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1 <-- 이리의 무리 -->
‘시발.’
도렌이 신경질적으로 욕하며 머리를 헝클었다. 곳곳에 양피지부터 시작해서 저급한 나무 말린 판들이 가득했다.
게제라스가 벌린 일은 매우 많았다. 그것은 고스란히 문서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고, 때때로 수정 및 갱신 혹은 따로 기간별로 정리하여 보관을 필요로 했다. 단순 작업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완공을 한 오두막에 대한 집문서를 써줘야 했고, 공인을 해주어야 했으며 집세에 대한 것을 추가로 쓰고 공지해주기도 해야 했는데, 완공하는 시기가 전부 다르고, 그 집에 대한 크기도 달라서 또 다르게 해야 했다.
모두 같게 한다면 무조건 크게 크게 지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석지를 개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명단은 매일 갱신되었는데 그것만 해도 바빴다. 문서 정리는 물론이고, 일주일 전에는 한 장을 잃어버렸는데 아직도 못 찾아서 크게 혼이 났기 때문이다.
온갖 잡다한 것을 기록하기도 하고, 자주 요령을 피우고 일을 안 하는 이들에 대한 명단도 작성해야 했다. 큰일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필요했다.
농지의 땅문서와 그 지분에 대한 것과 공평한 세율에 대한 것도 써서 내어주기도 해야 했다.
아직 그것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은 게제라스가 시민들의 사정을 봐주고 맞춰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잡아서 문서 하나로 퉁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양피지나 나무판에 깎아주었기에 더욱 민심이 좋아지고 마을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지.’
도렌이 눈두덩을 만졌다. 시간은 벌써 자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보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게제라스가 휘갈긴 것을 따로 분류하여 나누고, 공란을 크게 남겨둬야 했다. 그 작업으로만 시간이 이렇게 흘러갔다.
100명이 최소 3주 이상 먹을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준비함에 있어서는 쓴 것을 파기하고 또 다르게 쓰고 검수해서 단위가 틀린 지 본다면 지우고 새로 써야 했다. 혹은 게제라스가 미처 판단하지 못한 것이 나오면···
‘으으으···’
도렌이 죽을 상을 지었다. 실제로 말린 생선을 다른 것으로 읽어서 하루를 공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도록 적어야 해서 적는 것도 많았다.
보통의 문서일 경우, 밀 포대나 관여한 사람을 적는 것이 전부였다면, 전후사정을 적어야 하는 것이 게제라스의 방식이었다. 곳곳에 혁명적인 것이 많았지만 죽어나가는 것은 도렌과 게제라스였다.
언젠가 필요할 것이기에 해야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지나치게 FM이었다.
그리고 게제라스는 자신의 일이었으니 즐기고 있었기에 피를 보는 것은 도렌 뿐이었다. 〈촌장 그리언〉이 오면 검수를 도와준다고 했지만 쓸모가 있을지는 몰랐다.
태생이 약초꾼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도렌은 일단 또 코피를 쏟기 전에 잠에 들기로 했다.
화덕에 놓은 뜨끈한 물을 한 잔 마시고, 그대로 열기에 몸을 맡긴 채 잠에 빠져들었다.
‘힘들다···이스핀 녀석, 그렇게 바보였을 줄이야. 부럽다.’
도렌은 눕자마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헉헉. 저 드낙님. 여기까지 하면 안 됩니까?”
이스핀이 숨을 헐떡이며 드러누워서 달빛을 보며 말했다. 드낙은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비전을 여럿 하사해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여기서 그만하겠냐마는 날도 많이 어두워졌다. 내일부터는 오늘 배운 것을 복기하며 혼자 수련하도록 해라.”
“예!”
거친 숨을 토해낸 이스핀이 대답했다. 숨을 꼴깍 꼴깍 넘어갔다. 실력 차이가 너무나도 크게 났기 때문이었다.
‘전보다 더 강해지셨다.’
드낙은 하루가 몰라보게 성장하고 있었다. 한국 나이로 따지면 이제 17세. 육체가 가장 빠르게 성장할 때였다. 무엇보다 남들은 경험하기 힘든 일을 겪었기에 내재된 경험치 또한 그 높이가 대단했다.
〈마적 돌산〉의 존재가 확인되고 나서 하루가 지났다. 드낙은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많은 이들을 보고 난 뒤로 이스핀을 밤마다 챙겼다. 그의 무력을 바짝 올리기 위함이었다.
꾸준히 수련했기 때문에 대련을 통해서 그 폼을 끌어올리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꾸준한 복기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엎드려라.”
“예.”
드낙이 호수에서 물을 퍼올려 그대로 엎드린 이스핀에게 물을 얹어주었다.
“어흐흐!! 하하!!”
