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7 <-- 그 후 -->
자신은 흑마법사의 제자가 아니라고 잡아떼는 놈을 물끄러미 보며 전투노예 하나에게 말했다.
“이 녀석 끌고 밖으로 나가자.”
“예!”
전투 노예가 막힘없이 놈을 들어 올렸다.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자신의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원탁에 앉히자마자 드낙의 투척 단검이 단번에 허벅지에 박혔다.
“흐아악! 으으으으으응윽!!”
크게 괴로워했다. 드낙은 혁대에서 하나를 더 꺼내어 원탁에 내리꽂고는 말했다.
“다음은 손가락이다.”
“저는 정말 아닙니다! 흑마법이라뇨! 저는 그저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개소리하지 마라. 넌 흑마법사를 〈스승님〉이라고 불렀잖아.”
“예?”
그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드낙은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싸우는 내내 소리를 들으며 그 목소리를 단번에 잡아챈 것이다. 특히나 이놈은 가장 뒤에서 자주 소리를 질렀기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드낙이 확신을 할 수 있게 많은 정보를 내어주었던 것이다.
그런 드낙의 말에 그가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히히히히. 키키킥!”
미친 듯이 웃는 녀석은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추욱 늘어졌다. 그리고는 이곳에 대한 제법 중요한 것을 이야기했다. 가장 먼저 〈스승님〉에 대한 것이었다.
〈악마숭배자 타탄훔〉.
발의 족적만으로도 검은 불꽃이 타오르고, 유황 가루가 흩날리는 흑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악마 아카타베루〉의 총애를 받는 자.
“흑마법은 배우지 못했나?”
“하나 배우긴 했습니다. 하지만 〈간략화〉를 이루지 못해서···”
실전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나 보다. 수인을 맺지 못할 정도로 꽁꽁 묶인 상태라면 더더욱. 드낙은 고개를 끄덕이며 놈을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기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허벅지에 박은 단검도 치료해주었다.
“바로바로 말하지. 왜 단검을 쑤시게 만들어. 너는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 말만 잘하면 죽지도 않을 거다. 타탄훔의 특징이나 그런 거. 엉? 잘 말하면 갇힌 상태로 그래도 조용히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저, 정말입니까?”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드낙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드낙은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였는데 너무 잘 먹히자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 멍청했기 때문이다.
손에 뭔가를 쥔 놈들이랑 투닥거리다 보니 오히려 이런 놈들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왜 흑마법사가 이런 놈들을 하수인으로 뒀는지 알겠군.’
“여기에 제자가 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지?”
“그냥 떠돌이 부랑자였습니다··· 동화 몇 닢 쥐어주면서 알게 되었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 정말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잘 좀 이야기해주십시오! 타탄훔에 대해서 제가 아는 건 뭐든지 말하겠습니다!”
드낙은 어깨를 토닥이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물론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서 재갈을 물리면서였다. 그는 결코 이 흑마법사의 제자를 믿지 않았다.
‘자살이라도 하면 큰일 나지.’
타탄훔이 없는 타탄훔의 거처에서 획득한 전리품은 다음과 같았다. 흑마법사의 제자가 말해준 비밀방도 있었다. 그곳에는 무기를 대량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유황 냄새를 풍겼다.
〈흑의 양피지〉 - 수천 장.
〈울림의 수정〉
〈흑마법사의 하수인〉 2명
〈귀만 열린 양피지 제작자〉 5명〈검은 크리스탈〉 - 짐수레 10대 분량.
〈동화 십만 닢〉
〈유황 냄새가 나는 무기들〉 - 300자루
‘아주 작정을 했구나.’
그리고 이 정도로 모아놨기에 〈처분〉하기가 힘들었던 것이고, 그저 묻어둔 것이었다.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것이다. 늑대의 후각으로 만들어낸 소거법과 드낙의 꼼꼼함 그리고 순간적인 비상함이 아니었다면 결코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수많은 것들이 남아있었다. 말 그대로 드낙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검은 문〉에 대한 욕망과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으로 순찰자를 죽였기 때문에 순찰자들의 원한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드낙이 그를 죽였듯이 덤벼올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밖〉이기 때문이다. 드낙이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것을 놈들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화살이 날아오면 끝장을 내고. 그게 아니라면 놈들이 포기한 것.’
드낙은 눈을 감았다. 달구어진 돌이 바닥에서 열을 내며 그의 몸을 데웠다. 뜨끈함은 곧 피로감을 크게 줄일 것이다.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화아악!
검은 연기는 전과 다름없이 거침없이 튀어나와서 그를 지나갔다.
