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7 <-- 대산의 영물 -->
드낙의 고민이 길어지자 〈산골군(山汨君)〉이 긴 혀로 그의 갑옷을 핥았다. 그 모습에 그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얼굴 밑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며칠 두고 보겠다.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도 된다. 당연히 추적하겠지만···”
체중이 크고, 발굽이 있는 산골군이었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능히 추적이 가능했고, 비가 그치고 굳는다면 또 쫓을 수 있었다. 물이 흐르며 흔적이 지워지는 곳도 있겠지만, 반대로 물러진 흙에 정확하게 밟혀진 자국이 남을 터였다.
물론 몇 날 며칠 내리면 포기해야 했지만 그거야 여름 장마 한 정이었다.
드낙이 검을 다시 집어넣자 산골군이 몸을 일으켰다.
“구우.”
깊은 소리를 내면서 드낙의 갑옷 곳곳을 핥았는데 얘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드낙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만한 일인가?’
산골군은 드낙의 갑옷 곳곳에 묻은 주력(呪力)을 핥아먹고는 입맛을 다셨다. 드낙은 그것도 모른 채 오구오구하면서 옆구리를 긁어준 다음에 바로 한 번 올라타봤다. 등자가 없었기에 균형잡기가 힘들었지만 잠깐이면 괜찮았다.
‘와!’
단번에 시야가 넓어졌다. 인간의 제한된 시야가 순식간에 넓어져서 오는 상쾌함은 또 달랐다. 움직이기 전에 다시 내린 드낙이 대산을 내려갔다.
도노는 괜히 산골군의 뒤에서 걸었는데 당연히 〈넌 내 밑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산골군은 기분이 나빴지만 참았다. 하지만 그런 텃세는 오히려 상도덕이 있었다.
“까악!
카이야는 거침없이 드낙에게 굴복한 산골군을 보자마자 등에 내려앉았다.
“구우우.”
산골군이 목소리를 내어 위협했지만 도노가 싫어해도 머리 위에 올라가는 카이야였다. 통할 리가 없었다.
냉큼 그 넓은 등에 자리를 잡은 카이야가 부리로 날개 안쪽을 쑤시며 긁었다. 산 곳곳을 날아다녔기에 피곤하기도 피곤했다. 특별한 활약을 하지 못해서 짜증이 났기도 했고, 무엇보다 산골군의 기를 초장부터 죽일 음험한 생각도 했다.
발톱에 자꾸 힘을 줘서 가죽을 긁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산골군이 꿈질거렸다. 그럴 때면 더더욱 부리로 한 번 쪼더니 산골군이 고개를 돌리려는 모션에 푸다닥! 소리를 내며 날아오르기도 하며 심한 장난을 쳤다.
대산의 영물을 굴복시켜서 데리고 오자 〈산지기 산골마을〉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헉!”
산에서 내려와 목책을 돌아서 성문으로 들어 올려고 했는데, 자경단이 혼이 빠져서는 사람들에게 큰일이 났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대사건이었다. 죽이라고 했더니 생포해서 데려온 것으로 보였다.
성문을 지나자마자 시선이 꽂혔다.
“뭐가 저렇게 커? 사슴이 아닌데.”
“코도 새하얗네.”
“황소도 저렇게 큰 건 잘 보지 못했는데.”
“산골군이 저렇게 생겼구나. 보고 지렸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생각보다 안 큰데?”
“전에 잭이 봤다가 허둥지둥 내려갈려다 다리 부러진 거 못 들었어? 산에서 보면 괴물이지. 지금이랑 같아?”
잘 먹고 잘 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개량이 잘 된 현대의 황소와 다름없는 크기를 지닌 것이 산골군이었다. 특히 뿔 때문에 더더욱 크게 보이기도 했다.
드낙은 불편하면서도 그래도 지반이 사람의 발에 의해서 다져진 마을의 대로를 산골군에 올라탄 채로 걸었는데, 시선이 단번에 모였다. 아침 일찍 가서 해질녘에 돌아왔으니 사람들이 모두 마을에 돌아온 지 오래였다.
산에서 나는 것을 먹고살기 때문에 일찍 돌아온 것이다.
또 주홍빛에 물들어도 실제 색깔을 단박에 알 정도로 하~얀 것이 산골군이었다. 모두가 그 위용에 감탄하기 바빴다.
촌장은 허둥지둥 신발을 신다가 한 번 넘어지기까지 해서 흙이 바지에 묻어있었다.
