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6 <-- 추적 -->
문 밖에서 벽에 기댄 채로 대기하던 총관 베르벤이 일어났다. 그는 골반이 뒤틀어지고 난 뒤로 가만히 서 있는 것을 힘들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총관! 이스핀과 도렌 부대장에게 노예들을 출정 준비하도록 말하세요. 따로 짐수레에는 하루치의 식량만 놔두시오. 준비가 되면 곧바로 성문에서 대기하라 전해주시고요.”
“예!”
대답만 하고 곧바로 가려는 총관을 드낙이 붙잡았다. 명령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병사 생활 때문에 〈이유〉를 몰라도 움직이는 것이 베르벤이었다.
“훈련을 하러 가는 것뿐입니다. 물론 며칠 걸릴지는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백인장의 경험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하루치 식량을 준비하면서 며칠 걸린다? 뭔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귀족과 신전의 방문한 이유일 것이다.
‘결단을 크게 내리셨군.’
드낙은 곧바로 〈만물 잡화점〉 여주인 소레에게 향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드낙은 제법 큰 손님이었다. 횃불 성채에서 활동하면서 대부분의 물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매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아처럼 소레의 인맥 혹은 연줄이 닿은 사람을 고용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최근 소레의 자존감은 크게 높아져 있었다. 특히나 드낙은 화폐로만 거래하는 VIP 중의 VIP였다. 화폐로 거래하면서도 크게 할인을 안 해줘도 수긍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소레는 좀 위험할 수 있는 이번 일에 거침없이 수긍해줘야했다.
'물론 완화할 수 있게 돈도 크게 더 줘야겠지.'
드낙이 괜히 소레에게 잘해준 것이 아니었다. 유독 그녀에게서 물건들을 구입한 것은 편하기도 편했지만, 다르게 쓰고 싶어서였다.
“아는 상단이 없냐고? 당연히 있지. 근데 왜?”
거침없이 반말을 하는 여주인 소레에게 드낙은 깍듯하게 대했다. 만물 잡화점은 그 특징상 발이 넓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도와줬으면 해서요. 30명이 먹을 식량 한 달 치를 성문 밖 500걸음 떨어진 길에 배달해주셨으면 합니다.”
“엥? 그곳으로?”
“예. 못해도 내일까지는 해주셔야 합니다. 가능하십니까?”
“어렵지는 않지. 하루 거리도 아니고, 금방인데.”
소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을 오물거렸다. 드낙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묻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드낙같은 고객을 잃기가 싫어서였다.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믿을만하고 오래 함께한 상인을 이용해주세요.”
“걱정 마. 근데···”
그녀가 웃어 보이자 드낙이 가격을 치렀다.
“요즘 밀 시세가 어떻게 됩니까?”
“원래는 열다섯 닢인데, 여름이라 상인들이 열일곱 닢에 팔아.”
30명 먹을 밀을 많이 쳐줘봤자 동화 500닢이 안 된다. 20kg 한 포대에 17닢이었다. 밑에 사람들이 얼마나 열악하게 노동력을 제공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상인에게 돌아갈 마진을 생각하면 실제로 주변 농가에 동화 10닢이라도 쳐줬을지 의심스럽다.
‘돼지고기까지 하면···’
넉넉하게 고기를 사야 했다. 육포로 구매해도 은화 1닢은 줘야 할 것이다. 야채와 기타까지 생각한다면 은화 3닢 미만.
드낙은 은화 4닢을 건넸다.
“상인에게 입막음용으로 주세요. 아니면 짐꾼을 여럿 고용해서 흔적을 더 적게 만드셔도 돼요.”
소레가 드낙의 편을 들었다. 은화 4닢에 눈이 고정되어있었다.
“상단보다는 상인 하나랑 짐꾼 여럿을 고용할게. 그게 나을 것 같네. 잘 아는 보부상이 어제 돌아왔거든. 은화 하나 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사람이야.”
그리고 드낙은 은화 1닢을 하나 더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소레의 앞으로 쑥 밀어주었다. 동전과 나무가 마찰되는 소리에 소레가 히죽 웃었다.
“이건 우리 여주인님을 위해서.”
짝!
손뼉을 치며 소레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드낙을 껴안으면서 방방 뛰었다. 워낙 체격이 좋고 살이 쪄있는 소레라서 드낙이 휘청거렸다.