바닥에는 언제나처럼 오른손이 튀어나와있었다. 바닥 속에 보이는 팔은 앙상하고, 말라비틀어져 있었지만, 바닥에 튀어나온 오른손은 생기가 가득했다. 드낙은 그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검은 꿈〉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 손을 잡는 순간, 분명 무언가가 변할 것이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하다.’
드낙은 만족할 줄 아는 자였다. 검은 문만 해도 노력하면 출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을 비롯해서 〈변종 키메라 포낙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연기가 물씬 해일처럼 튀어나와 서서히 가라앉았다. 드낙은 가장 궁금한 것을 세파리아스에게 물었다.
“이실레아 브릴리언트라고···”
불파겐은 그것을 이미 봤는지, 단칼에 드낙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아니다.]
“혼혈일 수도 있잖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크흐흐···
귀곡성 같은 기괴하고, 팔뚝에 소름을 돋게 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녀석은 항상 그렇다. 〈혈통〉에 대해서 매번 불만, 불신이 가득하지. 평민이라서 어쩔 수 없지만 꼭 내 신경을 건드려야 하겠나.]
드낙으로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놈의 선민의식 때문에 불만이 쌓여있었다. 제대로 한 번 붙어볼 심산이었다.
“아니, 그럼 뭐. 너희 집안은 피가 황금색이라도 되냐? 어디까지 그렇게 당당할 생각이냐?”
[불파겐 가문의 혈액은 다른 자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다른 장기는 선천적으로 차이가 존재한다. 그게 바로 〈불파겐의 혈통〉이 가지는 힘이다.]
“그게 뭔데?”
[하나는 〈야수의 적발(赤髮)〉이라 불리는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다.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만으로도 마법 저항력이 대단히 올라가지. 〈오우거 슬레이어〉의 업을 쌓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특징이다.]
[그 업(業)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성흔(聖痕)과도 같은 것이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드낙의 멍청한 소리에도 불파겐은 계속 말했다.
[다른 하나는 〈엘프의 녹안(綠眼)〉이다. 불파겐 가문의 피에는 엘프의 피가 섞여있다. 그 어떤 눈보다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엘프의 피는 인간의 피에 가려지지도 않고, 흩어지거나 묽어지지도 않는다. 싸워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애초에 흑마법사에게 생포당했다는 것만으로도 불파겐의 생존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불파겐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드낙은 괜히 기분이 뒤틀렸다.
드낙은 그제야 이 세상이 판타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러운 세상이네.’
사실 불파겐 가문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기에 야수의 적발이니 엘프의 녹안이니 하는 것을 들어는 봤지만 거기서 그 효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 혈통에 대한 다른 귀족 가문들의 소문이나 대단함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음··· 그럼 이실레아는 아니라는 건가?”
[그래. 그리고 네 녀석이 몇 백 년을 수련하든지 하루빨리 불파겐 가문의 생존자를 찾는 것이 몇 배나 더 이득이라는 거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남부 왕국에서 불파겐 가문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아는데, 내가 미쳤냐?”
[그러니 그냥 제국으로 가서 다시 시작해라.]
“싫어.”
그건 드낙의 야망과 달랐다. 차라리 혼란스러운 남부 왕국이 힘을 키우기에 좋았다.
“근데 그 혈통이란 거 〈찌꺼기〉를 먹은 나도 개화할 수 있을까?”
[오우거를 잡으면 머리카락은 바뀔 수 있을지도.]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찌꺼기〉를 받아먹은 것이 드낙이었다. 그 얇은 업의 실은 오우거를 잡으면서 크게 커질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업에 관련된 것은 오우거나 되는 몬스터를 몇 세기 동안 계속해서 토벌해온 불파겐 가문만 아는 비밀이었다.
결론은 이실레아 브릴리언트는 불파겐의 생존자가 아니었다. 또한 불파겐의 생존자는 생각보다 제국에서 잘 먹고 잘 살지도 몰랐다. 선천적으로 마법 저항력을 부여해주는 적발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 같지 않은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비전이 없어도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드낙은 한 번 제국으로 여행을 떠날지도 몰랐다. 그만큼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퀘스트를 완료하면서 오는 그의 유산은 대단한 것이었다.
*
검은 연기가 아침부터 피어올랐다. 산 뒤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연기는 대량이었고, 끝도 없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 거대한 연기의 방출은 매우 멀리서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였다.
〈빛의 전령 오메인〉은 그것을 보며 드디어 때가 왔음을 느꼈다.
‘빌어먹을, 늑대 용병단 놈들.’
