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9 <-- 추적 -->
〈야수 기사(Beast Knight)〉, 〈그라돈 토치라이트〉가 출정을 위해 성문 앞에 있었다. 횃불 성채는 전투 요새이면서도 평지에 세워진 성채였기에 성문의 숫자는 4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앞으로 고꾸라져도 비교적 안전한 남문으로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계획을 잡았기에 그라돈 또한 남문에 있었다.
가장 많은 유동 인구가 남문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야말로 대기줄이 줄줄 이어져 있었지만 병사는 누구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에 순찰복을 입고 있는 백발의 순찰자들은 서로 웃기 바빴다. 옛날 생각이 부쩍 났기 때문이었다.
오직 〈남부 왕국〉을 위해서 산맥을 지키는 것이 순찰자였다. 제국에서는 이미 폐지된 직책이기도 했다. 기사가 적을 죽이는 검이라면 순찰자들은 적의 침입을 알리는 파수꾼이었다.
“으-! 하!”
소리를 지르며 성채 근위병이 토치라이트 가문의 깃발을 높이 세워올렸다.
성채 근위병들이 몇몇 동원된 조촐한 출정식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구경을 올 정도였는데, 수많은 의식에 돈을 그리 많이 안 쓰는 성주 울베인 토치라이트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울베인 성주였다.
너무 많은 이들이 구경을 왔기 때문에 병사들은 빳빳하게 굳어있었다. 작은 의식조차도 너무 자주 확인해서 눈밑이 검게 변한 경비대장과 수비대장이 보였다. 수비대장이 퇴근을 안 했는데 경비대장이 퇴근을 할 리가 없었다.
“들으라! 메디오인들이여! 북부의 시민들이여! 용감한 붉은 요새의 후손들아!!”
상투적인 말로 연설을 크게 소리를 내어 말한 성주에게 시민들이 호응을 했다. 사전 조사단이라 이름 지어진 자들은 횃불 성채의 영향력이 적은 곳으로 향할 것이다.
성주가 그라돈에게 다가왔다. 옷새무새를 다듬어주며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할 말을 했다.
“결코 검을 뽑아서는 안 된다. 드낙 자유기사의 행동력은 보통 이상이고, 거침이 없다. 이번 일에 많은 돈이 투입되었다. 다섯의 늙은 순찰자를 고용하는데 총 은화 250닢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아라.”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공을 탐하지 말라. 자극하지 말고.”
“몇 번이나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또한 머리가 돌아가면 부드럽게 다가가는 토치라이트 가문을 감히 강하게 내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라돈의 말을 들으며 성주가 깊게 그를 껴안았다.
‘운이 놈에게 계속해서 들러붙어있다. 조용히 이 일이 마무리되었으면 하는데.’
서로 낭떠러지를 향해 달린다면 드낙은 정말로 뛰어들 놈이었다. 서로 부딪쳐서 피가 나더라도 이득을 챙길 놈이었다. 그리고 운이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하는 의뢰마다 굵직하고, 귀족과 연을 닿은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게제라스는 변장까지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톱을 잘근 씹었다.
‘이런 미친. 순찰자까지.’
불안감이 가득했다. 사실 귀족과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려는 미친놈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고, 추측으로 일관된 계획을 짤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항상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돈을 크게 모으는 습성이 강한데, 이번 일에 은화 250닢. 한화로 2억 5천만 원을 쏟아부은 것이다.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섬뜩함도 들었다.
‘전신갑주를 주는 것보다는 저렇게 해서 찾아내는 것이 싸다고 생각하고 결단을 내린 것이구나.’
귀족이 보여주는 행동력 또한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고작 자유기사를 상대로도 2억 5천을 쏟아붓고, 정규군 10명에 기사까지 동원했다.
‘그라돈 토치라이트. 공에 크게 집착하는 자가 아닌가. 흑마법사의 소문이 돌자마자 어느새 도착했구나. 내가 그걸 생각하지 못하다니.’
그라면 시민 몇 백 명이 죽든 말든 흑마법사 소리에 미친 듯이 횃불 성채로 되돌아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도 야밤을 틈타서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온 것이다. 귀족들의 기사는 대부분이 밖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6두마차를 이끌고 돌아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큰일났구나. 이를 어찌한다.’
드낙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게제라스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으며 일이 잘 풀리기를 운에 맡겨야 했다.
“출저어어엉!”
수십의 무리가 밖으로 향했다. 우레와도 같은 그라돈의 외침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을 대신해서 피를 흘릴 자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또한 돌아올 때에는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가 퍼질 터였다.
