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5 <-- 백수 게제라스 -->
드낙은 〈백수 게제라스〉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대해서 물어야 했다. 자신보다 뛰어나다면 바로 그것을 채택할 마음도 가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직까지도 그가 주관이 너무 뛰어나다는 것을 비판하고 싶기도 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이렇게 찾아와서도 먼저 이야기를 그냥 진행시키는군.’
분명 뛰어났지만 기분이 조금 나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칠 수는 없었다. 게제라스의 생각은 실로 지금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출세하고 싶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지 않다면 드낙이 이런 아귀 잔치가 벌어지는 곳인 〈횃불 성채〉에서 용병단을 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대 25명이 살아갈 수 있는 〈용병 기숙사〉의 1층 집무실에서 나무 창문을 한 번 힐긋 보며 게제라스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서로 조용히 술만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서로가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면서도 말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게제라스 스스로 자신을 조정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거침없는 주관은, 위와 아래를 나누는 계급에 균열을 나누는 불안의 씨앗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와도 같은 사이라도 불안의 씨앗은 그 바위를 부수고 균열을 키워 나갈 것이다.
그런 주관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안목을 주고, 방향성을 거침없이 제안하며 독하디 독한 현실을 드낙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지만 때로는 마시기 힘들 정도의 독주(毒酒)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드낙 용병단장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죠. 그 누추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말입니다. 제 이 거침없는 행동거지를 고치지 않는다면 절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보던지 거침없는 직언을 하는 게제라스는 다루기 힘든 자였다. 그런 자를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고생할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드낙은 앞으로도 세력을 크게 일굴 것이기 때문에 특히나 경각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자신에게도 크게 반박하고 여기저기 마음에 안 들면 끼어들 것이 분명한 성격이었다.
“아직도 그 성격이 보이는 것이, 보상에 대해서 이미 정해놓듯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오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저도 제 성격을 알고, 제 기질을 몇 번이고 깨달았지만 그것을 고치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한 가지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드낙 용병단장님이 바로 저의 장치입니다.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제 생각이 퍼져나가게 하십시오. 그리한다면 제가 다른 이들에게 쓴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드낙은 조용히 게제라스를 바라보았다.
“후우··· 결국 다른 이들에게 뭐라고 한다는 소리 아닙니까?”
“성격이 튀어나오는 것을 어찌 막겠습니까? 하하하.”
능글맞게 넘어가려고 했지만 드낙은 그렇게 매듭짓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에게 쓴소리를 하고 참견하기 전에 항상 나에게 먼저 말하시오. 하더라도 내가 하게 그러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안 된다면 계속 벌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끙.”
이미 좋은 것을 먼저 줬음에도 드낙이 완고하게 나오자 게제라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드낙이 자신의 생각에 크게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하는 것을 보니 분명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나본 듯했다.
테이블에 손가락을 꾹 눌러 비비다가 게제라스가 머리를 긁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드낙은 아예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확실하게 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지금이 아니라면 게제라스가 보여주는 머리 때문에 함부로 그를 대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초장에 잡아야 한다.’
“좋습니다. 하지만 저도 저 나름대로의 꿈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확답을 주신다면 제 성격을 죽이겠습니다.”
“뭡니까?”
“제국에서 말해지는 〈내정관〉이 되고 싶습니다.”
드낙은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체계입니까?”
“행정과 내정에 관련된 강력한 힘을 가진 직책입니다. 영주가 가진 권리를 떼어내어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게제라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결코 드낙에게 손해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귀족의 힘을 칼로 베어 가져가는 것이기에 〈남부 왕국〉에서는 꿈도 못 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게제라스가 내청에 못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성격도 성격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귀족의 것을 탐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흠.”
드낙은 고민했다. 그것은 내정관을 시켜주고 말고가 아니었다. 바로 게제라스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게제라스, 당신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행정과 내정을 가진다면 그것만큼 큰 힘이 어딨습니까?”
“군사력만 쥐고 계시다면 능히 견제가 가능하십니다. 정치에 손을 떼겠습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드낙은 그럼에도 게제라스를 당분간이라도 가지고 있고 싶어졌다. 그가 지금의 위기에서 말한 방법은 큰 이득을 그에게 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용할 만했다. 그가 자신을 이용하려 하는 것처럼.
“그 말이 아닌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그런 큰 힘을 나중에 내어주고 당신을 신뢰하느냐 이 말입니다.”
게제라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고민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믿어달라는 말 한마디로 어떻게 신용을 쌓겠습니까. 그저 시간을 통해서 깨닫게 해달라고 하기에는 제가 내정관을 할 날은 30년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게제라스 또한 드낙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국으로 가서 내정관을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나라가 다르면 타인이 되고, 지방이 다르면 타인이 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국가가 다르면 결코 내정관이 되지 못합니다. 한다고 하더라도 그저 작은 마을 몇 개를 다루게 될 뿐이지요. 저는···”
게제라스가 뒷말을 삼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스스로가 알기 때문이었다. 이에 드낙은 게제라스의 욕심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 또한 출세욕이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성을 두 개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성의 내정관은 게제라스, 그대에게 주겠소. 물론 그곳의 성주는 또 다른 사람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드낙이 받아서 더욱 진행시켰다.