이번 일에서 공 하나 세울 수 없게 된 오메인은 연기만 봤음에도 놈들이 크게 성공했음을 알게 되었다. 가장 최악으로 상정한 상황이 온 것이다.
〈지역 신전〉은 그 지방에 있는 시민들을 도와주고, 병자를 치료하는데 집중해왔다. 야수의 토벌보다는 질병과 부상 그리고 불구 등에 싸우는 것이 〈지역 신전〉이었다.
반면 〈빛의 전령〉은 흑마법사, 네크로맨서, 변절자 등을 잡는 자였다. 자연히 지역 신전의 지원이 필요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병력을 모으는 속도는 늦을 수밖에 없었다.
〈늑대 용병단〉이 밖으로 나가고 10일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이 순간 오메인이 가진 전력은 성기사 15명에 사제 10명이 전부였다. 반면 귀족들의 병력은 정규군만 1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대로를 오고 가며 분위기를 잡듯이 전력 물자가 옮겨지고 제법 공포스러운 분위기도 조성하는 등, 벌써부터 물밑작업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전은 귀족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그냥 오메인은 밖으로 나가서 대놓고 그라돈의 진영에 합류했다. 그것은 결코 〈대치〉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구색이라도 잡겠다는 뜻이었고, 귀족의 결정에 딴죽을 걸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체면치레〉라도 하겠다는 모습이었고, 굴욕적인 결정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다. 각을 세운다고 생각했다면 바로 그들의 옆에 진지를 구축하고 똬리를 틀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빠른 행동력.’
마치 신전의 군사체제를 알고 행동한 것처럼 느껴지는 늑대 용병단의 행보였다. 오메인으로서는 그저 자신들도 출정했다고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실패하기를 원했건만.’
늑대 용병단이 실패한다면, 신전의 차례가 올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물론 귀족에게도 차례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귀족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곧 드낙과 독대를 하여 그 공을 가져갈 것이다.
〈밖〉이었기에 언제든지 공작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공작을 빌미로 협박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지역 신전〉과 크게 공생하고 있는 것이 귀족이었고,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끌어모은 성기사와 사제들이 그런 오메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오메인은 손발이 잘린 채 그저 구색만 갖추는 것만으로도 이번 일에 만족해야 했다.
‘아쉽다.’
〈빛〉을 알리는 것은 결코 병든 자들을 치료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 진정한 위협은 흑마법사들이었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공적을 〈빛의 전령〉들이 세워야 했다. 그게 바로 오메인이 생각하는 길이기도 했다.
‘못해도 한 달만 더 지연되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그때라면 귀족과도 대충 각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대규모로 신성력을 뻥뻥 터트려서 〈악마의 힘〉을 발굴하듯이 찾아낼 수도 있었다. 시간은 신전의 편이 아니었고, 무식한 드낙의 행동력이 신전을 손도 안 대고 밟아 죽인 결과가 되었다.
벌써부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밖으로 오메인이 나가자 병사가 그곳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라돈의 목소리가 쩡쩡 울렸다.
“순찰자들을 보내라! 구조 신호일지도 모른다!! 또한 병사 다섯은 경장비를 하고 순찰자를 따라나서라! 나머지는 완전 무장을 하라!”
곳곳에서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경장비를 한 병사가 순찰자와 함께하는 것은 정황상 늑대 용병단이 늙은 순찰자 하나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좋군. 좋아.’
그라돈의 표정은 아주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야 그럴 것이, 신전이 고개를 숙이고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 늑대 용병단의 흔적이 크게 발견되었으니 거의 모든 일이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결과를 내다니. 생각보다 더 써먹기 좋은 용병단이다.’
성주는 늑대 용병단의 공을 거래할 것이다. 이미 〈집사 젠 토치라이트〉가 이곳 진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밖〉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흑마법사의 거처를 토벌한 공은 그라돈의 이름으로 뻗어나갈 터였다.
그라돈의 눈에 입술이 씰룩거리는 오메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실로 짜릿했다.
신전은 단 보름 만에 어떤 결과를 내거나, 세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라돈은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최악의 최악을 상정하고 이미 귀족에게 합류해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손해는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체면치레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가만히 때를 기다리다가 굼뜬 놈이라고 욕을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확실히 〈빛의 전령〉답군.’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병력의 숫자가 적든 말든 밖으로 향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고, 죽이되든 밥이되든 손에 쥐려고 했을 터였다.
성주의 직접적인 당부가 아니었다면, 신전이 발 빠르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그라돈은 돌발행동을 했을지도 몰랐다.
========== 작품 후기 ==========
6622자
절단마공을 배우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