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2 <-- 도착, 진정한 시작 -->
보통 기사에게 주어지는 장원은 오직 기사만을 위한 마을이 된다. 소위 군벌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손에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마을이 번영하면 할수록 기사의 힘도 자연히 커지게 되고, 이윽고 하나의 가문을 가지게 된다.
그것을 견제하기에는 남부 왕국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오고 가는데 7일이 걸리는 것이 마을 간의 거리였다.
영지가 커지면 더더욱 심해진다. 재빠른 행동 따위 불가능하게 되며 마법사가 자잘한 마을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데 마력을 쓸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마법 아이템과 장비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부족하고 시간이 부족한 것이 마법사였다. 때때로는 백금을 줘도 안 만들 정도로 연구에 매진하기도 한다.
마력은 오직 선천적인 것.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요소요소마다 마을을 지키는 군벌을 만들어버리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기사의 장원이라는 놈이었다. 특히나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필요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래서야 내가 크게 먹기가 힘들다.’
중앙집권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는 드낙이었다. 그것은 상상이상으로 강력했고, 또 역사적으로도 그렇게 발전을 해야 옳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장원이라도 세금을 내도록 만드는 것이 드낙의 목표점이었다. 케샤스에게 〈숲의 권리〉만 주고 마을을 장원으로 주지 않은 이유는 계단식처럼 서서히 그에게 장원을 이루게 하여 마지막에는 결코 세금 징수에 대한 것을 넘겨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물론 반대가 있겠지.’
자신의 것으로 쥐여주면서 세금을 따로 중앙에게 줘야 한다는 것은 현 시스템과 정반대였다.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드낙은 밀고 나갈 생각을 지녔다. 〈중앙 집권 체제〉는 꼭 손에 쥐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귀족 가문과는 다르게 확실하게 주변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드낙은 걱정이 깊고 의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목줄〉 정도는 채우고 싶어 했다.
“······”
피가 적당히 빠진 야수를 내려다보던 드낙이 놈을 들기 위해 허벅지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발톱에 큰 변이가 일어나고 있는 호랑이는 굶주림에 걷고 있는 사람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드낙에게 쫓기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변이야수가 되기 딱 직전의 호랑이로 보였다.
그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드낙에게 〈위협〉은 되었다.
당연히 검은 문을 토해낼 것이다. 스펙으로만 따지면 드낙과 동수를 이룰 놈이었기 때문이다. 장비가 아니었다면 드낙 또한 단기전을 노리지 않았을 터였다. 지구력이 강한 인간 종족은 1:1에 무조건 장기전이 좋았다.
지쳐 죽이는 사냥법은 많은 사냥꾼들이 알 정도였으니 그런 판단이 인간의 주류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단 10분 만에 드낙이 거침없이 호랑이의 시체를 들고 오자 주변 사람들의 눈에 공포감이 서렸다. 이스핀 부대장이 서성거리다가 분위기가 싹 변하는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아주 작은 숲이었는데 야수가 살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또한 숲에서의 훈련도가 적었기에 이실레아 경의 명령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대단하십니다!”
그가 크게 드낙의 무력에 감탄했다. 10분 만에 돌아온 드낙의 손에 발톱이 매우 긴 호랑이가 들려있었으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쿵.
피가 빠진 무게가 200kg은 나가는지 땅에 내려놓았는데도 소리가 나고 먼지가 피어 올라왔다. 드낙은 주변 사람들의 공포감에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야수를 죽였는데 분위기가 왜 이래?”
“그거야, 드낙 님의 무력을 보고 두려움에 떠는 것입니다. 경외로움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핀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1천 마리의 고블린을 홀로 패주시킨 드낙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정도인가?”
“예. 사람들은 드낙 님을 〈청혈 기사(Blue Blood Knight)〉 아니면 〈천인적(千人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드낙이 미소 지었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낙은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수많은 권력자들은 평생 남을 의심하며 살았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상 조심해야 했다.
‘이런 것에 자만했다가는 언제 훅갈지 모른다.’
모든 것은 결국 명분론이었고, 현실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그것은 한순간일 터였다. 힘에 취해서 멋대로 군다면 모든 이들이 떠날 것이다.