‘보, 보고도 믿을 수 없군!’
입을 떡 벌렸다. 체고가 220cm에 달하는 덩치를 지니고, 뿔은 그 위로 1미터나 더 뻗어있었으니, 사람들이 느끼는 산골군의 크기는 말 그대로 집채 만했다. 뿔까지 하나의 덩치로 보기 때문이었다.
괜히 짐승들이 싸울 때 옆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크기를 키우는 게 아니었다. 감정이 있다면 거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대, 대단하십니다. 산골군을 굴복시키시다니.”
묶여지지도 않았기에 단박에 굴복시켰다고 〈촌장 그리언〉이 말했다. 제법 눈치가 있었다. 드낙은 척 봐도 모든 것이 무너진 그리언을 보며 작게 웃음 지었다. 투구에 가려졌기에 누구도 그 웃음을 볼 수 없었다.
“한다고 했으니, 한 것뿐인데. 아무튼 이것으로 이 마을에 걱정거리는 더 이상 없지 않겠소?”
“예! 대산이 저희의 손에 들어왔으니, 이번 겨울은 아~주 풍족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곳곳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촌장이 냉큼 드낙을 대접하려고 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큰 잔치를 벌이겠습니다! 마을에 큰 걱정거리를 떼어내주셨는데, 아무것도 안 해드릴 수가 없지는 않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마을 여자 여럿은 물론이고 뭐라도 잡아서 잔치를 벌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드낙이 막았다.
“괜찮네. 곧 겨울인데 마을의 중요한 자원을 크게 낭비하게는 할 수 없는 법이지.”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의 호의를 받아주십시오!”
고개를 계속 숙인 채 말하는 촌장을 보며 드낙이 어깨를 토닥여 일으켜 세웠다. 어찌나 고개를 숙이는지 받는 사람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괜찮소. 그것보다 조용히 촌장과 술이나 한잔하지.”
그렇게 말하자 촌장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감동하지도 않았는데,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에 큰 노역을 시킬 셈이구나!’
딱 집어서 겨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이번 가을에 아주 바짝 자원을 축적시켜놓으라고 말하는 것이 절로 이해되었다. 촌장은 주먹을 으스러지듯이 움켜쥐었다. 하지만 얼굴만은 해죽 웃었다.
“감사드립니다. 마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하하.”
드낙은 이 마을이 자신의 지배에 들어온 오늘 아주 기분이 좋아서 크게 웃어 보이며 촌장의 안내를 받아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드낙이 사라지자 산골군이 냉큼 몸을 털었는데, 카이야가 바로 하늘로 날아가서 지붕 위에 앉았다.
“구우!!”
“까악!”
둘이 소리를 내던말든 도노는 늑대들을 이끌고는 대충 자리를 폈다. 마을 사람들이 따로 깔끔하고 마른 짚을 내어주었다. 가장 먼저 도노가 짚을 차지했고, 산골군은 괜히 딴청을 피우다가 마을 사람들이 챙겨주자 마지못해 짚에 엉덩이를 깔았다.
푹신한 느낌에 절로 긴 눈썹이 꿈떡, 꿈떡 고개를 넘어가듯이 움직였고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짧은 털을 가진 것이 산골군이었기에 높은 체온이 바로바로 발산되었기에 카이야도 산골군이 잠에 빠져들자 그의 등에 배를 깔았다.
“받으십시오.”
촌장이 술을 따라주었다. 드낙은 거침없이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드낙이 당연히 촌장과 독대를 하자고 한 것은 이 마을에 대한 지배를 지금 이 자리에서 공고히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촌장 그리언〉의 영향력이 마을에서 특히 대단한 것을 봤기 때문이기도 했다.
장정을 잔뜩 동원하는 것을 처음에 봤기 때문이다. 드낙은 항상 을의 입장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갑으로서 행동을 하는 것에 힘들어하는 면이 있었다.
반면 그리언 또한 〈깃털 투구〉를 벗은 드낙의 앳된 모습에 당혹해하고 있었다.
‘채 스물도 안 되어 보이지 않는가!’
당황스러움을 표정으로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온갖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마을의 우환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했으니, 받아야 할 것은 받아야 하지 않겠소? 그때 그렇게 큰 소리를 쳤으니.”
드낙이 웃는 낯으로 말하자 촌장이야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정말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마을이 홀로 자립을 해서··· 저도 모르게 욱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하는 모습에 드낙이 그를 용서해주었다.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때 사과하지 않으면 부드럽게 사과하는 방법도 없었기에 촌장이 빠르게 먼저 처리를 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마을을 생각하면 그렇게 반응해야지요.”
