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9 <-- 바세안 토성 -->
드낙에게 덤벼든 〈피의 신도〉 여덟 명은 말 그대로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누구 하나 드낙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 전투 장면을 다른 기사가 봤다면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만큼 기술의 정수가 녹아져 있었다.
‘힘만 센 놈들이네.’
웬만한 기사들이 혀를 내두르는 짓을 했음에도 드낙은 태평하게 한 줄 평을 남겼다. 전투에서 오는 경험 하나 없는 〈잡것〉들이었다.
탄력적인 롱소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드낙의 비전은 어레인지가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10종이 넘었다. 애초에 기본 비전인 칠주(七主)조차도 막지 못했던 놈들이었다. 비전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아까운 놈들이었다.
‘킬 더 배틀이 없었다면 비전을 사용했을지도.’
저돌성 하나는 좋았다.
피로 범벅이 된 드낙은 모든 자들이 뿔뿔이 도망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실레아 쪽도 정리가 된 듯했다.
물론 모든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공성전이든 야전이든 무슨 전투든 한 번 싸워서 결판이 나는 것은 드물었다. 큰 피해가 없다면 두 번, 세 번을 한곳에서 붙었다.
드낙은 곧장 이실레아에게로 향했다.
이실레아 브릴리언트의 지휘로 재수 없이 화살이 박힌 노예와 전투 노예를 제외하고 피해가 없었기에 분위기 자체는 계속해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전투 보고를 하기도 전에 드낙이 손을 들어 올리며 먼저 자신이 할 말을 했다.
“저는 촌장이 도망친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이실레아···경은 병사의 절반을 이곳에 두고, 숨어있는 자들과 도망친 자들을 포로로 잡으십시오. 저도 이제 님보다는 경으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드낙은 씨를 붙이지 않고, 경으로 호칭을 새로이 했다. 그간 계속 고민했고, 이실레아 또한 갈팡질팡해서 드낙을 님이나 씨로 불렀는데 드낙의 호칭 변경에 이실레아도 능숙하게 받아들였다.
애초에 호칭 때문에 곤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투로 〈경〉이라는 칭호도 제법 그럴싸해질 것이다. 자유기사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기사 취급을 미리 받는 것만큼 마음에 드는 것도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드낙 경,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짐마차로 입구를 막아놓으면 절반만 지켜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자세한 것은 이실레아 경의 뜻대로 하십시오.”
드낙은 그 부분에 대한 디테일은 그녀에게 맡기고 그대로 대로를 뛰어갔다. 그렇게 뛰어가는 이유는 당연히 총지휘관으로서는 좋지 않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막아야 하는 이실레아도 막지 않았다.
‘수준이 너무 저급해. 저 정도는 상관없다.’
스스로 〈병목현상〉을 만들어내는 병신 같은 잡도들이었다. 전신갑주를 입은 기사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교도 또한 힘 한 번 못 쓰는 것을 보니 그리 큰 은총을 얻어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뭐라도 죽이다 보면 하나는 얻겠지.’
드낙의 노림수는 〈검은 꿈〉이었다. 악신의 힘은 얻지 못해도 적어도 〈검은 꿈〉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그것은 아무리 약한 놈이라도 검은 문을 토해낸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루에 모조리 죽이지 않고, 투항하도록 만들어서 한 명씩 하루에 죄목을 들먹거리며 처형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대충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총관 게제라스〉가 의문을 가지면서도 일단은 살을 붙여줄 것이라고 믿었다. 애초에 이번 토벌에 대한 자세한 줄기도 그의 의견을 100% 반영한 것이었다.
서걱!
“으, 으아악!”
그 도중에 요령 없이 대로를 뛰고 있던 사교도들은 너도나도 화들짝 놀라서는 무슨 수류탄이나 탱크를 만난 것처럼 골목길로 몸을 던지거나 나무 창문을 서둘러 열어서 그대로 안으로 도망쳤다.
물론 그러지 못한 놈은 가차 없이 무시했지만 무기를 자신에게 겨눈 놈은 온정 하나 없이 베어 죽였다. 싹을 본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겁에 질려서 하는 자기방어에 불과했지만, 드낙의 손속은 피를 봤을 때 특히나 날카롭게 버려진 칼과도 같았다.