‘자만과 방심만이라도 하지 말자.’
‘지금 가진 사람들만이라도 최대한 품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
〈작은 야수의 숲〉도 지도에 추가되었다. 숲이 적었기에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드낙은 이곳에 자신이 가진 주력(呪力)을 사방에 흩뿌리기도 했다.
‘한참전에 죽였었던 고블린 주술사의 〈잊혀진 주술 혈통〉이 엄청나게 희귀한 것일 줄이야.’
주력을 바람에 실어 보내며 드낙은 아쉬운 마음을 가졌다. 레어 중의 레어. 유니크 중의 유니크 능력이 바로 〈잊혀진 주술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선택했다면 마력으로도 주술을 부릴 수 있었다. 그만큼 뛰어난 혈통이었는데 주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기에 다른 것을 선택했었다.
그것이 귀한 것이었음을 이제 안 드낙은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력(魔力)과 주력(呪力)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할 혈통임을 단숨에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을 보유하고 따로 또 주력을 얻었다면 두 가지 성질의 힘을 하나로 합칠 단초를 마련했을지도 몰랐다.
“끝나셨습니까?”
이실레아 경이 바로 근처에서 구경을 했고, 드낙이 손을 거두자 입을 열었다.
“네. 이걸로 이 작은 숲은 더 빨리 성장할 것입니다.”
장작이 부족하면 가축의 배설물로 나야 할지도 몰랐다. 당연히 힘든 일이었다. 변은 비료로도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두 가지 일에 사용되면 그 효과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저 걷고 휴식하기를 반복하며 꾸준히 걸었다.
깊은 밤이 지나가고, 드낙은 〈검은 꿈〉을 꾸었다. 그가 이번에 얻은 〈검은 문〉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착실하게 스펙을 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맹호의 기세〉.
카리스마와 거친 기세를 더하는 것이었다. 전투는 물론이고 사람을 다루는데 카리스마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기세, 카리스마는 앞으로도 중요한 요소였다.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을 얼어붙게 만든다면 일이 쉬엄쉬엄 풀릴 것이다.
*
〈토치라이트 가문〉에게서 받은 토지는 〈버려진 영지〉에서 가장 북동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토지의 시작은 석지(石地)로 돌이 많은 땅이었고 곳곳에 작은 숲이나 초원지대가 형성되어있었다.
언덕은 적었고, 토지의 가장 끄트머리에 적당한 산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큰 산을 옆으로 작은 산이 나있었고, 그 사이의 계곡으로 흐르는 지하수를 가까이 두고 있는 것이 〈산지기 산골 마을〉이었다.
계곡물은 그리 멀리 가지 못할 정도로 적었다. 아마 마을에 우물이 몇 개 파져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돌들이 많고, 길도 여기서는 끊어져서 마차가 지나가기에는 시간이 크게 걸립니다. 여기서 하루를 머무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석지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레 이동속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적재량이 워낙 많았기에 돌 하나를 건너는 데에도 크게 덜컹거렸고, 나무 바퀴가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길까지 끊어졌기 때문에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게제라스의 조언에 드낙은 발을 멈추었다.
곧바로 원탁회의가 열렸다. 길이 끊어진 것이 가장 컸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드낙이 모두에게 물었다.
“일단은 〈산지기 산골 마을〉을 방문하고 판단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석지에 마을을 세우는 것은 썩 좋은 판단이 아닙니다. 다른 쓸만한 곳이 있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들에게 정보를 캐낸다는 소리군.”
게제라스가 고개를 숙이며 드낙의 말에 수긍했다.
당연히 드낙이 가야 했고, 부관으로는 부대장 이스핀이 맡았다. 혹여나 문제가 생기면 이실레아의 무력이 필요할 것이다. 병사는 고작 다섯만 함께하기로 하였다.
“큰 정보는 얻을 수 없겠지만, 혹시 모르기 때문입니다.”
