어. 정작 너만 해도 부족함이 많은데, 무엇이 그리 불만스러운 거냐? 배신할까 봐 두렵다고? 세상에 야망 없이 출세를 하고 싶은 놈이 있더냐?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널 안 따라왔겠지. 10에 9는 위선으로 자신을 감추었을 것이고.]
“하지만 게제라스는···”
세파리아스가 그 말을 무시하고 입을 딱딱거렸다.
[정치력이 부족한 문인 주제에 재주가 많다는 것은 큰 재산이다. 언제나 물러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늙어죽어 지팡이를 지고서라도 평생 행정관으로 굴릴만한 재목인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써먹기 나름이다. 명심해라, 지금의 너는 게제라스도 과분하다는 것을.]
“그래도 하자가 많잖아.”
[완벽한 인재 따위 없다. 또 너의 손에 들어온 인재도 그 장점을 제대로 못 세우게 자꾸 방해하고 있는데 누가 널 진심으로 믿고 따르겠느냐? 공짜로 일하라는 거냐? 욕심이 있기에 너를 따른다는 것을 명심해라.]
“······”
[또! 그가 딴짓을 해도 절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 공조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이 눈에 보인다. 그만큼 장단점이 확실한 〈좋은 인재〉를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의심하지 못해서 발악하느냐? 그 옹졸한 네놈 그릇에 누가 담기고 싶어 하겠는가!]
드낙은 그리 말하는 세파리아스의 말에 거부감을 느꼈다. 하자가 많은 게제라스를 마치 최고의 재상처럼 추켜세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보다는 자신의 의견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실레아와 작당을 할 정도로 음험한 면도 있었고, 여차하면 제국으로 갈 수 있는 놈이었다. 충성심도 높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자를 세파리아스가 대단하다고 세워주고, 마을 하나 몰살시켜도 게제라스를 위해주겠다고 말하니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봐라. 그 표정. 게제라스에 대한 처세만 들은 네놈의 표정을 봐라. 그런데 나에게 조언을 얻고 싶다고? 네놈은 평생 그렇게 완벽한 인재를 찾다가 세월을 허비하고 싶으냐?]
세파리아스의 질책에 드낙은 심장이 덜컥 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조차도 몰랐던 게제라스를 자꾸 마음에서 밀어내던 이유를 그가 정확하게 짚었기 때문이다.
‘제갈량, 방통 같은 인재를 내가 어찌 만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곳의 교육은 철저하게 문인끼리, 귀족끼리, 왕족끼리, 가문끼리 싸고돈다.
[충성도도 높고, 딴마음도 품지 않고, 어느 것에 놔두어도 일을 잘하는 그런 문인을 찾고 싶은 것이 아니라고 할 셈이냐? 단점 없는 인재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나? 구정물이든, 똥물이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호수가 되는 것이 네가 살 길인 것이다.]
문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던 드낙이었다. 현 상황에 있어서는 차라리 게제라스를 대단히 여기고, 그를 산증인으로 삼으라는 소리였다. 버림받은 인재들, 탐욕과 출세욕에 물든 이들, 혹은 자유기사.
기득권이 되지 못한 채 겉을 떠도는 자들 중에는 분명 장점 하나는 있는 놈들이 있을 터였다.
[깨끗한 것만 찾다 보면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는 법이다. 빛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널 받쳐주는 이들이 많아야 한다. 넌 지금 그럴 수 없지. 무엇이든 씹고 봐야 하는 것이다.]
세파리아스가 현실적인 부분을 다시 한 번 되짚었다. 결국 드낙으로서는 지금 쥐고 있는 인재들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않고, 크게 써야 한다는 소리였다.
[네놈의 처세는 그렇기에 글러먹은 것이다. 더러운 것, 안 좋은 것.]
[달면 먹고, 쓰면 뱉어버린다는 그런 생각.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장원을 관리하는 것도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오물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널 대신해서 그것들을 만져줄 놈이 하나 없다.]
“게제라스를 그렇게까지 대우하기는 위험부담이 너무 커. 사실이잖아.”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넌 늑대 한 마리도 자신의 품에 넣지 못하고 목이 물리겠지. 아닌가?]