현대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본 드낙은 냉혈한이 되어있었다.
그것은 일말의 틈이라도 보여주는 순간 자신이 죽거나 큰 부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흥분해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둘 모두였는데, 손속이 매서울수록 자신이 안전해지기 때문인 것이 가장 컸다.
“컥!”
흥분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었고, 계속된 실전을 통해서 그 흥분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몸을 달아오르는 정도에 불과했다.
“흐으, 으윽!”
무엇보다도 드낙은 생명체를 죽이는 것으로 강력한 능력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 체감 시간이 느려지는 〈킬 더 배틀〉이라고 이름 지은 능력이었다. 단 하나의 피해 없이 〈피의 신도〉를 죽인 것도 이 능력 탓이 컸다.
기술이 없어도 인간 같지 않은 신체능력을 가진 〈피의 신도〉 8명을 무피해로 죽인 것은 당연히 드낙으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대인 마법이 없는 〈72년 전신갑주〉로는 더더욱 어려웠다.
드낙의 강함은 특히나 약자나 어중간한 강자를 상대할 때 빛을 크게 발휘하였다.
닥치는 대로 방해하는 놈들을 죽거나 베면서 대로를 달렸다. 이미 목적지는 드낙에게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철저히 위상만을 위해서 건설된 건축물.’
성문을 지나 대로를 따라 광장에 도착하면 바로 앞에 보이는 큰 목조건물이었다. 〈버려진 영지〉에는 숲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들판, 초원, 불모지나 황무지였다. 당연히 나무가 귀했고, 그런 나무로 만들어진 것만으로도 이 건축물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남들이 다 진흙을 굳혀서 만든 집을 쓰는데 여기만 목조 건물이었다. 그것도 넓이도 대단했다. 못해도 200평짜리는 되어 보였다. 건축술이 없는지 2층도 아니었고, 1층에 불과했다. 높이로 따진다면 1.5층 정도.
드낙은 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단번에 눈에 보이는 〈피의 신도〉들이 보였는데 모두 급하게 중앙으로 보이는 지점에 있는 지하 계단을 후다닥 내려갔다.
드낙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탁 트인 공간에 나무로 된 기둥이 곳곳에 박혀있었고, 인기척 하나 없었다. 그곳에서 드낙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곳 뒤에 있는 큰 석상을 볼 수 있었다.
‘조각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겠는데.’
여신의 조각상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가 조각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밑에는 시체가 가득했고, 배를 갈라 내장이 나온 희생자가 안겨있었다.
‘딱 봐도 악신이다.’
드라큘라로도 보였다. 피를 힘으로 삼는 신이라니. 드낙에게 있어서는 혐오만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이곳에 사교가 퍼진 이유는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힘.’
〈피의 신도〉를 통해서 느낀 대단히 증가한 신체능력! 이런 곳에서 그런 강함을 주는 악신을 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믿고 싶지 않아도 믿어야 했고, 믿는 사람이 많으면 믿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만큼 매력적인 은총이었다.
쿵. 저벅.
지하 계단을 드낙은 거침없이 내려갔다. 어두컴컴하지는 않았다. 곳곳에 횃불이 지펴져 있었다. 〈바세안 촌장〉 노릇을 하며 얼마나 많은 마을의 자원을 쥐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름을 막 쓰네.’
계단의 밑에는 기름이 잔뜩 담긴 큰 그릇에 불이 피워져 있었다. 아주 흥청망청이다. 그 위로는 흉악한 사자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는데, 자리 배치가 썩 좋지 않은지 턱부분이 새까맣게 타있었다.
기름 불과 사자의 머리로 장식된 기둥을 지나자마자 확 트인 지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농밀한 혈향을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이상했는데, 지하공간에 들어서기 전부터 맡아져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크크! 겁도 없는 기사 놈이 정말로 혼자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힘에 대한 자신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촌장 바세안〉이 피로 가득한 곳에 서있었는데, 발목이 피로 가려져 있었다. 얕다면 얕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 공간을 가득 메울 정도였기에 대량의 피였다. 그는 드낙이 홀로 따라온 것에 크게 기뻐하는 듯했다.
주변에만 10명이 넘는 〈피의 신도〉들이 함께 있었다. 서로 얼굴이 비슷한 것을 보니 한 피를 타고난 놈들이었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
드낙의 물음에 피의 신도들이 히죽 웃었다.