‘켁!’
소리를 지르는 소레를 진정시켰다. 아줌마가 주책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
‘할 때는 확실하게.’
돈이 미치도록 많은 것이 드낙이었다. 특히나 이스핀과 도렌을 급여제로 완전히 돌리면서 드낙의 용병단 재정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커져있었다. 무엇보다 드낙 홀로 쥐고 있는 금화가 많았다.
또한 돈만큼 사람을 발 빠르게 움직일 만한 것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갔음에도 이스핀과 도렌 그리고 노예들과 늑대들은 벌써 성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노예 20명과 늑대 15마리였기에 제법 규모가 있었고, 경비대장까지 밖에 나와있었다.
“드낙 용병단장!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이오?”
“훈련을 위해서 밖으로 나갑니다.”
이미 검문을 했음에도 드낙이 오자 〈경비대장 세베긴〉이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상황이 상황이지 않소? 정말로 훈련을 하러 가는 것이 맞소?”
“제가 무슨 거짓을 말합니까? 짐수레를 보셔도 하루치 식량 밖에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세베긴이 고개를 자연스럽게 끄덕였다. 그리곤 말했다.
“이제 해가 져버리는데 훈련을 왜 밤에 하시오?”
“날씨가 무더운 것은 물론이고, 지금은 〈늑대 용병단〉이라 말해지지만 그전에는 〈추적 용병단〉이라 이름을 썼습니다. 야간 이동은 필수적으로 익히게 할 생각입니다.”
그 말에 세베긴은 인상을 찡그렸다.
‘용병답지 않게 훈련은 무슨 훈련. 빌어먹을.’
세베긴은 늑대 용병단을 밖으로 보냈다. 드낙은 거침없이 당당하게 밖으로 나갔다. 이스핀과 도렌은 아무것도 몰랐기에 자연스레 연기가 되었다. 물론 석연찮은 부분이 확실히 있었기에 얼굴은 조금 굳어있었다.
밖으로 나오고 그대로 가도를 걷고 횃불 성채에서 제법 떨어지고 나서야 이스핀과 도렌이 드낙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드낙은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스핀의 말에 드낙이 간결하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청나게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문인의 말을 믿는 겁니까? 일은 얼마든지 비틀어질 수 있지 않습니까.”
이스핀의 말에도 드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끊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을 거부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것이 확실하게 게제라스의 입으로 드낙에게 전해졌다.
그때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만약 되돌아간다면 추궁을 받고 결국 횃불 성채를 떠나게 될 거다. 혹은 토치라이트 가문의 일을 무료로 몇 가지나 해결해줘야 할지도 모르지.”
“하아.”
이스핀은 한숨 쉬면서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비전을 배우면서부터 드낙과 함께 하기를 결의했기 때문이다.
인근의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은신처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노예들은 각자 무구를 짊어진 채 움직였다. 모두 오랫동안 지하실에서 혹은 밖의 쇠창살에서 지냈기 때문에 체력이 형편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드낙에게 오고 나서 먹고 기초체력을 높이는데 집중했기에 산을 타면서 토하거나 크게 지치는 자는 없다는 점이었다.
“정지! 휴식한다!”
노예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았다. 드낙은 다시 되돌아가 흔적을 지우며 다시 올라왔다. 이스핀과 도렌도 마찬가지로 흔적 지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헉, 헉! 대장님. 어차피 내일도 그 짐을 인수받으러 와야 하는데 꼭 이렇게 흔적을 지워야겠습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확실하게 해야지. 또한 이것도 수련이다. 숙달해.”
성채에서 살았던 이스핀과 도렌에게 흔적 지우는 사냥꾼의 수법을 알려줬지만, 제대로 숙달시키지는 못했다. 이번 기회를 살리기 위함이다.
그들이 나무와 수풀로 사라지자 노예 중 몇몇이 주위를 괜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도망갈 생각 하나 하지 못했는데, 늑대들 때문이었다. 특히 갈색 늑대 도노는 몸길이만 따지면 성인만 했다.
쩌억.
입을 벌리며 산행이 지겨운지 하품도 하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특히 조금만 움직여도 괜히 시선을 주었다.
