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5 <-- 흑마법사의 거처 -->
〈이실레아 브릴리언트〉. 강렬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고 척 봐도 독설을 하는 것이 제법 독기를 마음속에 담은 자유기사였다. 금발에 연두색 눈은 사실 불파겐의 혈통이라고 딱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한다면 혼혈?’
〈야수의 적발(赤髮)〉 〈엘프의 녹안(綠眼)〉 중에 하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 녹안조차도 엘프의 눈인지 아니면 그냥 연두색 눈인지도 드낙은 확신할 수 없었다.
‘세파리아스에게 물어봐야겠군.’
판타지 세상이니 뭔가 현실성 없는 것이 튀어나올 수 있었다. 성급한 결론은 좋지 않았고, 또한 〈불파겐〉이라는 이름은 신뢰가 쌓여지고도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단어였다.
‘판단 보류.’
드낙은 그저 이실레아에게 예의를 갖추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행동하기로 했다. 이스핀과 도렌은 알아서 길 것이다. 애초에 존댓말이 몸에 밴 것이 그였다.
“자유기사셨군요. 그 배에 있는 문양이 있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전투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이실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전신에 힘을 크게 쥘 수 없습니다.”
그녀는 이들이 용병단임을 알았음에도 존대를 했는데, 이곳이 성채 내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든지 하극상이 벌어지기 좋았고, 이들은 인원수가 많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용병단을 대우해주는 것이 좋았다.
‘용병단장의 행동을 보면 적어도 날 어디로 팔아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예의를 지키는 드낙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평소에도 저렇게 예의가 바르다면 믿어볼만했다. 직장 생활하며 매번 욕을 달고 사는 사람에게 중한 프로젝트가 맡겨질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럴듯한 겉모습은 그렇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노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굉장히 귀찮고, 번거로우며, 때때로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무더운 날씨에도 주말에 날 잡고 미용실에 가서 펌과 뿌염을 하는 것처럼 보통 노력이 아닌 것이다.
그만큼 남이 좋아하는 겉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드낙의 평소 행실은 그를 자유 기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존댓말을 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렇다면 일단 저희들을 따라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겠습니까?”
“남겨지는 것보다는 따라가겠습니다.”
선택권을 주는 것 또한 배려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 뒤로 드낙은 대충 노예들을 모아놓고 한 번에 대충 아까의 일을 설명했다.
“··· 그러니, 아직 놈들에게 들키지 않은 이상 확실하게 쳐들어가서 계단 밑에 있는 원탁을 점령하고 부채꼴로 이어지는 6개의 문에서 나오는 자들을 차례차례 처리한다. 대답은 필요 없다. 동굴이니 소리가 울린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드낙이 선두를 서고, 곧바로 오른쪽 벽에 붙어서 이동했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방을 세 곳 지나고, 개인실로 보이는 9개의 문을 지났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밑에는 넓은 부채꼴의 공간이 나타났다.
타다닥!
소리가 들려오자, 드낙은 몸을 낮추었다. 아래에 있는 6개의 문이 대부분 열려 있었고, 흑마법사의 하수인들이 모여있었다. 그 숫자는 8명이었지만, 인간형 키메라가 16체(體) 있었다.
인간형 키메라는 말 그대로 인간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는 키메라였다. 물론 그것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기괴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이 피부색이 검었고, 아랫배는 쩍 갈라져서는 균열이 나있었는데, 붉은색으로 열기가 토해지고 있었다.
불을 당장이라도 쏠 것처럼 보였다.
‘딱 봐도 악마의 힘이 스며들었다.’
아크온 몽펠리에와 함께 본 〈변종 키메라〉와는 크게 그 성질이 달랐다. 〈악마의 힘〉이 주력인 키메라들로 보였다. 모두 머리의 한쪽 부분에 질척거리는 뭔가가 들러붙어서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또한 머리통에서 쭉 내려와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팔이 세 개거나, 머리는 하나인데 목이 두 개인 놈들도 있었다. 온갖 실험이 행해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형 키메라들은 흑마법사의 하수인들에게 절대 충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같이 무기를 쥐고 있었으며, 작지만 철로 된 원형 방패를 쥐고 있었다. 물론 척 봐도 엉성했다. 숏소드와 방패를 수련으로 쓴 드낙이었다. 자세만 봐도 딱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싸울 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고기 방패겠지.’
흑마법사의 세력은 24 그리고 자신들은 36이었다. 해볼만했다.
‘어떻게 들킨 거지?’
그런 고민을 했지만 이내 빠르게 접어버리고는 곧바로 손짓을 해서 노예들을 불렀다. 위에 있는 지금 지형을 빠르게 점령하는 것이 좋았다.
“준비되면 한 번에 투창한다.”