드낙은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했다. 어차피 산골마을의 그 폐쇄성을 생각하면 유화정책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었다.
촌장은 자신의 입으로 술술술 말했다. 드낙이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사실 그것이 마을이 사는 방법이었다. 저들은 이미 호수에 마을을 짓고 있었고, 그 숫자는 자신의 마을 구성원의 4배가 넘었다.
굽히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철저하게 갑의 입장인 드낙이 부드럽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으니 들어가는 것이 마땅했다.
“매년 세금도 꼬박꼬박 내겠습니다. 또 농사철이 아니라면 노역도 하겠습니다.”
“일을 시킨다면 임금을 넉넉하게 줄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드낙은 〈촌장 그리언〉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귀띔해주었다. 가장 먼저가 〈저수지〉에 대한 것이었고, 농지와 목장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석지 개간〉에 대해서는 그리언 또한 큰 흥미를 가졌다. 당연히 좋은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개처럼 부려지겠구나.’
기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보답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드낙이 술에 시선이 간 사이에 그리언의 표정이 검게 죽어갔다.
자신이라고 석지를 개간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한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어도 사람들의 불만을 버티기 힘들었고, 또 그렇게 개간해도 큰 이득을 보기란 어려웠다.
노동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었고, 이미 이 마을은 산에서 나는 것으로 먹고살기 때문이었다.
다음날은 금방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어젯밤부터 대산에 갈 준비를 잔뜩 했는데,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산을 오고 간 사람은 유일하게 한 명뿐이었다. 젊은 시절의 〈촌장 그리언〉이었다. 당연히 그 뒤로 20년이 넘게 흘렀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마을을 나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드낙 또한 새벽에 일어나서 분주한 분위기에서 새벽 수련을 마무리했다.
산골군은 도망치지 않고 마른 짚에서 일어났다. 입을 쩍 벌리더니 깔고 누웠던 짚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성에 안 차는지 도노와 늑대 무리가 깔고 앉은 짚을 먹으려다 도노의 눈초리에 입에 문 짚을 스르륵 놓았다.
‘덩칫값을 못하네.’
드낙은 웃으면서 주력을 끌어올렸다. 굳이 산에 올라가서 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산골군의 눈이 빛나더니 드낙의 손에 있는 주력을 냉큼 입에 물었다.
‘이 녀석 봐라?’
드낙의 눈이 빛났다. 주력을 다시 끌어올리자 계속해서 먹어치웠다. 뿔에서는 조금 빛이 나기 시작했는데, 주력이 뇌전의 동력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산의 정기를 빨아먹고 산다고 여겨 산골군이라 불렸던 놈이었다. 〈자연의 주력〉과 연관이 있는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키울 수 있는 능력!’
뇌전의 힘이 주력으로 사용된다면, 그 주력을 계속 먹인다면 절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또한 동시에 산골군에게 먹이를 주어 길들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말 잘 들어야지 계속 준다.”
드낙은 주력을 남김없이 주면서 산골군의 뿔을 만지작거렸다. 철을 통해서 뇌전의 힘이 느껴졌다. 통증에 드낙이 다른 곳으로 손이 갔다.
‘뇌전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신갑주에 번개 저항을 넣어야겠는걸.’
잘 다독이며 주력을 크게 좋아하는 모습을 본 드낙은 내친김에 산골군의 이름도 바꾸었다. 무슨 문인이 생각했을 법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지은 촌장의 가계도가 몰락한 문인 가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넌 앞으로 발룬이다. 발룬.”
이름을 짓고 나서는 곧장 〈호수 마을〉로 향했다. 돌아온 드낙을 맞이하는 게제라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모든 이들이 드낙 님을 경외할 것입니다.”
드낙은 게제라스에게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상단에 대한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
그 말에 게제라스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보통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서 숨기지 못했다.
‘일각수? 이각수? 그런 것을 길들여서 데려오다니···!’
어마어마한 업적이었다. 죽이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그간 자리를 비우셨으니, 마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순시를 한 번 도시지요. 점심때 상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드낙이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역시나, 내 말을 듣지 않았군.’
괜히 심통이 났다. 드낙은 꼬투리를 잡을까 싶었지만 참고 게제라스의 말대로 순시를 하러 발을 놀렸다. 지나가는 병사는 물론이고 일을 하던 사람들은 발룬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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