노예들은 휴식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사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고, 지낼만했다.
끔찍한 물고문과 남색을 즐기는 그 개 같은 노예 상인에게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몇몇 팔리지 않는 소년들이 탈장을 겪고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해 죽어 수레에 짐짝처럼 실리던 것을 본 것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배 터지도록 뭔가를 먹은 것도 이곳이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힘! 수련을 통해서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달성감 또한 느끼고 있었다.
‘도망만 치지 않으면 나중에 집도 가질 수 있다고 약속해주었다.’
또한 개개인이 면담을 가질 정도로 드낙은 노예들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하면서 제법 인자한 모습도 보였다. 물론 그것 또한 노예들이 자신에 대해서 막힘없이 말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노예들에게 보이는 드낙의 모습이기도 했다.
횃불 성채에서 1.5km은 떨어진 곳에 있는 자연동굴을 기지로 삼았다. 20명의 노예와 늑대 15마리가 있기엔 충분했다. 휴식을 가지고 난 뒤에는 드낙은 하나하나 명령했다.
“난 늑대와 함께 주변 정찰을 하고 오겠다. 이스핀 부대장은 목책이나 울타리를 만들고, 도렌은 은폐를 준비해라. 뭐 따로 같이하던지 편한 대로 일하고.”
“예!”
이스핀은 노예들을 관리 감독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도렌은 이것저것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사실 노예를 이렇게나 가까이서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한 적이 이번이 처음이라 도렌은 그냥 평민 다루듯이 친하게 지내는 면이 있었다.
드낙은 주변을 정찰했다. 늑대들이 코를 킁킁거렸다.
‘역시 횃불 성채라서 그런지 주변에 야수 하나 없네.’
지나치게 조용하지는 않았다. 동물은 확실히 많았지만 야수라고 말해질 정도로 강력한 동물은 없었다. 성채에 있는 거대한 횃불에서 때때로 몬스터를 끌어들여 크기 전에 죽이기 때문이었다.
그 주기는 대체로 격달에 한 번 혹은 반년에 한 번이었다. 아직 드낙은 그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엔토르챠(Antorcha, 모순의 횃불)〉라고 불리는 마법 현상.
숲과 산 그리고 평지가 다채롭게 섞여있는 횃불 성채는 실로 흑마법사가 거처로 삼기에 좋았다. 짧은 정찰을 통해서 위험 요소는 없다는 것을 확인한 드낙은 물을 찾았다. 장마가 지나서 무더위는 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름이었다.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고 드낙은 되돌아와서 일을 거들었다.
“아! 오셨습니까!”
“그래. 주변은 조용하더라. 아직도 덜 만들었어? 도렌은?”
“동굴 입구가 커서 넝쿨을 더 가지러 갔습니다. 노예 다섯을 데리고요.”
그 말을 들으며 드낙이 직접 나무를 패자 이스핀도 도끼를 손에 쥘 수밖에 없었다.
“후!”
땀이 비질비질 흘러나왔다. 작업을 마치고 계곡물이 따로 갈라져 흐르는 작은 옹달샘의 물을 퍼올려서 몸을 씻었다. 밤이 내려앉았기에 횃불이 지펴졌다.
“어엇!”
길 없는 곳이었기에 횃불로 주변을 밟혔음에도 헛디디는 노예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직접 물을 엎어씌워주며 드낙이 미끄러지는 노예를 보며 웃음소리를 냈다. 왠지 군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물기를 닦지 않고 그대로 동굴로 향했다. 벌레를 쫓기 위해 검은 연기를 가득 뿜어내는 살아있는 잎을 많이 얹어놓은 작은 모닥불이 곳곳에 있었다. 도렌이 벌레를 극단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푸풋!”
바람이 가끔 역으로 불때는 동굴로도 연기가 들어와서 안개처럼 변할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 많이 지폈어?”
“죄, 죄송합··· 콜록!”
도렌이 눈을 찌푸리며 기침 소리를 냈다. 결국 10개의 작은 모닥불 중에 반절에 있는 불씨를 밟아서 꺼버렸다. 이스핀이 말리지 않은 이유는 분명 재밌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20대도 안 된 이스핀과 도렌이었다. 〈늑대 용병단〉에 적응하고나자 장난기가 조금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5525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