이스핀이 크게 좋아하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 정도로 물이 차가웠다. 드낙은 그냥 〈오아시스의 활력〉으로 대충 땀만 흘려보냈다. 몸에 그리 열도 나지 않았다. 이스핀이 아무리 발악해도 드낙을 지치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야밤의 수련을 도와준 드낙이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 드낙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머리가 팽팽 돌고 있었다. 당연히 〈게제라스와 이실레아의 공조 정황〉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것은 무력. 그곳으로 버둥친다면 부대장들을 키우고, 곳곳에 나를 알리는 것.’
뇌전의 힘을 사용하는 〈발룬〉도 있었기에 존재감을 키우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치안이 절로 좋아졌다. 드낙이 없을 때, 잡도둑이 있었지만 지금은 평온했다.
말다툼하던 이들도 드낙이 지나가면 입을 꾹 다물고는 서로 타협을 보기도 했다. 드낙이 순시를 돌 때면 병사들의 손속이 매우 매서워졌기 때문이었다.
일기당천(一騎當千)의 맹장(猛將)이 드낙이었다. 병사들에게는 이실레아보다 윗줄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드낙은 천 마리의 고블린을 홀로 허물어버린 무지막지한 장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정치력인가? 아니다. 드낙이 세파리아스의 조언을 몇 번이나 곱씹고, 알아낸 것은 그는 드낙에게 그러한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를 하는 것은 차라리 이실레아와 게제라스를 통해서 가늠하는 것이 좋았다.
혼자 생각해봤자 그 중심(中心)을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 드낙이었다.
그렇다고 내정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현대의 온갖 지식은 사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둔전제를 말했다가 호되게 까이기도 했고, 포위섬멸진의 경우에는 남부 왕국에서 평가가 아주 좋지 않았다.
또 둔전제와는 다르게 직업군인처럼 병사에게 식읍(食邑) 혹은 식봉(食封)과 비슷한 것을 내어주는 것은 기사의 장원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반대가 심하였다. 장원에 세금을 매기는 것보다 더 싫어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도 행정과 내정에 있어서 제도적 마련을 하는 것은 너무 수준 차이가 심했다. 무엇보다 그 분야는 게제라스가 단단히 휘어잡고 있었다. 괜히 〈제국의 내정관〉을 꿈꾸는 문인이 아니었다.
여러 혁명적인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위에 있다는 것을 자주 알리는 것. 그리고 검은문을 계속 추구하여 일신의 힘을 쌓는 것.’
세파리아스의 조언 같지 않은 조언. 그저 무력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한 영지를 다스림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다.
‘여포든 항우든 결국 죽었잖아?’
세파리아스의 무력론은 드낙에게 큰 설득력을 주지 못했다. 힘만 알고 깝죽거리다가 목이 떨어진 역사의 인물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고 이 판타지 세계에서의 무력은 사실 그리 대단치 못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드낙이 한 것은 인망을 두텁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좋고, 강하다면 명분은 항상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게제라스든 이실레아든 명분이 없으면 직접적으로 날 치지 못하고, 암살을 시도해도 난 죽지 않는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은 영지가 계속해서 넓어지면서 서서히 균형이 잡혀갈 것이다.
‘〈촌장 그리언〉을 등용하여 〈산지기 산골 마을〉의 관리로 두어야겠다.’
호수 마을은 게제라스에게 두고, 자신이 견제할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이유는 당연히 더 이상 두고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실레아는 석지에 마을을 또 새로 짓게 할 생각을 가졌다.
드낙은 잠에 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게제라스와 이실레아가 서로 협력했다는 정황을 감지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그를 덮쳤다.
*
“세파리아스!”
[왜 찾나?]
“오늘은 말해줄 수 있겠지?”
[네놈의 처세(處世)에는 관심이 없다니까.]
“네 말대로 내가 가진 것은 무력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강하기만 하면 객사하기 딱 좋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콧소리를 냈다.
[흥. 그간 머리를 안 굴려서 멍청이가 되었는 줄 알았는데, 위기가 닥쳐오니 또 잔머리를 굴리나보지?]
세파리아스가 드낙의 그럴듯한 잡소리에 퇴짜를 놓았다.
“너도 내 상황을 잘 알 텐데? 이대로 가면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반복되며 힘의 소모만 일어날 뿐이다. 제국에 가고 싶어도 세력이 불안정하니 무엇 하나 힘들게 될 것이다.”
[헛소리는. 그런 그림은 또 어떻게 그렸는지··· 천(千)의 군대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느냐? 싸우면 부서질 뿐인 것을 안다면 함부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세파리아스의 말에 드낙이 도발했다.
“시끄럽고, 네 안목이 정말로 그거라면 실망이 큰데? 불파겐의 이름이 울겠네.”
[그 주둥아리로 가문을 욕한다면 검은 문에 들어설 때마다 촛농이 한 번 흐를 시간에 열 번의 패배를 안겨주마.]