“그래서 목이 물릴 것을 감수하고 큰 그림인지 뭔지 그리며 대단히 생각해주라고?”
[그게 싫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다른 방법?”
드낙이 솔깃해했다. 어려운 길을 들었으니, 쉬운 길이 나올 차례가 아닌가? 단번에 귀를 기울었다.
[늑대들과 함께 살 수 없으니, 당연히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제국으로 가야지. 그곳에는 이미 네가 몸담을 기반이 있을 것이다. 피는 못 속이는 법이거든. 적어도 장원이라도 있을 것은 분명하다.]
“나보고 불파겐 가문의 생존자들에게 빌붙으라는 소리냐?”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너의 무력은 어디 가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앞으로 전수받을 불파겐의 비전까지 생각하면 보장된 것이다.]
[힘을 인정받아 제국의 무구를 손에 넣는다면 국경선에서 큰 명성을 쌓을 수 있겠지. 불파겐의 쥐꼬리만한 도움도 너에게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다.]
드낙이 화를 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야 세파리아스의 노림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모든 소리가 거짓처럼 느껴졌다.
"시답잖은 소리를 하더니. 뭐? 제국으로? 결국 날 제국으로 보내려고 하는 거 아닌가!”
세파리아스가 손절을 하듯이 손으로 허공을 강하게 그었다.
[오해하지 마라. 〈늑대들의 왕〉이 될 그릇을 가지도록 노력할지, 그게 아니라면 〈제국으로 다시 시작〉할지는 모두 너에게 달려있는 것 아니냐. 나는 그저 선택지를 줄 뿐이고, 이제는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을 가지고 있다.]
“··· 맡긴다는 게 무슨 소리지?”
[이제는 선택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기도 하지···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지 지켜볼 때가 끝났다는 소리지.]
“그 말은···?”
[불파겐의 깃발을 세워야지. 이 땅에.]
세파리아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뭐?”
드낙은 의외의 말에 놀라워했다.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이 불파겐의 이름을 논하여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우거 슬레이어가 된다는 것은 곧 불파겐이라는 뜻이다. 이미 예정된 것이라는 것인데, 뭘 그렇게 놀라는가? 오거 야크트를 전수했을 때부터 이미 너는 불파겐 이외의 이름을 논할 수 없는 몸이다.]
마치 자신이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오만한 소리를 냈다.
‘오만하기는···’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서··· 네 태도도 좀 그랬고.”
[그동안 조용했던 이유는 너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더는 미룰 수가 없게 되었지.]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혼잣말을 했다. 드낙은 그것을 들으면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선택을 하든지 이제부터는 날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는 소리인가?”
[그렇다.]
그 대답에 드낙이 즉시 답했다. 지금 손에 쥔 것을 깔끔하게 털어버리기에는 그의 욕심이 컸다.
“당연히 지금 세력을 버릴 수는 없다. 이곳에서 어떻게든 큰다.”
[좋다. 그렇다면 먼저 게제라스를 크게 세워 〈호수 마을〉에 대한 모든 권한을 내어줘라. 일단은 최소한으로 세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게제라스가 딴마음을 품지 않을까?”
[적어도 〈그럴듯한 영지〉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정과 행정에 관해서는 아예 관여하지 않고, 그 공은 제대로 쳐주어라. 단, 네가 할 일은 다른 곳에 있다.]
“다른 곳?”
[다양한 자들과 인맥을 쌓고, 관계를 깊게 가져라. 또 이실레아에게 이번 겨울이 지나면 바로 〈브릴리언트 가문〉의 식솔들을 석지로 이주시키게 해라.]
“장원을 주려는 것이로군.”
[아니. 아예 가문을 부흥시키도록 만들어라.]
드낙이 깜짝 놀랐다. 그건 아예 독립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해! 내가 순식간에 나가리 될 수도 있잖아!”
[나가리?]
“배신 당한다고!”
[그놈의 걱정. 쓸데없는 걱정! 제발 그 의심은 일단 뒤로 미뤄둬라. 게제라스와 이실레아가 없으면 네놈은 평생 가도 이곳을 부흥시키지 못한다. 인구부터 부족한 것이 이 바닥이다.]
