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4 <-- 백수 게제라스 -->
드낙은 〈백수 게제라스〉에게 그 알량한 문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을 다시 찾아오라고 했었다. 거침없이 자신에게 시험을 건 것과는 다르게 게제라스는 밑바닥 중의 밑바닥에 있었다.
다시 외청으로 갈리 없었고, 한다고 해도 성은커녕 영지 하나 없는 이름만 귀족인 곳의 집사가 전부였다. 혹은 부상(富商)이나 일신(一身)의 무력으로 성공한 자의 총관이 고작일 것이다.
‘〈늑대 용병단〉은 내 한 몸담을만하다.’
드낙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게제라스는 문인의 라인을 이용해서 그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획득하고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나이가 많을수록 라인이 많아지고 깊어지는 것이 문인의 특징이었다.
덕분에 아버지에게 다시 뺨을 맞았지만 얻은 정보는 깊었으며 단벌이지만 푸른색의 옷도 받았다.
‘늑대 용병단이 지닌 땅은 탄탄하다.’
귀족과 신전의 권력 싸움이 표면화된 곳이 바로 늑대 용병단이었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늑대 용병단의 기반과 조건이 탄탄하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늑대 용병단을 두고 각을 세울 수 없을 것이다.
‘혼자서 활동해도 언젠가, 장원 하나는 어떻게든 건지는 것이 자유기사다. 거기에 드낙은 생각보다 천한 것들과 함께해도 상관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자유기사는 드물다.’
세상 어느 천지에 가문을 세우겠다고, 용병단을 꾸린 자유기사가 있을까? 또한 드낙은 용병단의 구색을 갖추기도 전에 큰 건물을 구매하고, 총관과 경비병을 받아들였으며 문인을 초빙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다.’
신분은 일단 좀 접어두고, 자신의 세력을 갖춘다는 뜻은 결국 자신의 가문을 다시 고쳐잡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스스로가 가진 장벽을 허물었다는 뜻이다. 머리가 비상함을 뜻했다.
‘또한 고개를 숙일 줄 안다.’
무엇보다도 드낙은 아무것도 없는 〈백수 게제라스〉에게 존대를 하며 무례함에도 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가장 큰 가치였다. 게제라스의 말이 옳으면 그곳을 향해 고개를 숙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머리가 될 수 있음이다.’
드낙을 자신의 의견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디서든 주관적인 게제라스라서 조직에서 뭉툭 튀어나와서 망치로 얻어맞는 게제라스였다. 드낙은 그가 있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
‘자유기사 드낙에게는 절박함이 있다.’
그게 바로 백수 게제라스가 발품하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다시 게제라스가 문인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드낙에게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붙어있는 것이 좋았다.
‘이번 사건을 거치고, 다른 곳으로 향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계속 있어도 상관이 없지.’
토치라이트 가문에서 오랫동안 그들의 문서 처리와 온갖 행정 일을 했던 아버지를 두었기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살 수 있다는 보장이 게제라스에게는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 서둘러 게제라스가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드낙은 그를 환대해주었다. 하지만 까무러치듯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도박 아닙니까?”
“귀족과 신전에게 세력으로 이길 수 없으니 정공(正攻)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 아닙니까?”
드낙은 그 말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권력이라는 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 때문이었다. 확신이 필요했다.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 말에 게제라스가 나무 창문을 열어서 시간을 가늠했다. 여름이라 밤이 되지도 않았고, 해질녘이 시작이 되지도 않았다.
‘시간은 충분하군.’
다시 나무 창문을 닫은 게제라스가 의자에 앉았다.
“공을 독식해서 귀족과 거래하는 것이 주목표입니다. 전신갑주가 없어도 기습을 한다면 흑마법사를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드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검은 문〉을 통한 다양한 능력이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늑대들이 많았다. 흑마법사 하나 조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게 안 되더라도 노예들을 투입하면 그만이었다.
‘만약 정말로 이 계획을 진행한다면, 이스핀과 도렌만 제외하고 다 무덤 속에 밀어뜨릴 정도의 각오는 해야 한다.’
