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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213화 (212/1,239)

0213 <-- 대산의 영물 -->

숨을 한 번 고르고 〈촌장 그리언〉이 입을 열었다. 그는 보이지도 않는 드낙의 눈을 보고 싶었다.

“정말로 기사님이 저희 마을을 지배하고 싶다면, 이 토지에 대해서 진정으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 세우고 싶으시다면 대산(大山)의 야수, 〈산골군(山汨君)〉 토벌해주십시오.”

〈촌장 그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이어서 한 마디를 툭하고 내뱉었다.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더욱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곳에 기사가 오는 것도 현실인지 꿈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흐하하.”

드낙이 헛웃음을 지었다. 기세를 하나도 피어 올리지 않았던 드낙은 괘씸한 생각도 들었지만 게제라스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모든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자들은 기세가 담겨 있지 않아서 그러려니 넘겼지만, 〈촌장 그리언〉은 달랐다. 그는 40년을 넘게 산을 오고 가며 수많은 야수들을 봐왔던 약초꾼이었다.

‘여유로움이 마치 범(虎)과 같구나.’

또한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펄쩍 뛰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드낙의 입장에서는 괘씸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전혀 화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더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다.

기사의 무력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글을 읽는 데에는 책이 필요했지만 그 덕에 계속해서 지식의 전수가 촌장을 통해서 이어졌기 때문이다. 혹여나 촌장이 급사해도 글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나중으로 하고, 혹시 이 주변에 마을을 이룰만한 곳이 있는가?”

“···마땅한 곳은 없습니다. 석지의 돌을 뽑아내고 마을을 새로 짓는 것이 좋습니다.”

‘최대한 멀리 있는 게 좋을 성싶다.’

드낙의 여유로움 속에서 강인한 힘을 맡은 그리언이 발을 빼었다. 저 정도 자신감이라면 굳이 이런 석지(石地)가 많은 곳에 자리를 펴지 않아도 되었다.

산골 마을의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크기가 작았기에 필요가 없었다. 가축 수백 마리와 인구도 수백 명이 넘는 것이 드낙의 세력이었다.

이때 젊은 남자가 말실수를 했다.

“작은 숲 뒤에 큰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단번에 다른 이에게 옆구리가 쿡하고 찔렀고, 이내 실수를 깨닫고는 표정이 검게 죽어갔다.

“좋은 정보 고맙소. 당신들의 마을에 대한 처우는 나중에 생각해보도록 하겠소.”

드낙은 일단 되돌아갔다.

그리언의 눈이 젊은 놈에게 향했다. 머릿수 때문에 데려온 놈이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멍청한 놈··· 누가 입을 나불거리라고 했느냐?”

“죄송합니다. 뭔가 기사를 보는 내내 기분이 답답하고, 힘들었습니다.”

감이 좋은 놈이었다. 촌장 또한 똑같은 생각을 했다. 애초에 저렇게 많은 인원을 꾸리는데 카리스마가 약할 리 없었다. 일부러 기세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됐다. 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사람을 거침없이 죽일 놈들은 아닌듯하다. 다들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산으로 다시 가서 일들이나 해.”

“예? 하지만 촌장님!”

모두가 깜짝 놀랐다. 토성 속에 틀어박혀서 밤낮 구분 없이 저들의 동태를 살펴야 했다. 이곳은 무엇 하나 자신들의 명줄을 보호해주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약탈 당하고 자식이 노예로 삼아져도 하소연할 곳 하나 없는 곳이었다.

“어허. 그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방금 보지 않았나. 쯔쯔. 같은 걸 봐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죽으면 마을에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망하겠어.”

“······”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젊은 시절에는 대산을 제집처럼 오고 갔던 그리언이었다. 그런 자의 눈에 차려면 보통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보통이라면 사람 몇 죽이고 무력을 확인했을 것이야. 자네들은 못 느꼈지만 대호야, 대호(大虎).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고도 남을 자가 우리 사정을 봐주었으니, 마을이 쑥대밭은 안 될 거라 이 말이네.”

촌장의 긴 말에 모두가 의심은 남았지만 고개는 끄덕이고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그리언이 지팡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는 깊게 한숨을 지었는데, 이런 변화는 그에게 벅찼기 때문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멀어져 가는 드낙을 끝까지 눈으로 좇다가 이내 쌀쌀함을 느끼고 촌장 또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온 드낙은 서둘러 게제라스를 찾았다. 동시에 이실레아를 비롯한 간부들도 불렀다.

“현명한 자로군요. 자유기사이기에 대우 하나 해주지 않는 것도 강단이 있습니다.”

게제라스는 그리언을 높게 쳐주었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말에는 그뿐만 아니라 도렌조차도 활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식이 많지만 사랑을 받고 자란 도렌은 적당히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게제라스의 거친 교육을 받아 적당한 행정 업무를 하게 되고 나서 지독하게 굴려졌다.