드낙 또한 돌창을 집어 들었다. 골고루 돌창 100자루가 곳곳에 놓였다. 못해도 3번은 던질 수 있을 것이고, 똑바로 대응하지 않으면 5번은 쏠 수 있을 것이다.
이스핀과 도렌이 기어 다니면서 드낙에게 완료가 되었음을 알렸다. 이에 드낙이 벌떡 일어났다. 다른 이들도 드낙을 보고 있었기에 도미노처럼 우수수 일어났고, 단번에 돌창을 투척했다.
명중률은 기대하지 않았다.
무게, 나뭇가지를 반들하게 깎았지만 굴곡이 있다는 점, 돌마다 형태가 비슷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다채로웠다. 똑같은 힘으로 던져도 결과는 돌창마다 달랐다.
소리 없이 쏘아진 돌창 20개 중에서 반절은 땅과 부딪쳤다. 하지만 그 반절은 정확하게 키메라와 하수인을 두들겼는데, 위에서 아래를 향해서 쏜 것이라 명중률이 조금은 더 높아질 수 있었다.
“컥!”
흑마법사의 하수인 중 하나는 재수 없게 목에 돌창이 박혔다. 그것이 대세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단번에 머리부터 땅에 처박았고, 팔에 돌창이 박히기도 했다.
괜히 투창이 아니었다. 무게는 화살보다 더했기에 일단 맞으면 뼈도 못 추렸다.
“계속 던져라!!”
“우와아아!!!”
노예들이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키메라들이 입에서 불을 토하다가도 거리가 멀어서 계단을 태우거나 허공에서 사그라들었기에 더욱 열심히 던졌다. 놈들이 다가오면 끝장이었다.
악을 써서 온 힘을 다해서 던지고, 제법 투창에 재능이 있고, 요령을 벌써 터득한 전투 노예는 자신이 가진 돌창을 다 투창하고 나서는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단궁을 집어 들었다.
노예들은 자신들에게 분배된 돌창을 모두 소비할 때까지 던질 수 있었는데, 이것은 하수인들이 키메라들에게 공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보호를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병신들!’
드낙이 속으로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위에서 내려다보기에 알 수 있었다. 놈들이 보호를 명령하며 곳곳에 뭉쳤는데, 원거리 타격에 있어서 그렇게 뭉치는 짓은 정말로 어리석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지금은 지옥으로 알아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타격점이 모여있었기에 그곳으로 화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퍼져 있었다면, 전력을 보다 보존할 수 있었다.
점과 면의 싸움! 아래를 내려다보는 드낙은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진실과 경험은 그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큰 전술적 깨달음이었다.
점을 타격하는 것이 투창이고, 화살이다. 그러므로 넓은 면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되려 모였다. 알아서 면을 줄이는 격이었고, 명중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대충 던져도 맞기 때문이었다.
“활을 쏴라!”
거리는 고작 50걸음도 되지 않았지만 20명이 쏘는 화력 앞에서 쩔쩔매던 하수인들이다. 이미 돌창 100자루로 키메라들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고, 허벅지부터 어깨까지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인간형 키메라가 절반이 넘었다.
100자루를 소모한 것치고는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엄청난 피해였다.
순식간에 인간형 키메라 16체 중에서 8체가 중상을 입고, 나머지는 하나씩 상처를 가지거나 창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드낙은 그렇게 말하면서 계단의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는 늑대 도노와 늑대들이 드낙의 뒤로 섰는데, 달려오는 놈들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화살이 쏘아졌다. 키메라들의 시체를 방패 삼아 흑마법사의 하수인들은 너도나도 고함을 지르면서 서로에게 돌진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라도 나서는 이들이 없었다.
‘구심점(求心點) 하나 없다.’
진정으로 대장 노릇하는 놈이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제자조차도 제대로 된 흑마법을 한두 개 먹은 것이 전부인데 그것도 아닌 하수인들에게 흑마법이 전수될 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흑(黑)의 양피지(羊皮紙)〉가 전부였다.
“이대로면 다 죽는다고! 이 개새끼들아!!”
“달려들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명령할 뿐이었다.
퍼퍽!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인간형 키메라를 방패로 삼은 채 웅크린 놈들이 고래고래 서로를 비판했다. 그러다가 화살이 스치고 지나가 피부를 긁으면 더욱 웅크리기만 했다.
병신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것 또한 한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늑대 용병단〉이 가져온 화살은 모두 합쳐봤자 300발이 되지 않았다. 1인당 15발 밑으로 소지한 탓이다.
화살비가 순식간에 멈추었고, 흑마법사의 하수인 7명이 키메라의 시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흑의 양피지〉를 소지하고 있었기에 평범하지 않은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드낙은 결코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방어 마법도 쓰지 않다니. 결국에는 하수인, 버리는 말인가.’