드낙은 눈을 감으며 게제라스의 말을 잠시 몸짓언어로 중단시키며 각오를 다졌다. 흑마법사가 보통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기사를 죽일 함정을 파는 놈들은 결코 보통이 아니었다.
‘기사를 죽일 각오로, 나서야 한다.’
살인멸구를 하더라도 〈밴쉬 에로우(Banshee Arrow, 악령 화살)〉이 필요하다면 써야 할 생각을 먼저 가지기도 했다. 또한 흑마법을 막을 목걸이도 있었다. 충분히 붙을만 했다. 드낙이 각오를 다지는 모습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열이 차오르는 광경이었다.
〈변종 키메라 포낙서스〉와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찌꺼기를 받아들였기에 풍기는 기세가 제법이었다.
“잡는다고 쳐도, 그전에 어떻게 밖으로 나갑니까? 들킬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드낙의 말에 게제라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드낙이 너무나도 귀족과 신전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병 600명을 풀려면 얼마나 많은 행정처리를 해야 하는지 모르십니까? 못해도 앞으로 2일은 더 고생할 겁니다. 그 뒤에 군량미를 확실하게 내어야 하니 또 문인들이 머리가 터지겠죠. 행정처리가 끝나면 바로 나갈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중세 시대의 행정처리는 끔찍했다. 괜히 병참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 난다고 말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용병들이 횃불 성채를 수색하게 되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용병들이 알아서 먹을 것을 사서 가져가는 게 아닙니까?”
“그럼 나설 용병들이 없겠죠. 의뢰비는 동화 500닢밖에 안 준다고 합니다. 흑마법사의 거처를 찾으면서 자연히 그들 하수인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어느 미친놈이 하겠습니까? 다른 것을 토치라이트 가문에서 대어주니 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일단 숫자가 600명이니 할 만하다고 여겨지고 말입니다. 아마 100명씩 뭉쳐서 다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게제라스의 말에 드낙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훨씬 엉성한 수색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기사와 사제들이 떠돌이로 돌아다니고 있는데, 언제 모이겠습니까? 한참 남았죠. 일주일은커녕 한 달 뒤에 나갈 겁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묻지 않았습니까?”
〈결정하셨습니까?〉라고.
“아.”
그제서야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급하게 추진하고 있는 드낙이었다. 적어도 얼굴의 솜털이 빠지고 세상으로 나와야 했는데도 횃불성채로 올라왔고, 행동력이 있게 움직이고, 일을 벌였다.
드낙의 발 빠른 행동력과 귀족과 신전의 일처리는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왈가불가하면서 늑대 용병단을 빌미로 서로를 가늠하고 거래하는 것은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블러프였다. 귀족과 신전이 한 행동은 모두 헛수라는 것이었다.
“만약 제가 신전이든 귀족이든 이미 거래를 결정했다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 편을 들어도 한 달 뒤에는 서로 손을 잡고 있을 겁니다. 그때쯤 되면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될 수밖에 없죠.”
드낙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결국에는 서로 악수하기 위한 테이블이 드낙이라는 소리였으니까. 세력과 세력의 싸움은 결국 칼로 물베기라는 소리였다. 긴장감을 조성해서 흑마법사와의 전투 전에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에 불과했다.
귀족의 가신들은 신전과 거래를 하며 각을 세우고, 괜히 분위기를 잡을 것이다. 신전 또한 〈빛의 전령 오메인〉이 성기사와 사제를 휘어잡는 수단으로 이용할 것이다.
그게 바로 드낙이 어느 편에 섰을 때 일어날 일이었다. 물론 모든 준비가 마치고 나서는 바로 화해무드로 돌아서서 손을 잡게 될 것이다. 흑마법사라는 공통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드낙은 답답함에 옷의 앞섬을 풀어헤쳤다.
‘진흙탕이다.’