“죽은 놈이 많이 많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고. 아니잖아?”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지금 네 마음가짐이라면 영지 하나는커녕 성 하나를 가진 것으로 그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에게 조언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왜?”
[그릇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법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10년, 30년 한 번 어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 그럴 수 있는 그릇이었다면 진작에 빛을 보았겠지.]
성인(聖人)이 괜히 성인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고, 위인(偉人)이 괜히 위인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라는 말씀조차도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 범인(凡人)이라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것에는 팔이 굽고, 남의 것에는 침을 뱉는다. 그게 보통 인간의 논리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람들은 그런 모순된 행태를 혐오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차례가 오면 입을 싹 닫는다.
“······ 키우면 되는 거 아니냐?”
[웃기는 소리. 크크크. 집안이 풍비박산해도 정신 못 차리는 것들이 즐비하다. 가문이 무너져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자도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짐해도 굽혀지고, 고집해도 구부러지고, 피눈물을 흘려도 고쳐지지 않는다.]
그 말에는 피맺힘이 스며들어있었고, 지나치게 현실감이 넘쳤다.
[변하고 싶어도 변하지 못할 때도 많고. 변했다고 생각해도 안 변해있기도 하다. 적어도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네놈은 변하기에는 글렀다.]
“······”
[드낙. 쉽게 가는 길은 없다. 우직하게 한 길을 고집해도 빛을 못 보는 것이 현실이라는 놈이다. 게제라스를 예를 들어볼까?]
“게제라스?”
[그렇다. 나에게 조언을 얻고 싶다며? 그렇다면 게제라스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주마. 그 이후에도 나의 조언을 듣고 싶다면 그에 대한 처세부터 바꾸어라.]
“좋아. 해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세파리아스가 생각하는 게제라스의 인물평이 이어졌다.
[그는 인간관계에 서툴다. 또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지. 실제로 그의 내정과 행정력은 문인들 사이에서도 특출나다고 할 수 있다. 정치력이 흠이지만 오히려 영주의 입장에서는 그런 문인이 더 좋지.]
“좋다고? 그는 이실레아와 거래를 터서는 내 명령을 거역할 생각을 했어. 실제로도 그렇게 지나가버렸지. 그런데도 좋다고? 반골도 그런 반골이 없어. 내 머리 위에 올라설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고.”
세파리아스는 그런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고말고. 너는 불편하겠지만 만약 나였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게제라스의 밑에 군권을 두어 이실레아까지 휘어잡도록 했을 것이다. 그의 형편없는 정치력으로는 거침없이 움직였을 것이야. 나중 가서 문제가 되면 죽이기도 쉽고. 무인이 아니기에 수틀리면 죽이면 그만이지.]
“주, 죽인다고? 유일한 문인인데?”
[이실레아 브릴리언트 또한 행정가로서의 최소한의 역량은 가지고 있다. 그를 숙청하면 그녀는 더욱 너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다. 게제라스에게 얻어맞다가 네가 그녀를 선택하게 된 것이니 은(恩)을 받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지독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내다보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중에 가장 자극적인 부분을 말하였다. 드낙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낙이 침을 삼켰다.
지독한 음모나 다름없었다. 인간관계에 서툴다는 것을 이용해서 완벽하게 게제라스를 흔들어 이실레아의 충성을 받아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만약 안 죽인다면, 그의 정신머리는 어떻게 제어하려고?”
[반골? 웃기는 소리지. 너조차 아랫사람처럼 굴릴 놈이 게제라스다. 넌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놈이다. 그렇기에 그가 널 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의심병이다. 의심병.]
[이 버려진 영지에 자신의 이상향을 지켜주고 보증해줄 수 있는 수단을 배신한다고? 그는 결코 널 배신하지 않는다. 네가 그 알량한 무력을 계속 쥐고 있는 한은.]
“그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고 해도 내가 그 위에 서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어?”
[문인의 한계는 명확하다. 머리 위에 올라서면 또 어떠냐? 그것을 논하는 것도 어리석다. 누가 위든 아래든 무슨 소용이 있나? 또 너같이 부족한 놈은 게제라스가 죽으면 평생을 슬퍼해줘도 모자라다.]
드낙이 눈을 찌푸렸다. 세파리아스가 웃음소리를 냈다. 실로 통쾌한 듯했다.
[그것이 무엇 그리 불편하다고. 하하하. 게제라스는 너의 이름을 사용해서 세력을 키울 수밖에 없는데. 그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모든 이들이 너를 칭송하게 될 것인데 그것도 불편하다고 생각하느냐?]
“게제라스가 뭘 하든지 결국 나는 이득이다···”
드낙이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납득하기는 힘들었다. 그 모습에 세파리아스가 계속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주 단단히 날을 잡은 것 같았다. 그 또한 지금이 중요한 시기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가 온 것이다.
[크게 봐라. 드낙.]
“······”
하지만 드낙은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이에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더 큰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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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추코 감사합니다. 다양한 의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