작은 숲 뒤에 무엇이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지도는 갱신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그리 자세하지도 않았다. 드낙이 따로 지도를 제작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루를 머물고, 드낙은 곧바로 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변방에 있는 곳답게 토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곳곳에 통나무의 흔적이 보이는 것을 보니 목책부터 쌓고, 그곳에 진흙을 쏟아부어서 만든 듯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인구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걸려서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하루 거리였지만 길이 없었고 돌로 울퉁불퉁했다.
“그들이 왔습니다!! 짹! 촌장님을 불러와!”
종소리도 울리지 않고, 고함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들도 자경단은 있었기에 평야지대에 등장한 큰 세력을 일찍이 알아차린지 오래였다.
토성의 입구는 크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쪽문에 불과했고, 마차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성문을 만들기에는 마을의 역량이 없는 듯했다.
그곳에서 노인을 비롯한 젊은 남자들이 떼처럼 몰려나왔다. 나무로 된 농기구나 청동 같은 조잡한 광물로 만든 도끼를 우수수 들고 있기도 했다. 몇몇은 사냥용 활을 쥐고 있었다.
차림새는 형편없었는데, 그래도 꼬장꼬장한 텃세를 부릴 것 같이 고집스러운 표정을 하나같이 짓고 있었다.
‘하기야. 시골 중의 시골이니.’
장정의 숫자는 채 50명을 넘기지 못했는데, 인구가 많아도 200명에 불과할 것임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 주워들은 것은 계속해서 전수해진다. 전신갑주를 못 알아볼 정도로 야만적인 곳은 아니었다.
촌장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기사님을 뵙습니다. 저는 〈산지기 산골 마을〉의 촌장인 그리언이라고 합니다.”
〈촌장 그리언〉이 깍듯하게 말하자 드낙 또한 적당히 예우를 해주었다. 죽여도 시원찮은 것들이었기에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눈구멍도 없는 〈깃털 투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갑소. 나는 자유기사 드낙이라는 자고, 〈토치라이트 가문〉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기에 이렇게 오게 되었네.”
드낙은 토지 문서를 촌장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읽을 수 있을까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촌장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서 한 명에게 말했다.
“책을 가져와라. 가장 두꺼운 놈으로.”
“예! 촌장님!”
시간이 흐르고, 젊은 남자가 책을 펼친 채 받쳤고, 촌장은 순식간에 양피지를 넘기며 단어를 찾아 드낙의 토지권을 비교하며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따분한 시간이 흘렀지만 드낙은 가만히 있었다.
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양피지를 드낙에게 건네주었다.
“이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버려진 영지는 그 어떤 귀족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을은 야수의 침입에도 귀족의 도움 없이 지낸지도 300년이 넘어갑니다. 〈불파겐 가문〉의 몰락 이후 버려진 땅입니다.”
불파겐이라는 소리에 드낙이 귀를 쫑긋 세웠다. 다 읽고나서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흥미가 생겼다.
“이 〈버려진 영지〉가 본래는 불파겐 가문의 땅이었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하기야 누가 버려진 영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까? 귀족들이나 알 법하지요.”
말을 하다가 이내 촌장이 스스로 납득했다. 역사 교육을 받지 않고 현실만 살아가기 때문에 잊힐만했다. 특히 자유기사는 귀족이라고 부를 수 없었기에 역사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마을도 글을 몰랐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 어쩐다?’
드낙은 눈살을 찌푸렸다. 토지권을 보여주면 그대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저렇게 말하니 마땅히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드낙의 침묵에 겁이 난 것은 이스핀이었다.
전투에 있어서는 아기도 어린이도 여자도 가차 없이 죽이는 드낙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기사가 왔으니, 드낙 님의 품으로 들어오시오. 우리는 이곳으로 오면서 사교도의 마을도 토벌하고, 〈깊은 녹색 숲〉의 고블린 캡틴 3마리가 연합하여 달려들었음에도 거침없이 격파하였소.”
이스핀이 그렇게 말하며 경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촌장 그리언〉이 차가운 마음을 가졌다. 전형적인 사기꾼의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았다. 수많은 위험 속에서 기사의 도움 하나 없이 마을을 꾸려야 하는 것이 이 마을의 촌장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아도 머리는 차갑게 식힐 자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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