“··· 너무 먼 날의 얘기 아닙니까? 성 두 개를 먹으려면 아주 발에 땀이 나도록 달려야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제라스는 적어도 드낙이 성 두 개를 먹고 싶어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횃불 성채〉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출세욕이 제법 있다는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려주는 것은 신용의 첫걸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부드럽게 넘어가려고 애를 썼다.
“계약서는 쓰지 않겠습니다.”
“구두 약속이라도 감사합니다.”
“만약 이번 일이 끝나면 왜 북동쪽의 척박한 곳으로 가야 하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말씀을 낮추십시오. 오늘부터 저는 드낙 님의 부하입니다. 드낙 님께서 스스로의 가문명을 세상에 알리는 순간 제가 드낙 님의 첫 번째 가신이 되겠습니다.”
“알겠다. 게제라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거침없이 충성을 맹세했다. 드낙 또한 거기에 맞춰주었지만 결코 이 말뿐인 오늘만으로 그를 깊게 신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제라스의 기질과 성격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은 일단은 그렇게 매듭이 지어졌다. 그저 겉으로만 이루어지는 동맹이었다. 하지만 서로가 각자 하나씩 자신의 약점을 서로에게 건네준 것이기도 했다.
드낙은 거친 출세욕을. 게제라스는 〈내정관〉이라는 제국의 체계를 서로에게 보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신뢰는 마련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까의 말씀에 다시 대답하자면, 북동쪽의 땅은 메디오 지방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땅으로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근본이 확실하지 않은 자도 공만 있다면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으로 향해야 한다?”
“예. 그곳에서 장원이나 땅을 얻기 위해서는 귀족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토치라이트 가문이 가진 영지는 남부에도 있고, 북부에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억지로 떠맡은 곳도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북동쪽에 있는 땅입니다.”
“억지로 떠맡았다?”
드낙이 결코 모르는 알짜배기 정보였다.
“〈남부 왕국〉의 정세는 혼잡합니다. 그중에서도 횃불 성채를 가지고 있는 토치라이트 가문은 메디오 영주에게 큰 골칫거리입니다. 왕족과 결탁하여 물을 먹인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북동쪽의 영지입니다.”
“세수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의 땅을 줘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최소한의 세금은 바쳐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본다면 토치라이트 가문의 역량을 소모시킬 수 있습니다.”
드낙이 감탄했다. 만약 그렇다면 토치라이트 가문이 자신에게 그 땅을 그냥 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또한 이 아귀 같은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드낙 님에게 유리합니다. 어째서 이곳에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피만 빨리고 버려질 곳입니다.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뺨 맞는 곳이 이곳이었다. 당장 드낙이 횃불 성채를 떠나야 하는 이유만 해도 열손가락을 넘을 수 있었다. 아주 개 같은 곳이었다. 그 부분을 게제라스가 긁어주니 드낙은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특히나 아주 머리가 잘 돌아가고, 귀족에 대해서 빠삭한 게제라스이다보니 신뢰성도 뛰어났다.
“이 기회를 발판으로 삼아서 빠져야 하는 것이 최고의 시나리오입니다.”
“맞다.”
절로 수긍했다. 그만큼 아귀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이곳 횃불 성채였다. 조금이라도 기본적인 정보에 대해서 모르는 척을 하면 거지새끼도 달라붙어서 훼방을 놓는 곳이었다. 드낙이 정보 수집에 크게 소극적인 이유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모르면 파리가 꼬이다 못해 되는 일도 안 되기 때문이다. 능숙한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이스핀이나 도렌에게 이제야 물을 수 있을 정도로 그전에는 그들 또한 신뢰하지 않은 드낙이었다.
약점을 서로 공유한 게제라스는 비교적 빠르게 드낙의 품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문인이 가지는 날카로운 처세술이었다. 자신이 가진 〈내정관〉의 꿈을 말하면서 말끝을 흐린 것도 드낙이 스스로 자신처럼 약점을 하나 정도는 말해주기를 유도한 것이었다.
세밀한 것에 대한 화법은 빠르게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알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모든 것이 간략화되고, 직접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해가 지기 전에 바로 나가십시오. 총관을 통해서 짐수레를 빼내시면 될 겁니다.”
드낙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일어났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했다. 그가 거칠게 문을 열며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백수 게제라스〉는 차갑게 눈을 빛냈다.
‘이번 일로 껑충 뛸 것인가, 아니면 잡아먹힐 것인가. 모든 것은 그대의 손에 달려있소.’
껑충 뛴다면 게제라스는 진심으로 드낙을 밀어줄 생각을 가졌다. 만약 그가 잡아먹힌다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제국으로 향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각오가 있기에 드낙을 빠른 시일에 방문한 것이기도 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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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