큰 기대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전의 경우에는 토치라이트 가문의 공작으로 인해서 내부로 갈등이 타올랐다. 〈지역신전〉과 〈빛의 전령〉 사이를 두고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횃불 성채에 거주하는 성기사와 사제들은 특히나 시민들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을 떠돌던 성기사와 사제가 모이면 빛의 전령이 어찌 되었든 이기겠지만 그전까지는 끙끙 앓을 것이다.
길목 곳곳에 진지가 세워지고, 보다 먼 곳으로 순찰대가 돌기 시작했을 때부터 드낙은 횃불 성채가 움직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까악!”
제법 안쪽으로 들어온 그라돈의 수색대를 본 검은색의 까마귀가 나뭇가지에서 부리를 고르다 말고 소리를 한 번 내지르며 날아올랐다. 다른 까마귀보다 주먹 하나는 큰 놈이었다. 그것을 멀리서 보지는 못한 늙은 순찰자는 까마귀 소리에 괜히 입을 삐쭉 내밀었다.
“재수없게.”
검은 까마귀 카이야는 거침없이 숲을 지나 산을 넘고, 계곡 사이를 경유하여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능숙하게 나무속으로 다시 들어가 드낙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깜짝이야.”
그리곤 다시 땅에 내려앉아서 양 날개를 쫙 펴서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걷는 시늉을 했다.
‘추적! 올 것이 왔구나. 오지 않기를 원했는데, 이렇게 쉽게 공을 내어줄 수는 없다는 것인가.’
가만히 있어도 거래를 할 것이라 토치라이트 가문이 신전을 막아주고 기다리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그것이 부서졌다.
“단장님?”
이스핀의 말에 드낙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모두가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낙은 거침없이 말했다.
“추적대다. 전투 노예들을 잘 살펴라. 전투는 벌어지지 않겠지만, 알려준 흔적 지우기를 최선으로 다하라.”
“예!”
드낙은 정보를 거침없이 전투노예들에게 말해주었다. 그것조차도 다스리지 못한다면 부대장 노릇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이스핀과 도렌에게 주어지는 시련이기도 했다. 그리 위험한 시련은 아니었다.
전투 노예들은 생각보다 늑대 용병단에서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뒤적뒤적.
드낙은 품에서 가죽과 철판을 꺼내서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카이야는 거침없이 철판을 부리로 쿡하고 쑤셨다.
‘용병이 아니군. 정규군인가.’
카이야는 철판을 처음에는 골랐지만 이내 다시 가죽도 부리로 쪼았다.
‘응? 혼합인가.’
드낙은 그 모습에 정규군과 용병이 혼합된 추격대가 결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깊게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지체할 수 없다.’
쏴아아-!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폭포소리가 드낙의 귀로 들려왔다. 하지만 드낙은 그 반대편으로 향했다. 늑대 세 마리를 데리고 홀로 움직일 준비를 했다.
“먼저 의심 지역으로 향해 있어라. 불은 절대 피워서는 안 된다. 피우고 싶다면 강도단을 토벌할 때처럼 나무의 속에 구멍을 내어서 피워라.”
“예!”
이스핀은 드낙이 홀로 가려고 하자 서둘러 달려와서 명령을 들었다.
‘카이야만으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추적대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수립해야 앞으로의 일에 대처할 수 있어.’
드낙이 숲으로 들어갔다. 카이야가 거침없이 어깨에 올라왔다. 매번 잠만 자는 카이야였지만 최근에는 수면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고, 꼬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드낙도 잘 몰랐다.
까마귀 카이야로 시작되는 정보의 우위는 극단적으로 서로 간의 격차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순찰자라도 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때에는 많은 곳을 보고 확인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드낙은 적이 어딨는지를 알고 있었다.
8시간 동안 집중력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하는 늙은 순찰자와 일부 지역에서 확실하게 있다는 것을 알고 단시간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집중하는 드낙. 그리고 늑대의 후각까지 합친다면 승부가 어찌 될지 눈을 감고도 말할 수 있었다.
‘······찾았다.’
드낙은 그라돈의 추격대를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히 돋보이는 것은 전신갑주를 입고 선두에 선 그라돈 토치라이트였다. 무기는 클레이모어에서 검폭이 크게 늘어난 중검(重劍)이었다.
척 봐도 검면으로 한 번 휘두르면 회피를 해도 맞을 정도로 검폭이 넓었다.
‘찌르기는 못하겠는걸.’