코피를 쏟고 나서는 게제라스가 함부로 도렌을 거칠게 다루지 못했기에 점점 업무가 쌓여지고 있었다.

게제라스가 계속해서 일을 벌였기 때문이다. 막상 하려고 하면 일감이 곳곳에 있는 것이 행정이고 내정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이미 이스핀에게 글을 가르치려다가 그 흉악한 돌대가리에 까무러친 도렌이었기에 더욱 절실함이 컸다. 창을 쥘 병사는 많았지만 펜을 쥘 사람은 적었다. 모든 것이 힘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남부 왕국이기 때문이었다.

펜보다 강한 것이 칼이었다.

수틀리면 그냥 베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게 바로 힘을 가진 자의 선택이다. 수백 년이 지나도, 수천 년이 지나도 기술이 발전해도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와도 같았다.

결국에는 힘의 논리였다.

두 팔 벌려 소리쳐도 힘이 없는 자는 짓밟힌다.

이런 상황에 귀족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가진 문인 출신이 아니고서는 글자를 알고 있는 자가 드물었다.

“글을 읽을 때 단어 사전 같은 것을 봐서 그리 큰 힘이 안 될 텐데···”

“간단한 검수만 가능해도 큰 도움이 됩니다.”

전산시스템이 없는 세상이었다. 뭐 하나 잊거나 숫자 하나라도 틀리면 큰 사달이 터지기 쉬운 시스템이었다.

게제라스가 저렇게 아군으로 들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것을 보니 드낙 또한 마음이 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양피지가 부족할 때면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휙휙 긋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지독한 환경인 셈이다.

“그럼 협력체계를 추구해서 지배에 놓는 것이 좋다는 뜻이군.”

“네. 아무래도 길이 끊겨있는 것으로 보아 자급자족을 하며 산 마을입니다. 그 텃세를 생각한다면 은혜를 베풀어 품는 것이 가장 상책입니다.”

협박을 한다면 거세게 저항할 것이고, 죽여서 저항을 제거한다면 두고두고 뒤통수가 쿡쿡 찔릴 터였다. 거대한 힘이라도 자신의 가족을 죽이는 순간부터는 원수다. 원수가 아무리 강해도 칼날을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고, 가족을 잃은 자에게 남은 것은 그것 하나뿐이니까.

산골 마을은 특히나 더욱 그러한 경향이 심했다. 서로 상부상조를 워낙 하다 보니 모두 가족 같았기 때문이다.

텃세는 곧 서로의 유대감이나 다름없었다. 텃세가 강할수록 그 유대감은 이성을 뛰어넘는 아집으로 변하기 좋았다.

산골 마을에서 살아본 드낙이었기에 더욱 잘 알았다. 죽여서 능사가 아니었다. 작은 마을임에도 상황이 악화되면 바로 독립을 선언할 것이다.

이 세상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욱 사람들을 크게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가 융성한 현대라고 해도 감성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더 많았다.

“허면 이대로 작은 숲의 뒤에 있는 호수로 향해야 합니까? 그곳에서 정착을 하는 것입니까?”

이실레아가 대충 〈산지기 산골마을〉에 대한 판단이 끝나자 다른 것을 물었다.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석지(石地)라고해도 개간하면 초원이 되고 농지가 된다. 여기에 첫 거주지를 만드는 것은 나에게 안 좋아.’

그녀의 입장에서는 호수에 첫 보금자리를 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이곳은 개간하고 난 다음에 〈두 번째 거점〉이 되어야 했다. 마을의 순서로 따지면 4번째였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두 번째였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저수지부터 농지까지 확보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호수를 뒤에 두고, 숲을 개간한다면 겨울은 수월하게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산이 앞에 있었기에 나무를 모조리 벌목할 생각을 게제라스가 하고 있었다. 마을은 점점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넘쳐나는 것이 노동력이었다. 작은 숲 따위 밀어버리고 이번 겨울에 장작으로 써버려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브릴리언트 가문의 현 상황을 알고 있는 게제라스와 그것을 최근에 게제라스를 통해서 깨달은 드낙은 이 넓은 석지에 건설될 마을은 이실레아의 장원으로 줄 생각을 벌써 가지고 있었다.

“호수의 크기가 컸으면 좋겠는데.”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날로 드낙의 세력은 〈작은 숲〉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호수의 위치를 탐색하고, 벌목을 진행하여 마을을 건설하고 또 남은 것은 이번 겨울에 쓸 생각을 가졌다.

작은 숲의 수색에는 드낙과 늑대들이 맡았다. 이실레아는 병사 10명을 데리고는 호수를 찾기 위해서 일직선으로 향했다.

