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4 <-- 흑마법사의 거처 -->
딱 봐도 뭔가가 있어 보이고,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대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내부를 혼자서 확인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침착하게 기다려라. 소란이 일어나면 바로 내려오고.”
“예. 기다리겠습니다.”
이스핀이 냉큼 대답했다. 도렌 또한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드낙은 무기를 집어넣고, 애지중지하는 활을 꺼냈다. 양옆에 부착물을 꽂아서 고정해 장력을 더하여 장궁처럼 만들었다.
화살통은 다른 자들의 것을 착용하고 내려갔다.
지하 1, 2층에 함정이 없다고 여기도 없다고 생각되지 않았는데, 그 비중을 가장 크게 한 것이, 오른쪽 벽 끝에 있는 먼지만 크게 적었다. 오고 가는데 굳이 벽으로 붙어서 다녔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돌린 드낙은 이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함정이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무시했다. 계단은 밝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함정을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사람의 흔적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계단의 바로 밑에 보이는 테이블에는 누구도 있지 않았다. 하기야, 이런 곳에 초병을 세운다고 해도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누구도 오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는데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황상, 흑마법사가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사람의 온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타오르는 초. 양피지에 이것저것 끄적인 흔적과 체스판을 비롯한 돌로 깎은 말들까지. 주사위도 있었고, 시간을 보내기에 필요한 것이 가득했다. 하지만 의자가 하나인 것을 보니 혼자서 경비를 서는 듯했다.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지.’
테이블을 훑던 드낙은 귀를 기울였다.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때문이었다. 남자는 짐승처럼 거칠게 헐떡이고 있었고, 여자는 교성을 냈다. 발을 옆으로 기대어서 움직이는 〈십년일보(十年一步)〉를 통해서 소리 없이 움직였다.
유령처럼 소리가 안 들렸기에 되려 드낙의 심장이 뛰었다.
‘유령이 된 기분이다.’
이 기술을 얻기 위해서 십년을 단련하고, 수십 년의 경험이 쌓인 순찰자의 허망한 죽음이 실로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드낙은 비틀리고 흉험한 미소를 지었다.
테이블의 반대편에 있는 옆방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성행위를 하는 소리는 매우 컸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들킬 일이 없다는 것처럼 거침없이 뒹굴고 있었다.
드낙은 혹시나 싶어서 방의 내부를 살폈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동굴의 습기를 지우기 위해서 화덕도 하나 마련되어있었고, 침대까지 있었다.
‘여자···’
쇠사슬로 한쪽 팔과 다리가 묶여있었다.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항을 포기한 듯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서 몸을 내어주고 있는 듯했다.
“헉! 헉!”
드낙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남자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상체까지 앞뒤로 흔들면서 쾌락에 젖어있었다.
놈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드낙의 장궁에 걸어져 있던 화살이 쏘아졌다. 정확하게 목뼈를 노리지는 않았다. 혹시나 못 뚫는다면 놈은 고함을 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목뼈의 바로 옆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단번에 피가 목 안에 차올랐다. 목젖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꿀떡 꿀떡 피를 삼키면서 덜덜 떨었다.
주르르륵!
그 피가 흘러내려서 침대에 있는 여자에게 묻기 전에 드낙이 내달렸다. 놈의 뒷머리를 손으로 잡고 투척 단검을 찔러 목 옆을 다시 한 번 뚫었다. 그리고는 남자를 뒤로 밀어내고, 여자를 덮쳐서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하세요.”
“흐으! 흐흐흡!”
여자가 크게 놀라서 전신이 덜컹거리듯이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십여 초가 지난 다음에 드낙이 풀어주었다. 이불의 자락으로 몸을 가렸다.
시체를 확인했다. 품을 뒤지자마자 〈흑(黑)의 양피지(羊皮紙)〉가 여러 장 나왔다.
‘목뼈를 노리지 않은 것이 유효했다.’
분명 뼈를 단단하게 만드는 흑의 양피지가 있을 수 있었다.
“열쇠는 가지고 있지 않네요. 저는 〈늑대 용병단〉의 용병단장 드낙입니다.”
“저, 어! 어어는!”
말을 하려던 여성은 이내 부들부들 떨면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딸꾹질까지 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내렸다. 드낙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자연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천을 꺼내서 여성을 닦아주기보다는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의 목을 감아 출혈을 막았다.
피냄새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화살과 단검 또한 회수하지 않았다. 이 방에 있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서 남은 피를 닦은 뒤에 다시 집어넣었다.