드낙은 수풀에 몸을 숨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라니. 게제라스의 예상이 틀렸다.’
분명 그는 기사가 오지 않을 것이라 당부를 했었다. 하지만 기사가 동원되었다. 크나큰 착오였다.
‘이대로 밀고 가야 하나?’
갈등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토치라이트가 이번 일에 자원을 크게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라돈이 있는 것은 흑마법사 거처에 대한 공 때문에 온 것이지만 드낙은 자신을 쫓기 위해서 온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한 번 감아서 일단 모든 판단을 뒤로 미룬 드낙은 당초 처음에 하려 했던 것을 쭉 이어나갔다.
‘다른 자들은···’
정규군으로 보이는 병사가 10명. 그라돈과 함께 앞서 나가는 로브를 치렁치렁 입은 자가 두 명이었다. 수염이 새하얀 것을 보니 제법 나이를 먹은 자였다. 또한 로브를 입은 자들은 장궁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보통 궁수들이 사용하는 화살통의 세배는 되는 큰 화살통을 짊어지고 있었다.
‘순찰자군.’
그때 드낙의 바로 앞으로 아주 가까이 가죽 갑옷을 입은 백발의 순찰자가 쓱 하고 스쳐 지나갔다.
“······”
드낙은 결코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몸이 굳지 않았다. 그가 거쳐온 위기와 실전경험은 결코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딱딱하게 얼어붙게 만들지 않게 해주었다. 생각하지도 않은채 본능적으로 드낙의 몸이 움직였다.
우악스러운 손이 아래에서 위로 뻗어나가며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늙은 순찰자의 아래턱을 올려쳤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끝이었다. 소리 하나 내지 못한 늙은 순찰자가 뒤로 넘어지려 했지만 드낙의 다른 손이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아래턱을 올려친 손이 목을 움켜잡아 확실하게 잡아당겼다.
뚜득!
그다음에는 머리가 돌아가며 목뼈가 선명하게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쓰러지지도 못한 채 드낙에게 안긴 늙은 순찰자를 껴안은 채 뒷걸음질 치며 바닥으로 서서히 넘어진 드낙은 그를 확인했다.
‘소리 없이 걸어 다니다니, 엄청난 실력자다.’
그 기술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이런 험지를 걸어왔을까? 생각만 해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방심해서 움직임을 보였다면 들켰을 것이다.
피는 나오지 않게 죽인 자였기에 조용히 내려놓는 사이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유인의 시작.’
진득한 노린내가 반대편에서부터 불어왔다. 드낙에게는 늑대가 함께하고 있지 않았다. 늑대는 드낙의 반대편에 있었다.
‘음?’
늙은 순찰자가 오랜만에 숲으로 와서 더욱 촉촉해진 코로 늑대들의 노린내를 맡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짐승의 역한 냄새였다.
삐이이이익! 삑! 삐이익!
입에 문 호루라기가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움직였다. 길게 부는 것은 적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고, 짧게 삑하고 울린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조금 긴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이라는 걸 말했다.
바로 늑대였다.
“어디냐!”
그라돈이 거침없이 호루라기가 불어진 곳으로 움직였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삼삼오오 갈라지며 그라돈의 좌우를 맡았다. 그야말로 피땀이 서려있는 숙련도를 보여주는 진형 변경이었다.
창이 앞으로 세워지고, 나무를 만나면 뒤로 일보를 움직인다. 곁눈질로 옆에 병사가 사라지면 보폭을 줄였다. 그라돈의 좌우로 갈라진 병사들 중 1명씩 차출되어서 후방을 맡았다.
‘무슨 움직임이 이런 숲에서도 저래?’
드낙이 혀를 내둘렀다. 나무를 지나도 단단해 보였다. 순간적으로 가장 앞에 선 병사는 보폭을 짧게 했기에 느려지면서 좌우를 고개를 돌리며 픽픽 보는 것이 드낙에게 보이기도 했다.
끔찍할 정도로 정예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싸우는 것이 겁이 날 정도로 하나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병사들 자체가 진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왕국 야영지〉에서의 병사들보다 더 훈련도가 높은데.’
성이 든든하게 받쳐주었기에 훈련을 더욱 빡세게 하는 것이 횃불 성채의 정규군이었다. 대신 실전을 많이 경험할 수 없다는 흠이 있었다.
========== 작품 후기 ==========
6037자
병사들 : 아아, 이것이 바로 정규군이라는 것이다. 험지에서도 명령 없이 진형을 알맞게 변형하지. 물론 움직이면서도 유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