크크···흐흐흐···
“저 무지함을 보라!”
“악신 중의 악신이며, 피를 바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은총을 내려주는 우리들의 위대한 아토라신이 가진 힘을 모르는 저 어리석은 자를 보라!”
촌장은 두 팔을 쩍 위로 올리며 그의 시선을 낚아챘다. 그 또한 양손에 〈피의 검〉을 웅덩이에서 꺼내며 말했다. 핏물을 움켜쥐었을 뿐인데도 자연스럽게 피가 들러붙으면서 검의 형상을 가지더니 단단하게 굳었다.
“잘 봐라! 이것은 〈앙켈론의 생명〉이라 불리는 그분의 은총이시다! 무기를 가지지 않은 자들에게 베풀어주는 그분의 그 따뜻한 마음! 흙을 빚어 집을 짓는 이 마을에 자신을 지킬 힘을 내려주셨다!”
그는 매우 노한 표정을 지으며 피의 검을 드낙에게 겨누었다. 눈은 점점 흰자위가 사라지고 붉은색으로 변질되어갔다.
확실하게 차별화된 모습이었다. 그는 〈피의 신도〉가 아니라 〈피의 사도〉였다.
“그, 그, 캬캬캬카! 그리고 〈노도반의 심장〉의 은총을 보라! 오직 〈사도〉가 된 자들에게만 쥐여지는 거대하고 거대한 그분의 은총!”
그의 발밑을 시작으로 피가 거침없이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저 피를 아토라신에게 바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그런 힘을 얻어낸 자격을 획득하였다.
피는 마치 갑옷처럼 촌장을 둘러쌌다. 옷마저 집어삼켰지만 타이즈를 입은 것처럼 바짝 달라붙었다. 옷을 안 입은 것과 비슷했다. 물리법칙을 완전히 뛰어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의 은총이라는 건가.’
피의 갑옷을 입었는지 몸이 조금 부풀어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근골 자체가 전사처럼 변했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바로 피의 갑옷이라 불리는 은총이다! 화살조차 눈에 맞아도 뚫리지 않는다!”
그가 눈을 크게 손가락으로 벌리면서 말했다. 흰자위 하나 없고, 모든 것이 붉었다.
“그크큭!”
촌장 바세안의 목소리가 괴물처럼 들끓었다. 또한 그는 쾌감이라도 느끼는지 몸을 들썩들썩 거리면서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쩌저적!
그의 등이 쩍 갈라지면서 척추가 그대로 뼈만 앙상하게 튀어나오더니 이내 목뼈까지 뜯겨져 나왔다. 끔찍한 광경에도 십여 명의 피의 신도들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피의 웅덩이에 있는 피들이 잔뜩 바세안에게 차오르며 형태를 잡았다. 단번에 거대화(巨大化)가 된 〈괴물〉이 입을 열었다. 악어와도 같은 파충류의 주둥이였지만 그 속에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너희 기사들이 지닌 기술, 검의 달인이니 뭐니 그딴 개잡소리도 이 강력한 힘 앞에서는 무력하고 무력하다. 이곳은 그분에게 〈피를 바치는 성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분에게서 받아마시는 〈피의 성배〉의 역할이기도 하다."
드낙은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신장은 상당하다. 3미터는 될 것 같은데.’
전신갑주로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런 성능 시험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드낙은 날카롭게 피의 괴물을 탐색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괴물은 자신의 힘에 도취되어서 끝도 없이 지껄였다.
“이것이야말로 〈피의 성배〉, 〈길멜론의 원한〉! 너는 트롤조차도 잡을 수 있는 이 거대한 은총의 힘과 맞서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백 명이 모으고 모은 피의 성배가 가지는 강력한 힘을 마주하며 죽어라!”
그 말을 끝으로 괴물의 입이 닫혔다. 그리고는 샛노란 눈이 드낙으로 향했다. 피의 검을 쥔 〈피의 신도〉들 또한 괴물이 단박에 그를 향해 달려들자 똑같이 달려들었다.
드낙이 검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잡졸들부터.’
〈깃털 투구〉 속에서 드낙의 혀가 입술을 핥았다.
========== 작품 후기 ==========
5507자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