밑바닥에서 그저 회사에 출퇴근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음흉한 곳이 정치판이고, 세력의 부딪침임을 더욱더 체감하게 되었다. 실로 무서웠다. 그리고 그곳에 일침을 가하라는 〈백수 게제라스〉가 괜히 대단해 보였다.
저런 결단을 할 수 있다니. 드낙으로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드낙의 반응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 게제라스가 괜히 흐뭇하게 웃었다.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는 훈련을 한다고 밖에 나간다고 해도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제법 나이가 있으신 총관의 연줄을 이용해서 식료품이 든 짐수레를 옮기면 끝입니다.”
그리고는 게제라스가 손가락을 하나 올렸다.
“한 달! 한 달 안에 흑마법사의 거처를 공략하면 됩니다.”
“그 기간 사이에 귀족과 신전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게제라스가 음흉하게 흐흐흐 거렸다.
“귀족들은 낭패한 표정을 짓겠지만, 큰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가 공을 세워서 찾아가면 그전에 접촉해서 저희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면 그만입니다. 아마 쓸모없는 북동쪽의 영지를 조금 내어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북동쪽의 척박한 마을 하나 주겠지요.”
“전신갑주는 못 받습니까?”
“당연히 받아야죠. 하지만 그것을 받으려면 드낙 단장님이 어디 가문인지를 말해야 합니다.”
드낙이 절로 눈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게제라스는 드낙의 가문이 그저 세월에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죄를 저질러서 목이 날아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가문의 이름을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증명할 방법도 없습니다. 구색만 갖추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토치라이트 가문은 드낙 단장님을 귀족으로 대우하게 될 겁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귀족에게서 자투리 영토나 마을 하나를 받는 순간부터 이미 귀족 대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귀족이 평민에게 땅을 줄 수 있습니까? 정식 귀족은 아니지만 이미 귀족이나 다름이 없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아크온 경에게 가죽이나 금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건 거래 아닙니까?”
게제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하사〉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거래가 아닙니다. 지금 하는 것도 말이 거래처럼 보이지, 받을 때는 하사를 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그러니 공을 독식하는 것이 오히려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드낙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싸하다.’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이 〈흑마법사의 거처〉를 토벌한 자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적게 주면 명예가 추락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이토록 뭐라도 하나 고용해서 빨리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귀족은 명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좇는 경향이 매우 심했다. 동시에 많은 현물을 가지고 있었다. 땅, 목재소, 광산, 영토, 다양한 명목의 세금까지.
그것을 쥐고 있게 해주는 원동력 중에 하나가 명예였다.
“귀족이 나서지 않아도 신전은 제가 없어지면 서둘러 절 찾지 않겠습니까?”
“소수의 신전이 뭘 하겠습니까? 가뜩이나 여름이라 병든 자들이 매일 찾아오는데. 굶는 자도 많아지고. 자기들 할 일에 치여서 보내더라도 한 명을 보내는 게 최선일 겁니다.”
“그때는 어떡합니까?”
드낙이 하나하나 모두 게제라스의 의견을 묻자 그는 짜릿함을 느끼면서도 덤덤하게 말했다. 기사를 마치 아래에 둔 기분 같았다.
“혼자서 와봤자 소용없습니다. 몇 명을 두어서 몸으로 가로막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다 무력행사를 하면 어찌합니까?”
“드낙 용병단장이 있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상황을 설명한다면 귀족은 옳다구나 싶어서 저희들의 편을 들어줄 겁니다. 어차피 저희가 독식한 공은 귀족에게 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기사가 노예의 팔 하나 분지르지 않아도 저희들이 분지르면 그만 아닙니까?”
지독한 말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세력과의 싸움에서 동수를 가지기 어렵다고 게제라스가 말하였다. 드낙은 정말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참 잘하네.’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것이 많았다. 바로 게제라스가 스스로 말한 〈장원과 영토〉에 대해서였다. 드낙은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데도 마치 그것을 받아야 한다는 듯이 굴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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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조아라와 계약을 했습니다. 비문이 보기 힘든 분들은 나중에 교정검열된 것을 보면 더 편하게 글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