조용히 시간을 기다렸다.
물론 문 가까이서 대기했다. 열리면 바로 그냥 콱! 기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인내심은 채 3분이 가지 않았다.
드낙은 성큼 다시 나가서 다른 이들을 불렀다. 모두가 내려왔다.
“저 여자는 누굽니까?”
“그냥 울기만 해서 별 수 없었다. 여기서 대기해.”
하지만 이스핀은 물론이고 도렌부터 시작해서 다른 노예들도 당황함으로 가득했다. 톡 건드릴 수도 없을 만큼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상황에 말을 거는 것은 너무 큰 리스크로 다가왔다.
이러나저러나 드낙은 계속 진행했다. 지하 3층은 꺾이는 길이 매우 많았다. 또한 개인실과 어떤 특징적인 일을 하는 공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개인실로 보이는 방들은 일단 문 크기가 작았고, 나무로 되어있었다. 공방으로 보이는 방들은 활짝 열려 있었고, 흑마법사의 하수인들이 제각각 일을 하고 있었다.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
개인실 두 개를 지나서 처음 열려 있는 문을 통해서 공방을 확인한 드낙은 눈을 찌푸렸다.
양쪽 눈이 뻥 뚫려있었고, 뼈만 남은 하수인이었다. 입은 꿰매져 있었고, 펜을 든 손으로 계속해서 〈흑의 양피지〉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 수가 다섯은 되었다. 쌓여져 있는 양피지는 정말 많았다. 저렇게까지 필요하나 싶을 정도였다.
‘납치된 사람들일까?’
드낙은 코너를 돌았다. 이곳의 보안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특징적인 점이 있다면 모두 오른쪽 벽에 바짝 붙어서 움직이는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벽조차도 손을 타서 그런지 맨들맨들했고, 비교적 깨끗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그때, 세 번째 코너에서 드낙이 목소리를 듣고 멈추었다. 고개를 내밀지 못하고 듣기만 들었다. 목소리가 제법 가깝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마 통로에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언제까지긴, 스승님이 올 때까지지.”
“멍청아. 그런 스승님이 떠났는데, 다시 올 것 같냐? 밖에 나가서 소문을 들어야 해. 이렇게 계속 있을 순 없다고.”
두 사람이 다투고 있었다. 이곳을 제대로 운영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드낙은 감히 머리를 내밀지 못했다. 혹시나 모습을 들킨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이런 곳에 누가 온다고. 여기가 가장 안전해. 밖에 나간다면 되려 들킬 수 있어. 〈기사 살해〉가 실패했으니 몇 년은 여기에 지내다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거다. 전이랑 다를 바 없어.”
“제기랄. 그래도 진짜 미쳐버리겠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년의 가슴이나 좀 만져야지.”
“미친놈. 오늘 분의 일은 하고 가는 거냐?”
“일은 무슨 일. 아기가 있어야 일을 하지.”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자 드낙은 냉큼 뒤로 물러났다. 코너를 되돌아가서 눈이 뚫린 채 묵묵하게 흑의 양피지를 생산하는 자들이 있는 공방의 문으로 들어가 바로 벽에 섰다.
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왔다. 그리고 드낙은 놈의 뒤통수가 보이자마자 숏소드로 단번에 베어냈다.
“꺽.”
숨소리같이 작은 소리 하나 내는 것이 전부였다. 드낙은 발로 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곧바로 흑마법사의 하수인이 몸을 웅크렸다.
서걱.
다시 한 번 목을 베었다. 매우 철저했다. 또한 딱히 정보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까의 말로 들어봐서 그들 또한 〈스승님〉이 어디 갔는지 모르는 듯했다. 기약 없이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듯했다.
품을 뒤져서 흑의 양피지를 확인했다.
별다른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가죽 주머니에서는 마약 같은 것이 나왔다. 놈은 힘없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드낙의 거친 팔에 손을 올렸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검은 크리스탈〉.’
또한 몰래 꽁쳐놓은 것처럼 보이는 상체의 안쪽 옷감에 따로 줄로 고정시킨 가죽 주머니를 확인할 수 있었다. 크리스탈 중에서는 파손된 것도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드낙이 놈의 입을 투척 단검으로 벌렸다. 이빨 사이사이에 검은 조각 같은 것이 끼어있었다.
‘먹어서 효과를 얻어내는 것 같네.’
“으으. 으음응.”