“이 개같은 용병 새끼들! 모조리 죽여주마!!”
평범한 무장 상태를 보고 하수인 중 하나가 거침없이 달려들었고, 그 뒤로 줄줄이 엮어지듯이 계단으로 달려왔다. 모두 제각각 무기를 쥐고 있었다. 철퇴부터 시작해서 롱소드나 대검까지 쓰는 자도 있었다.
‘앙상하게 말랐음에도 대검. 역시 양피지를 소지하고 있어서인가.’
인간 같지 않은 스피드로 달려오는 하수인들의 모습에 드낙을 제외하고 다른 자들이 바짝 긴장했다.
드낙은 롱소드를 하단으로 내리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그야말로 대범했다.
만약을 위해서 방패를 팔뚝으로 밀어서 착용하고 있었지만 사용할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착용하고 있는 이유는 만약을 대비해서였다.
첫 번째 놈은 성격이 급한 놈이다. 이런 놈은 먼저 선공하는 것을 좋아한다. 애초에 달려든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흑의 양피지〉로 깃털처럼 가볍게 빠른 속력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용병단보다는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스피드를 좋아하는 놈이라, 양손에 대거를 쥐고 있었다. 쌍수를 사용하던 놈이었는데 문제는 대거를 모두 찌르듯이 드낙에게 들이밀 준비 자세를 하면서 도약했다는 점이다.
무(武)를 연마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절로 보였다. 저렇게 대거를 찌르면 손아귀에 멍이 들 것이다. 심하면 찢어질 수 있었다. 기술적으로 형편없었고, 제대로 된 실전 하나 겪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헬스를 하던 사람이 검도를 우습게보고 진검들고 승부하는 꼴이다. 리치가 긴 롱소드가 거침없이 쏘아져서 탄환처럼 겨드랑이를 찔렀다. 그것만으로도 크게 들썩거리면서 고통에 대거를 쥔 손이 움츠러들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크악! 아아아아악!!!”
늑대 몇이 달려들어 뒷목을 거침없이 물어뜯고, 사지를 물어서 고개를 털었다. 겨드랑이가 찔리는 순간부터 몸이 고통으로 경직되었기에 반격조차도 하지 못했다. 겨드랑이는 인간의 급소였다.
한 명이 그렇게 무력화되었다. 뒤따르던 놈은 대검을 쥔 앙상한 몸을 하고 있었다. 드낙은 거침없이 체중을 실으며 대검과 롱소드를 부딪쳤다. 위에 있었기 때문에 중력의 힘까지 이용했다.
“어윽!”
놈이 그대로 힘에 밀려서 뒤로 넘어졌다. 계단을 구르면서 다른 하수인과 뒤엉켜서 떨어졌다. 그 여유로 롱소드를 회수한 드낙은 아예 방패까지 버렸다. 두 명을 상대하면서 이 하수인들이 결코 〈전투용〉이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범처럼 뛰어들었다.
부웅!
철퇴가 휘둘러졌다. 드낙은 피하지도 않았고, 거침없이 철퇴의 안쪽을 후려쳐서 궤적을 바꾸었다.
서걱!
탄력적인 롱소드는 철퇴를 후려치면서 되려 반대편으로 탄력적으로 점프하듯이 껑충 뛰었고, 그대로 목이 잘렸다. 그리고 드낙이 느끼는 시간이 느려졌다. 검은 문을 획득하지도 않았을 때, 가지고 있었던 능력이었다.
머리채를 잡아, 다른 놈의 무기를 막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집어던져서 넘어뜨리고, 굴러떨어진 놈이 있는 곳으로 착지하면서 롱소드가 눈을 깊이 찔러들어가 뇌를 파괴했다.
3명이 죽고, 1명이 굴러떨어졌다. 4명이 서로 모여서 달려들지 못하자 드낙은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갔다. 그 뒤로 피가 거침없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손목이 날아가고, 무기가 떨어졌으며 가슴에서 피를 뿌리며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는 자까지 나오자 나머지 2명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단번에 무기를 버렸다. 드낙은 그것을 발로 차면서 말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순식간에 무기를 든 8명을 격살시킨 드낙은 괴물 그 자체였다.
“양피지도 버려.”
“예!”
하수인 두 명이 그렇게 생포되었다. 드낙의 뒤로 뒤늦게 내려온 자들은 확인 사살을 하고 있었다. 드낙이 품에서 기름 먹인 누런 천을 꺼내어 롱소드에 묻은 기름과 피를 힘을 줘서 말끔하게 밀어내어 털어냈다.
그 모습을 이실레아가 눈에 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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