“······ 계속해봐.”
[그렇게 자꾸 의심하면 두 명도 네놈의 목부터 딸 생각을 할 거다.]
“아, 알았어. 일단 계속 말해봐.”
드낙이 세파리아스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드낙도 억울한 면이 있었다.
겉으로는 명예를 찾지만 귀족이란 것들은 뒷짐지고 있는 왼손에는 온갖 지랄을 다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자꾸 생각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세파리아스가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모든 것이 망하면 결국 제국으로 도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바라는 일일 것이다.
[〈버려진 영지〉는 크다. 그곳을 모두먹기 위해서는 네놈 혼자서도 힘들고, 온갖 이리떼를 불러 모아도 어렵다. 브릴리언트 가문과 협력해서 잡아먹어야 한다.]
“그럼 그렇게 양분하면 브릴리언트 가문은 어떻게 제어하려고?"
[결혼하면 된다. 이실레아는 보기힘든 걸출한 여성이야. 가주로써 훌륭히 자신의 가문을 이끌 것이다. 그녀만 한 사람은 얻기 힘들어. 단단히 잡아두려면 결혼이 최고다.]
“결혼!”
드낙이 소리를 질렀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걱정이 들었다. 현대인의 상상력이 팽팽 돌아갔다.
“그녀가 결혼을 원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되면 가문이라던가 자식이라던가 문제가 많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녀의 후계자와 너의 후계자는 당연히 딱딱 정해서 다르게 해야지. 키워지는 위치도 다를 것이고, 키우는 사람도 다를 것이다. 걱정할 필요 전혀 없다. 오히려 저쪽에서도 쌍수 들고 환영할 것이다.]
드낙이 난감해했다. 하지만 그도 전혀 싫지만은 않았다. 이실레아의 미모는 굉장했기 때문이다.
[또 누가 양분하라고 했나? 7:3으로 영지를 나누어야지. 브릴리언트 가문은 수긍할 것이다. 그 가문은 욕심이 좀 없어. 있어도 평범해.]
“세월이 지났는데 무슨. 나중에 〈버려진 영지〉가 정상화가 되어 저쪽에서 영지전을 걸면? 저긴 자유기사도 배출했어. 무인이 많을 텐데.”
그 말에 갑자기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크하하하하!]
“왜 웃는 거야?”
[그렇게 지랄하면 쳐죽이면 될 일이다.]
“그렇게 내가 강하다고?”
[당연하고 말고. 물론 미친개처럼 덤빈다면 죽겠지만, 검은 문은 정말로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드낙은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있었다.
“게제라스의 배신은? 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에 대한 건 어떻게 하려고?”
드낙이 가장 듣고 싶은 대답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멀리 일어날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이 전혀 낮은 것은 아니라고 드낙은 생각하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이야기는 영지가 살이 오르고, 평범해질 정도로 풍족해지면 다시 말하도록 하지. 지금은 시기적으로 맞지도 않다.]
검은 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끝나가는 것이다.
[드낙, 상황에 따라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는 법이다. 네가 게제라스를 걱정하는 바는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 빗대어보면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영지가 적어도 평범하게 정상화가 되기 전까지는 그는 좋은 행정관이다.]
드낙은 검은 꿈에서 깨어났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정신은 지나칠 정도로 맑았다.
‘상황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역적조차도 쓰기 나름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담력을 가져야 하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일이었기에 더욱 체감이 다가왔다. 드낙은 팔뚝에 돋은 전율감을 비볐다. 소름이 함께 돋아났다.
‘〈늑대들의 왕〉인가.’
세파리아스의 말대로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드낙은 그가 말한 것처럼 쉽게 일이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말은 가려들을 필요가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독립은 안 돼.’
중앙집권의 성격을 가진 영지를 만드는 것이 드낙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내 영지의 3할정도는 줘도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 다 얻을 수 있는 영토도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6303자
평추코 감사합니다. 다양한 의견 고맙습니다.
이 소설은 1일 2연재 혹은 3연재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하루에 1만 2천자 이상을 써야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