쓰러지는 소리에 양피지를 만들던 희생자들이 입에서 소리를 냈다. 청각을 듣는 것은 가능한 자들로 보였다. 하지만 드낙은 벌써부터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동했다.
〈두번째 공방〉은 기도실이었다. 〈악마 아카타베루〉의 우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 밑에 무릎을 꿇기 좋은 푹신한 방석이 깔려있었다. 중앙에 있는 우상을 기준으로 12시 방향 끝에는 아기들의 목이 줄줄이 베어져서 장대에 걸려있었다.
장대에 머리만 걸린 아기들의 입이 꿈실꿈실 거렸는데, 정말로 기괴했다. 결코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기도실은 크게 조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특히나 혼자 있을 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세번째 공방〉은 〈검은 크리스탈〉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것으로 끝으로 드낙은 통로의 끝에 도달했다. 그곳은 아래로 푹 꺼져서 계단이 있었는데, 아주 큰 원탁이 놓여 있고, 부채꼴로 생긴 벽에는 문이 여럿 배치되어있었다.
‘끝이 없네. 대체 어디까지 있는 거야?’
그리 생각한 드낙은 계단을 거침없이 내려갔다. 원탁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놓여 있는 것도 없이 깨끗했다. 곱게 접혀진 붉은색의 실크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네. 일단은 돌아가는 것이 좋다.’
문고리를 아주 천천히 돌려본 드낙은 잠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며시 다시 역으로 돌린 뒤에 손을 놓고는 서둘러 되돌아갔다. 그의 움직임은 매우 은밀했다.
다시 되돌아갔을 때 여자는 울음을 그치고 제법 진정해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따뜻한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왔습니까. 대장.”
“그래.”
이스핀의 깍듯한 말에 대충 대답하며 눈이 여자에게로 향했다. 선명할 정도로 황금색인 금발에 연두빛의 눈동자. 강렬한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미인(美人)이었다.
”좀 진정되셨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자세히 보지 못할 때는 몰랐는데, 눈매가 제법 날이 서있었다. 진정한 모습으로 봤을 때, 여자치고는 근육이 다부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라 반팔 반바지밖에 없어서 팔뚝이 보였다.
‘검으로 입은 상처까지.’
“용병입니까?”
“···아니요. 제 이름은 〈이실레아 브릴리언트〉. 브릴리언트 가문의 기사입니다.”
드낙은 그 말에 입을 헤하고 벌렸다.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스핀은 그녀가 펑펑 울 때, 껄떡거리기까지 했다. 몸매는 물론이고 이불 때문에 보이지 않아도 일단 황금색의 금발과 새하얀 피부 때문에 코까지 벌름거렸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스핀이 무릎을 꿇었지만 이실레아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입었던 상체를 들춰서 배를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선명하게 검은색의 뭔가가 그려져 있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흑마법사가 저에게 새긴 흑마법입니다. 이 마법 때문에 저는 힘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고, 기술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문양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나마 원이 많았고, 그 원을 꿰뚫는 것이 공통된 그림이었다. 그 외에는 자잘하게 뭔가가 많았다. 원을 꿰뚫는 선은 팔과 다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낙은 그녀의 말에 물음표가 계속해서 생각났다.
가장 큰 의문은 대체 어떻게 기사를 납치할 수 있었냐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에게 있어서 기사는 말 그대로 자연재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사라면 흑마법사가 1층을 소각시키고 나선 데려갈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만큼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이실레아가 눈을 찌푸렸다.
“절 의심하는 겁니까?”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기사가 어떻게 흑마법사에게 생포를 당했습니까?”
드낙의 말에 이실레아는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기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전신갑주만 있었으면··· 이렇게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예? 아! 자유기사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드낙은 고개를 납득했다. 전신갑주가 없다면 제대로 함정만 판다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경우에는 그래도 늑대나 노예들이 있었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홀로 다니는 자유기사는 흑마법사의 힘과 함정 그리고 음흉함으로 어떻게 할 수 있어 보였다. 특히나 여자 기사의 경우에는 단련을 해도 남자와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신체적인 이유 때문이다.
“근데 생포한 이유가 뭡니까?”
“제 가문의 비전을 노렸습니다. 물론 갈비뼈를 들춰서 심장을 손에 쥐고 협박해도 말하지 않겠다고하니 이렇게 노리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말에 이스핀이 괜히 움찔했다. 말하는 것에 그야말로 독기가 풀풀 풍겼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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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참 가즈아!!! 6천자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