“크르르! 크르릅!”

갈색 늑대인 도노의 털은 최근 점점 변하고 있었다. 청색이 드문드문 등에 올라왔고, 배는 더욱 새하얗게 변했다. 원래 배와 앞가슴이 하얀 털이었는데 빠르게 털이 빠지면서 백설 같은 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변이를 하는 건가.’

다른 변이 야수와는 그 과정이 달랐고, 여전히 드낙을 따르고 있었다. 카이야 또한 꼬리털이 하얀색이었다.

단번에 도노가 노루의 목뼈를 부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야수는 없고, 초식동물 몇몇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새들은 자주 찾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적었다.

드낙은 늑대들의 속도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미 인간을 뛰어넘은 신체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숲을 대충 한 바퀴 돌고 오자 이실레아 또한 도착해있었다.

“호수의 크기는 어느 정도입니까?”

“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 바퀴 다 도는데 못해도 4천 걸음은 걸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가로로 1천 걸음이라는 소리였다.

‘충분히 큰데.’

“깊이가 깊은 곳은 깊고, 얕은 곳은 얕습니다. 식수든 농업용수로든 사용할 수 있어 보입니다.”

자리를 잡기에는 충분한 곳이었다. 숲에 야수도 없었고, 호수에도 괴물이 살고 있지는 않아보였다. 또 있다고 해도 충분히 제거가 가능했다.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 합니다. 숲에 길을 놓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드낙은 오랜만에 도끼를 쥐어들었다. 벌목을 하는데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누구도 막지 않았는데, 드낙의 힘이 대단히 장사라 도와주면 큰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드낙 기사님!”

드낙이 솔선수범했기에 병사들까지 도끼를 들어 벌목을 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인가?”

“밑동을 뜯어내는데 뿌리가 정말 굵고 깊어서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전시가 아닌 드낙이었기에 이런 부탁을 하는 병사가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스스로 손에 흙을 묻히는 그였기에 일을 도와달라고 말하는데 어려움도 적었다.

“좀 더 파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 어떻게 더 팝니까?”

병사들 여럿이 기진맥진해서 흙을 파내어 드러난 무식하게 큰 뿌리를 보고 땀을 닦으며 휴식을 하고 있다가 드낙이 등장하자 벌떡 일어나서는 쿡쿡 뿌리를 잘라내는데 집중하는 척을 했다.

“됐다. 비켜라.”

드낙은 거침없이 쇠지렛대를 쥐어들어서는 온 체중을 다해서 그대로 대각선 아래로 쿡하고 찔러 넣었다. 단번에 깊이 쑥 들어갔다.

“적당히 큰 돌이 없나?”

“받침대로 쓰는 돌을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보기 힘든 동글동글한 돌덩이를 병사 둘이서 끙끙거리며 가져오더니 쇠지렛대의 밑에 단단히 받쳤다. 드낙이 아래로 힘을 주자 그대로 나무 밑동이 쩌적하면서 흙과 함께 뭉텅이로 떠올랐다.

“우와···”

장정 6명이서도 안 들리던 놈이었기에 병사들이 자연히 감탄했다. 드낙은 아예 쇠지렛대와 무거운 돌 받침대를 들고 다니며 밑동만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도 일감이 크게 줄어들 터였다.

다음날에는 돕지 못했는데, 게제라스가 일단 발 빠르게 〈산지기 산골 마을〉을 밑으로 두라고 조언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아쉬워했다. 앞으로도 수십 그루가 넘는 밑동을 뜯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뿌리를 크게 제거하지 않으면 돌을 박아 넣어도 나무가 자랄 터였다.

호수로 향하는 숲길을 내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드낙은 산지기 산골 마을로 향해야 했다.

바로 〈산골군(山汨君)〉이라 불리는 대산에 자리를 잡은 야수를 잡기 위해서였다.

허둥지둥 마중을 나온 촌장은 벌써 드낙에게 저항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행실로 보여주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고, 무엇보다 대산의 자원을 가져오는데 야수는 죽여야 할 존재였다.

“놈은 어떤 놈이오?”

“예! 집채만 한 수사슴입니다. 뿔부터 시작해서 털과 가죽까지 새하얗고, 덩치도 정말 대단히 큽니다.”

드낙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미 〈변이〉가 일어난 야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바로 인간을 죽이고 업(業)을 쌓았을 텐데.

“왜 그 야수는 마을을 공격하지 않은 건가?”

“그게··· 대산 깊이 들어오지만 않으면 상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야수라고 하기에도 뭣합니다.”

촌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드낙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딱 봐도 영물(靈物)로 보였다. 물론 착한 영물이나 포악한 야수나 어차피 죽여서 검은문을 토하게 만드는 것이 드낙의 마음이었다.

“오늘 바로 대산으로 향하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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